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편 한국사
  • 근대
  • 48권 임시정부의 수립과 독립전쟁
  • Ⅰ. 문화정치와 수탈의 강화
  • 1. 문화정치의 실상
  • 1) 경찰기구의 강화
  • (1) 보통경찰제의 확립

(1) 보통경찰제의 확립

 식민지의 폭발적인 저항은 제국주의 국가의 통치수단 및 형태의 변용을 초래하였다. 이는 비단 일본에 국한된 문제는 아니었다. 인도의 ‘대반란(세포이 난)’ 이후 영국의 인도 통치방식은 제한적이지만 인도인에게 자치를 부여하는 방식으로 전환하였다. 물론 이러한 현상이 제국주의 모든 국가에서 일률적으로 일어났다고 보기에는 한계가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에 대한 연구자들의 논의는 대략 두 가지로 요약된다. 하나는 통치방식의 전환주체 입장에서 식민지의 외연성을 강조하고 나아가 지배논리의 현실성에 초점을 맞추고 있으며,001)김동명,<1920년대 식민지 조선에서의 정치운동 연구>(≪한국정치학회보≫32-3, 1998). 다른 하나는 피억압 민족의 대항세력에 대한 기만적인 분열책과 이를 통한 식민지의 영구지배가 목적이었다는 데 초점을 맞춘 경우이다.002)姜東鎭,≪日帝의 韓國侵略政策史≫(한길사, 1980).
朴慶植,≪日本帝國主義의 朝鮮支配≫(청아출판사, 1986).

 일제가 추진한 ‘문화정치’는 조선총독부의 관제개정이나 헌병경찰제도에서 보통경찰제도로 탈바꿈한 것에 지나지 않으며, 지배대상인 식민지 조선인의 삶의 질적 수준 향상 및 정치참여와 경제력 향상에 어떠한 영향을 미쳤는가에 대한 기본적 입장이 선행되어야 이해할 수 있는 것이다.

 주지하듯 일제는 1910년 한일합병 이후 강력한 헌병경찰제도하에서 무단통치의 상징성을 도출하였다.003)朝鮮總督府 警務局,≪朝鮮警察之槪要≫(1925), 6∼9쪽. 이러한 무단통치에 대하여 조선인은 저항을 통해 그들의 독립에 대한 열정을 강하게 표출하였다. 즉 조선총독부에게 헌병경찰 만능시대에 대한 심각한 반성과 자기쇄신을 압박한 것이 3·1운동이었다. 일본 정부는 3·1운동 이후 식민통치에 대한 기본적 수단의 전환을 꾀하였다. 당시 일본 수상인 하라 다카시(原敬)는 3·1운동 이후 조선의 ‘신정치’에 대한 자신의 견해를 다음과 같이 피력하였다.

조선은 내지(일본)와 지리상 관계에서 밀접되어 있을 뿐만 아니라 인종은 물론 풍속, 인정도 내지와 큰 차이가 없다. 때문에 일본인과 조선인은 똑같이 제국 주민으로서 정사상 차등이 있을 수 없을 뿐 아니라 모든 면에 걸쳐 어떠한 이유로도 차이가 있을 리 없다(≪東京朝日新聞≫, 1919년 8월 20일,<原首相 談話>; 강동진,≪日帝의 韓國侵略政策史≫, 한길사, 1980, 299쪽 재인용).

 이러한 분위기는 일본 식민지정책에 대한 전반적인 통치수단 재구성의 변용을 초래하였으나 근본방침은 변하지 않았다.004)內田良平은 수상 原敬에게 조선의 3·1운동은 총독통치에 대한 조선인들의 무지 및 몰이해에 기인한 것이라고 하여 이를 주지시키는 것이 신정치의 주목적이라고 하였다. 이를테면 조선인 가운데 상층부를 포섭하여 이들로 하여금 식민통치의 정당성을 선전·주장할 수 있도록 해야 한다는 것이었다(姜德相 編,≪現代史資料≫26, 朝鮮(2), みすず書房, 1977, 618∼619쪽). 제3대 조선총독으로 부임한 사이토 마코토(齋藤實)는 해군대장 출신으로 당시 일본정부의 분위기에 편승하여 발령된 전형적인 무관이었다. 그리고 정무총감으로 부임한 미즈노 렌타로(水野練太郞)는 전 내무차관으로 사이토에게 인사권을 위임받고 이른바 ‘문화정치’의 틀을 마련한 인물이다. 이들 총독 핵심부 인사는 먼저 1910년대 총독정치의 근간인 헌병경찰제를 폐지하고 보통경찰제를 실시하였다. 이른바 ‘민중경찰제’의 이행은 이미 1910년대부터 그 조짐이 보이고 있었다. 헌병은 무력의 상징으로 의병진압에 효용성이 가장 컸지만, 합병 이후에는 그 기능이 상당히 상실되었다.005)松田利彦,<日本統治下の朝鮮における警察機構の改編-憲兵警察制度から普通警察制度への轉換をめぐって->(≪史林≫74-5, 1991), 75∼76쪽.

 3·1운동 직후 1919년 6월 10일 다나카 기이치(田中義一) 육군대신은 조선 정무총감 야마가타 이사부로(山縣伊三郞)에게 헌병경찰제도 폐지에 관한 의견서를 전달하였다. 이를 기점으로 헌병경찰제 폐지론이 강하게 제기되면서 내무부장 우사미 가쓰오(宇佐美勝夫)에 의하여 빠르게 추진되었다.006)松田利彦, 앞의 글, 82쪽. 이렇게 추진된 경찰제도 개정에서 외형적으로 나타난 가장 큰 특징은 경찰력의 증강을 수반하였다는 데 있었다. 1919년 8월 헌병경찰관은 14,341명이었으나 1920년 2월에는 경찰관이 20,083명으로 증원되었다.007)糟谷憲一,<朝鮮總督府の文化政治>(≪近代日本と植民地≫2, 岩波書店, 1992), 131쪽. 이는 무단통치기 헌병경찰제도의 이중성에 대한 비판의 대가였다. 종래 경찰은 헌병이 기본조직을 이루고 있어 그 우두머리인 경무총장은 조선주재 헌병사령관이, 각 도의 경무부장은 각 도 헌병장인 헌병좌관이 맡게 되었으며 헌병장교 및 준사관과 하사는 경시 및 경부에서 임용할 수 있도록 되어 있었다. 그 운영에서는 양자의 특성을 살려 경찰은 개항지 및 철도연선을 비롯한 주로 질서를 필요로 하는 곳에 배치되어 행정 및 사법경찰의 기능을 담당하였고, 헌병은 주로 군사경찰상 필요한 지역, 국경지역, 의병이 출몰하는 지방에 배치되었다.008)김민철,<식민지통치와 경찰>(≪역사비평≫24, 역사문제연구소, 1994), 210쪽. 그러나 일제는 3·1운동 이후 이 제도를 가지고 더 이상 식민지를 통치하는 것은 무리라고 판단하였다.009)松田利彦, 앞의 글, 69쪽.

 관제개정에 즈음하여 조선총독부에서는 다음과 같은 말로써 새로운 정치의 구현을 선전하였다. “조선통치의 방침인 一視同仁의 대의에 따라 민중의 복리를 증진하고 동양의 평화를 영원히 유지하기 위해서는 한일합병의 大精神으로써 … 문화적 정치의 확보에 따라 조선의 민생을 안정시키는 것이다.”010)朝鮮總督府,≪朝鮮に於ける新施政≫(1923), 1∼3쪽. 즉 새로운 정치를 구현하기 위해서 총독과 정무총감을 경질하고 관제개혁을 추진하여 조선을 새로운 방식으로 통치한다는 것을 천명한 것이다. 이 가운데 핵심이 경찰제도의 전환이었다.

 일제는 경찰제도를 개정하면서 특히 지방청에 있는 도 장관에게 경찰권이 없기 때문에 경무부장 이하 경찰관 사이에 명령체계의 혼선이 초래되기도 하고 종종 협조가 이루어지지 않는 경우가 있다고 하여 이를 단선화하였다. 따라서 이 개정에서는 경찰관서 관제를 폐지하고 중앙사무를 총독부로 이관시키며, 同部에 경무국을 신설하고 지방경찰사무는 각 도 장관이 관장하게 하며 총독부 산하에 경찰사무를 통일하였다. 물론 외형상으로는 명령의 수직하달이 생명인 경찰제도의 보완을 주목적으로 한 듯 하지만 실질적으로는 지방에 대한 중앙의 유기적인 치안유지책을 강화시키는 방책이었던 것이다.011)朝鮮總督府, 李忠浩·洪金子 譯,≪朝鮮統治秘話≫(螢雪出版社, 1993), 26∼27쪽.

 일제의 경찰제도의 변화는 1府郡-1경찰서, 1面-1주재소를 표준으로 한 긴밀한 배치를 실현하였다. 이는 3·1운동의 탄압과정에서 경찰제도의 허점을 보완하고자 함이었다.012)姜德相 編,≪現代史資料≫26, 602쪽. 그러나 일제가 보통경찰제도를 실현하는 데는 몇 가지 해결해야 할 점이 있었다. 먼저 재정확보이며,013)1918년 경찰관계비는 약 800만 엔이었으나, 경찰관의 증원 등에 따라 1,600만 엔으로 증가하였다. 이는 전년에 비하여 배 이상 증액된 것으로, 총독부 예산의 약 10%를 차지한다. 따라서 보통경찰제로의 전환이 식민통치에 이완을 가져온 것이 아니라 오히려 더 적극적인 감시·통제체제를 수립하였음을 알 수 있다(朝鮮總督府 警務局,≪朝鮮警察之槪要≫, 103쪽). 전 단계와의 차별성, 식민지 민중에 대한 경찰 인식의 전환이라는 측면이다.014)김정은,<1920∼30년대 경찰조직의 재편>(≪역사와 현실≫39, 한국역사연구회, 2001). 일제가 헌병경찰에서 보통경찰제도로 그들의 통치권력을 전환하였다고 그 목적성을 상실한 것은 아니다. 따라서 이러한 목적성에 부합되고 유기적인 공조체제를 완비하기 위해서는 재정조달이 무엇보다도 급선무였다. 이러한 측면에서 헌병경찰제도와 보통경찰제도의 계통표를 정리하면 다음의<표 1>·<표 2>와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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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표 1>헌병경찰제도
<표 1>헌병경찰제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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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표 2>보통경찰제도
<표 2>보통경찰제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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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경무국은 경찰 및 위생사무를 분장하고 도에는 제3부를 두고 부장은 도 사무관으로 임명하였다. 또한 1부군-1경찰서의 원칙에 따라 각 부군에 경찰서를 설치하여 경시나 서장을 임명하고 경부 밑에 경부보를 새로 두었다. 종래 조선인만으로 임명된 순사보를 폐지하고 이들을 일률적으로 순사로 임용함으로써 경찰관리의 대우를 개선하였다.015)朝鮮總督府,≪朝鮮統治秘話≫, 119쪽. 이와 함께 헌병대의 역할은 다른 방향으로 전환되었다기보다는 본래의 기능을 더 충실하게 수행할 수 있도록 병제를 개정하였다. 즉 헌병대는 국경지대 또는 독립운동이 격렬한 곳에 한하여 배치하였다.016)松田利彦, 앞의 글, 84쪽.

 일본정부는 보통경찰로의 이행과 관련해서 과거 헌병경찰의 인력으로는 외형적인 수행이 어렵다고 판단하였다.017)朝鮮總督府,≪朝鮮統治秘話≫, 115쪽. 즉 각 府·縣에 할당된 500명의 현임 순사를 조선에 전보시켜야 하고 거기에 3,000명의 순사를 새로 모집해야 하는 문제에 봉착하였다. 그러나 이러한 인원 충원은 보통경찰제의 확립이라는 표면적인 이유보다 3·1운동 이후 촉발된 식민지 조선의 저항을 보다 효율적으로 억제하는 데 목적이 있었다.018)김민철, 앞의 글, 215∼216쪽.

 경찰제도의 개정은 관제개정 발표가 있었던 8월 20일 이전에 이미 東京에서 대강의 개요가 완성되었으며,019)≪朝鮮總督府官報≫, 1920년 8월 20일, 號外. 그 골자는 앞서도 언급하였듯이 경찰소와 주재소를 증가시키는 것이었다. 이 가운데 內鮮一體의 예로 들 수 있는 것이 순사보에 대한 처우로서, 한 계급 아래로 취급되어 왔던 조선인 순사보들을 모두 순사로 끌어 올렸으며 헌병보조원으로 일하던 조선인 대부분도 순사로 바꾸어 임명하였다.020)朝鮮總督府,≪朝鮮統治秘話≫, 119쪽.

 총독 사이토는 문화정치의 가시적 효과를 거두고자 먼저 1919년 11월 4일 총독관저를 경비하던 헌병 대신 보통경찰에게 모든 업무를 이관하였다. 이로써 헌병이 맡던 일을 보통경찰이 담당하는 체제로의 전환을 꾀하였으며, 이를 정치선전에 활용하였다.021)朝鮮總督府,≪齋藤實文書≫13, 185∼186쪽. 1920년 말 정보위원회의 설치를 통해 조선총독부가 정치선전을 보다 효과적으로 추진했다는 사실에 비추어 볼 때 일련의 제도개정은 체제유지 차원에서 이루어진 것이었다.022)姜東鎭, 앞의 책, 29쪽. 3·1운동 직후 정보과를 확충하여 정무총감을 위원장으로 하고 경무국장·재무국장 등 관계 고급 관리 12명과 민간의 지식경험자 약간 명으로 구성하였다.

 그러나 보통경찰제를 확립하는 데 소요된 기간이 불과 2개월이었기 때문에 그 구성인원의 자질은 떨어질 수밖에 없었다. 당시 2개월이라는 짧은 기간에 제한된 심사인원만으로 3,000명의 인원을 선발하고 통치체제의 근간을 개정한다는 것은 매우 어려운 문제였다. 선발된 인원 가운데 심지어 목욕탕 근무자, 요리집 배달부 같은 자들도 있었으며, 이들에 대한 면밀한 심사·조사를 행하지 않았기 때문에 자격을 갖추지 못한 인물도 상당수에 달하였다. 또한 이들을 충분히 교육시킬 수 있는 절대적 시간이 부족하였기 때문에 인적 구성이라는 형식적인 측면을 달성하는 데 치우쳐 실질적인 보통경찰의 업무를 수행하는 데는 많은 문제점이 노출되었다.023)朝鮮總督府,≪朝鮮統治秘話≫, 123쪽. 각 도의 순사교습소는 경찰부에 두고 초임 한국인 순사에게 3개월 내지 4개읠의 교육을 실시하였으며 초임 순사에 대한 학과는 普通學·語學·실무강습·수양훈화·조련·무술포승술·체조·수영·선박·신호법·선박의 식별 방법 및 조선술 등이며 주로 실용적인 측면을 강조하여 교수되었다(朝鮮總督府 警務局,≪朝鮮警察之槪要≫, 80∼81쪽).

 그렇다면 일제가 경찰조직원의 부실화를 초래하면서까지 보통경찰제를 시행하였던 근본적인 원인은 무엇인가. 이는 외적 요인의 강제에 의한 경찰조직의 변화를 초래한 데서 알 수 있듯이 두 가지의 연동작용에 의한 일련의 결과이다. 경무국장 아카이케 아츠시(赤池濃)는 보통경찰제 시행에 대하여, “당시 조선인 순사의 근무태도 및 사상적 경향을 무시할 수 없고 이들이 불온한 선전에 말려들 소지가 있다”024)朝鮮總督府,≪朝鮮統治秘話≫, 82∼83쪽.고 판단하였다. 따라서 일본인 순사의 확대와 이를 통한 말단 치안력의 유지를 강화하였던 것이다. 즉 3·1운동 전후 조선인 저항세력에 대한 면밀한 조사 및 체포를 위한 인적 자원은 헌병경찰제도의 틀로써는 감당하기 어려웠다고 판단하였다.025)松田利彦, 앞의 글, 83쪽. 또한 3·1운동 이후 국외 저항세력의 독립운동은 다양한 방법으로 전개되었으며, 이들 단체의 활동과 유지를 위해 필요한 것이 군자금이었다. 이들 단체에서는 군자금을 모집하기 위해 정예인원을 국내에 파견하였다. 따라서 이러한 독립운동단체의 적극적인 국내활동을 감시·탄압하기 위해 총독부에서는 1919∼1920년에 대규모의 경찰인원을 확충해야만 하였다. 그리하여 이른바 경성 ‘집중주의’와 ‘집합주의’를 택하여 치안유지에 총력을 기울였다.026)朝鮮總督府,≪朝鮮統治秘話≫, 84쪽.

 요컨대 일제가 조선의 경찰제도를 단 시일 내에 확립하였던 것은 문화정치라는 슬로건 속에 치장된 하나의 부산물에 불과한 것이다. 3·1운동이라는 거족적 저항에 직면한 일제는 보다 강력한 통치수단을 강구할 필요가 있었다. 따라서 국내외의 식민통치 비난 속에서 명분을 찾고자 하였고 그 결과물이 보통경찰제도의 확립인 것이다. 이는 군사적인 색채의 헌병경찰을 일신하여 치안유지는 순수한 보통경찰로 대체한다는 것이 조선민중에게 신정치를 선전하기 위함이었음을 의미한다.027)松田利彦, 앞의 글, 86∼88쪽. 하지만 보통경찰제도는 총독부 관제개정, 즉 식민지배 매카니즘 속에서 치안유지를 강화하기 위해 취해진 조처였음은 두말할 필요가 없다.

개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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