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편 한국사
  • 근대
  • 47권 일제의 무단통치와 3·1운동
  • Ⅲ. 3·1운동
  • 4. 3·1운동의 영향과 의의
  • 1) 3·1운동에 대한 열강의 반응
  • (2) 미국

(2) 미국

 미국 정부는 한국민족과 한국의 독립운동에 그다지 관심을 갖지 않았다. 그러나 3·1운동은 미국 여론의 주목을 받았다.≪뉴욕타임즈(The New York Times)≫는 3월 20일부터 한국의 독립운동과 인권상황에 대해 다루기 시작하였다. 미국 연합통신(UP)은 1919년 3월부터 1920년 12월 15일 사이에 한국에 관한 기사를 9,000회나 다루었다. 이 중 일본에 유리한 기사는 50가지 정도에 지나지 않았다. 미국의 여론은 일본의 잔인성과 만주침략까지 야욕을 가지고 있는 일본에 대해 경계하는 분위기였다. 서재필은 자유한인대회와 한국친우회를 조직하여 미국 사회에 한국에 대한 동정적 여론을 확산시키기에 힘썼다.

 이런 분위기에 힘입어 미국 의회에서 한국문제가 논의되기 시작하였다. 1919년 6월 30일 미조리(Missouri)州 센트루이스(St. Louis) 출신의 상원의원인 스펜서(Spencer)는 국무장관에게 1882년의<한미수호통상조약>의 이행 필요성을 외교위원회에서 논의하자는 제안을 하였다. 1919년 7월 15일 국제연맹 비준문제를 다루던 상원에서 포인덱스터(Pointexter) 의원은 국제연맹이 표방하는 이상주의에 반하는 예로써 한국문제를 거론하며 일본의 지배 아래 있는 한국인들에 대한 잔인성과 폭력을 인정하고 있는 현실을 가리키며 윌슨 대통령의 헌장의 무의미함을 지적하였다. 네브라스카 출신의 노리스(Norris) 의원은 한국의 독립운동 과정에서 한국인들이 당하고 있는 참혹한 현실에 관한 사진을 공개하며 일본 당국의 잔혹성에 대한 자세한 보고를 하였다.

 ≪뉴욕타임즈≫는 7월 13일자에 최소한 30명이 학살된 제암리 사건을 보도하였다. 4월 중순 한국의 현실을 직접 목격하고 미국에 온 암스트롱(A. E. Armstrong) 목사는 미국 장로교 선교부 서기 아더 제이 브라운(Arther J. Brown), 미국 감리교 복음교회 선교부 서기 프랭크 메이슨 노드(Frank Mason North), 미국성서회 서기 윌리암 제이 헤븐(William J, Heven) 박사들을 만났다. 그리하여 4월 16일 교회연합회 동양관계위원회가 열리게 되었다. 위원회는 한국으로부터 30명 이상의 믿을 만한 선교사, 외국인들의 보고서를 이용하여 한국에서의 잔학행위에 대한 보고서로≪한일사태(The Japan-Korea Situation)≫를 통해 일본의 식민지 체제, 한국 독립운동의 기원, 한국인의 항거와 경찰의 포악 등과 함께 34개의 일제 잔학상을 폭로하였다.

 이후 미국 의회내에서 한국문제에 대한 동정적인 논의가 몇 차례 있었지만 미 행정부에 준 영향은 별로 없었다. 일부 의원들은 국제연맹 비준에 대한 반대자료로 한국의 상황을 활용하였다.689) 손보기,<3·1겨레싸움과 미국의 반향>(≪한민족독립운동사≫6, 국사편찬위원회, 198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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