• 신편 한국사
  • 근대
  • 47권 일제의 무단통치와 3·1운동
  • Ⅲ. 3·1운동
  • 4. 3·1운동의 영향과 의의
  • 1) 3·1운동에 대한 열강의 반응
  • (1) 중국

(1) 중국

 중국 신문들은 3·1운동이 발발하자 이 독립운동의 진전상황을 크게 보도하였다. 상해에서 발간되던 孫文 계통의≪國民日報≫는 1919년 3월 12일부터 상해에서 5·4운동이 발발하던 5월 7일 하루 전까지 한국의 3·1운동 상황을 20회 이상 보도하였다. 북경의 영자신문≪북경데일리뉴스(Peking Daily News)≫도 거의 매일같이 3·1운동 소식을 보도했다. 중국의 5·4운동에 결정적인 영향을 끼쳤던 북경의 시사주간지≪每週評論≫은 중국의 신문화운동의 기수인 陳獨秀와 李大釗가 편집인으로 있었는데 제13호와 제14호에 한국의 3·1운동에 대해 해설기사를 싣고 중국 국민들이 반일제·반매국노 투쟁에 궐기할 것을 호소하였다. 이런 언론의 보도는 북경 대학생들에게 깊은 자극을 주었다. 북경 대학생들의 잡지≪新潮≫도 1919년 4월 1일자에 한국독립운동에 관한 2편의 논문을 게재하며 3·1운동을 본받아 중국 국민들도 궐기할 것을 촉구하였다. 이 잡지에 기고하였고 후에 5·4운동의 학생대표로 활동했던 傅斯年은<한국독립운동중의 신교훈>이란 글에서 3·1운동은 정신면에서 “혁명계의 신기원을 열었다”고 하였다. 북경대학 학생구국회의 월간잡지≪國民≫, 1919년 4월호에도 한국의 3·1운동을 특집으로 4편의 논문을 게재하였다. 북경대학 구국학생회는 이런 분위기 속에서 5월 2일≪국민≫편집실에서 5·4운동을 위한 시위운동을 결의하고, 천안문 광장에서 시위운동을 주도하였다.

 상해에서도 5월 7일 중국의 국치기념일에 약 2만 명이 참가한 가운데 국민대회를 개최하였다. 이때 약 30명의 한인청년독립단 청년들이 참가하여 반일문서를 돌리며 시위운동에 참가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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