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편 한국사
  • 근대
  • 47권 일제의 무단통치와 3·1운동
  • Ⅲ. 3·1운동
  • 4. 3·1운동의 영향과 의의
  • 1) 3·1운동에 대한 열강의 반응
  • (3) 영국

(3) 영국

 영국은 동경 주재 영국대사관으로부터 4월 24일 공식적으로 3·1운동에 대해 보고를 받자 식민주의의 본산답게 자국과 그 식민지 출신의 거류민 보호조치를 즉각 취할 것을 지시하면서 한국의 독립운동에 대해서는 어떠한 관심이나 동정을 표하지 않았다. 해외의 한국인들이 영국에 대해 4월에 조직된 임시정부에 대한 승인을 요구하자 “한국은 1910년 일본에 합병되었으며 따라서 이번 반란은 일본 국내문제로서 의심할 나위 없이 쉽사리 진압될 것이다”고 하며 무시하였다. 또한 영국은 한국사태를 구실로 일본이 만주에 대한 영토적 야심을 표출시킬 것을 우려하여 북경주재 영국공사 존 죠단(John Jordan)에게 만주에서 활동중인 한국 독립군의 무장을 해제하도록 중국 정부에 압력을 가할 것을 지시하였다.

 그러나 서울 주재 영국 대리총영사 윌리암 엠 로이즈(William M. Royds)는 한국에 대한 일본의 식민지정책과 시위운동의 진압방법에 대해 상당히 비판적 시각을 갖고 한국인들의 독립운동에 호의를 보였다. 그는 본국에 보내는 보고서에서 한국인들이 자치역량이 있음을 강조했다. 동경 주재 대리대사 비일비 엘스톤(Beilby Alston)도 3·1운동에 대한 일본의 정책에 반대의 입장을 취하였다. 그러나 이러한 보고들은 영국 외무성의 정책을 바꾸게 하지는 못했다. 영국은 영일동맹관계를 더 중시하여 한국사태에 대해 개입하지 않는다는 입장을 견지하였다.

 제암리 학살사건의 발발은 세계 문명국가의 주의를 환기시켰지만 영국은 다만 한반도에서 일본의 극단적인 가혹성을 완화하여 일본의 지배권을 약화시킴이 없이 주민들의 생활을 향상시키는 방향에 머물러 있었다. 영국은 이집트나 인도에서와 같이 자치권을 확대하는 것이 한국문제의 해결로 보았다. 1918년 8월 사이토 마코토(齋藤實) 총독이 부임하자 외무성 관리들은 한국문제 해결을 위해 대체로 만족스럽게 받아들였다.690) 구대열,<3·1운동에 대한 해외의 반응>(≪한민족독립운동사≫3, 국사편찬위원회, 198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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