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편 한국사
  • 근대
  • 48권 임시정부의 수립과 독립전쟁
  • Ⅰ. 문화정치와 수탈의 강화
  • 1. 문화정치의 실상
  • 1) 경찰기구의 강화
  • (2) 신간부의 선정과 보통경찰의 기능

(2) 신간부의 선정과 보통경찰의 기능

 1919년 8월 19일 조선총독부 및 지방관 관제에 대한 개정이 단행되었다. 식민지 조선을 보다 안정적으로 통치한다는 기치하에 실행된 일제의 관제개정은 식민통치의 상징인 조선총독의 임용에 대한 부분부터 이루어졌다. 총독의 임용범위를 확장하여 오로지 육해군 대장만이 총독이 될 수 있다는 제도를 명목상 폐지하였다. 또한 총독부의 조직은 사무를 간단하게 처리하고 총독에게 모든 권한이 집중될 수 있도록 장관을 폐지하고 局 중심 체제로 이행되게 하였다.028)朝鮮總督府,≪施政三十年史≫, 135∼136쪽. 즉 종래 내무·탁지·농상공·사법을 내무·재무·식산·법무의 4국으로 고치고, 내무부에 부속되었던 학무국을 각 4국과 대등한 위상으로 승격하였다. 또 종래 독립관청이었던 警務總監部를 폐지하고 경무국을 설치하여 경찰위생에 관한 사무를 통할하였다. 그리고 總督官房의 총무·토목·철도 3국을 서무·토목·철도 3부로 하였다. 또한 지방관청의 권한을 강화하여 지방민에 대한 통치를 강화하고자 하였다.

 한편 관제개정에서 특이한 점은 조선인과 일본인 관리의 차별을 철폐한 것이다. 물론 이것은 형식적인 측면이 강하게 내포되었지만 일부 조선인들의 마음을 움직이는 데 상당한 역할을 하였다.029)濱口裕子,≪日本統治と東アジア社會-植民地期朝鮮と滿洲の比較分析≫(勁草書房, 1996), 28쪽. 조선참모부에서는 3·1운동 이후 조선인 관리에 대한 처우개선을 주문하였다. 즉 지식계급에 대한 불평을 제거하여 그들의 지위를 안정시키고 나아가 일본인과 조선인을 똑같이 등용하여 불미스러운 일을 방지해야 한다는 것이다(姜德相 編,≪現代史資料≫26, 648쪽). 구체적으로 보면 1919년 10월 <조선인 관리의 분한 및 급여에 관한 규정>을 철폐하고 일본인 관리와 균등하게<高等官 官等 俸給令>및<判任官 俸給令>의 적용을 받을 수 있게 하였다. 그리고 조선인의 특별임용 범위를 확대하였다.030)朝鮮總督府,≪施政三十年史≫, 137쪽.

 1920년 8월 보통경찰제의 실시는 경찰관의 대폭적인 증가를 가져왔는데 거의 모두는 일본인에 의해서 충당되었다. 1925년 3월 말 경찰관서 및 경찰관의 통계에 기초하여 경찰관의 민족별 구성을 보면, 경찰관 총수 18,485명 가운데 일본인이 11,125명으로 60.3%를 차지하고 있다. 더욱이 계급별 구성을 보면 경찰부장 13명은 모두 일본인이며, 경시·경부·경부보 1,257명 가운데 일본인은 981명으로 78%를 차지하고 있다. 또한 순사부장·순사의 총수 17,188명 가운데 일본인은 10,131명으로 58.95%를 차지하고 있다. 이러한 계급별 구성체계는 식민지인과 직접적인 업무관계가 많은 하급일수록 조선인 경찰이 많이 분포되어 있음을 알 수 있다.031)朝鮮總督府,≪統計年報≫(1925), 356∼357쪽.
朝鮮總督府 警務局,≪朝鮮警察之槪要≫, 44쪽.

 일제가 경찰관 확충 필요성을 인식하였던 것은 조선뿐만 아니라 만주에서도 마찬가지였다. 1910∼20년대 만주에서도 자국인의 치안유지 및 보호를 목적으로 경찰관을 충원하였다. 보통경찰관제로의 전환은 이렇듯 경찰관의 충원을 필연적으로 수반하였던 것이다. 이러한 경찰관제 개정의 핵심적인 인물이 미즈노 렌타로(水野練太郞)이다. 그는 총독 사이토와 함께 1919년 부임하여 실질적으로 관제개정을 추진하였던 인물이다. 미즈노는 총독 사이토에게서 인사권을 일임받았으며 이는 그대로 총독부 간부 선정으로 이어졌다.032)朝鮮總督府,≪朝鮮統治秘話≫, 55쪽. 미즈노가 부임하면서 당면한 과제는 두 가지였다. 하나는 실무를 담당할 총독부의 새로운 간부를 선정하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경찰관의 대폭적인 증원이었다.033)松田利彦, 앞의 글, 91쪽.

 미즈노는 사이토의 일임을 받고 먼저 총독부 간부 인선에 착수하였다.034)朝鮮總督府,≪朝鮮統治秘話≫, 38∼41쪽. 경무국장 노구치 준기치(野口淳吉), 내무국장 아카이케 아츠시(赤池濃), 학무국장 시바타 젠사부로(柴田善三郞), 척식국장 니시무라 야스기치(西村保吉) 등 4국장과 총독비서관 모리야 히데오(守屋榮夫)·이토 타케히코(伊藤武彦)를 비롯한 인물이 ‘신간부’로 선정되었다. 이들은 대부분 1907년에서 1914년 사이에 고등문관시험에 합격한 인물들로서 조선의 난국을 극복하고 조선통치를 원활하게 추진할 미즈노의 포진이었다. 또한 제3부장 인선에서는 국장들의 교섭력에 의해 확보된 인물이 대부분이었다.035)松田利彦, 앞의 글, 92∼93쪽.

 이렇게 신간부가 선정되고 경찰관이 충원되면서 치안유지와 저항탄압이라는 기능을 수행하는 경찰조직체계가 완비되었다. 특히 이들의 기능은 국경방위에서도 나타나고 있었다. 압록강과 두만강 연안지역은 독립군이 주로 활동하던 곳으로서, 1920년에서 1926년에 걸쳐 무장투쟁이 활발하게 전개되었다. 독립군은 경찰관 주재소·면사무소 등을 습격하고, 경찰관·군수·면장·면서기·일본에 협력한 자 등을 살해하고, 평안북도 경찰부 및 각 경찰서가 편성한 조사반과 교전하였다. 이러한 독립군과의 교전에 대비하기 위해서 평안북도에 경찰력이 집중적으로 배치되었다. 1925년 평안북도에 배치된 경찰관은 2,883명으로 전체의 15.6%를 차지하였다. 이는 京城府를 포함한 경기도의 2,231명을 훨씬 능가하는 숫자이다. 게다가 평안북도의 일본인 경찰관은 2,080명으로 총수의 72.1%로, 전국 경찰관 수에 비하여 일본인 경찰관의 비율인 66%를 훨씬 뛰어넘는 수치이다. 즉 국경수비의 주력은 일본인이며, 일제는 이들에게 보다 안정적인 체제유지의 임무를 담당케 하였던 것이다.036)糟谷憲一, 앞의 글, 131쪽.

경 부 경 부 보 순 사
일본인 조선인 일본인 조선인 일본인 조선인
333명 95명 611명 170명 10,131명 7057명

<표 3>일본인과 조선인 경찰의 비교표 (1924. 12)

*朝鮮總督府 警務局,≪朝鮮警察之槪要≫, 44쪽.

 한편 조선총독부는 치안강화를 목적으로 풍부한 무기를 배포하였다. 또한 이와 함께 군대식 훈련도 실시하였다.037)朝鮮總督府,≪施政三十年史≫, 141쪽. 1919년 8월에 신설된 경찰관 강습소는 새로 모집한 순사의 훈련교육을 담당한 곳이며, 이후 경부 이하의 교육도 담당하여 경찰관의 질적 향상을 위해 노력하였다고 한다. 그러나 이러한 경찰관 강습소는 초기 급조되었기 때문에 순사의 교육이라는 측면이 시간적인 제약 속에서 이루어졌으므로 많은 한계를 지니고 있었다(朝鮮總督府 警務局,≪朝鮮警察之槪要≫, 81∼84쪽). 경찰관의 총기는 보통경찰제도로 전환할 때 소총 5,657정, 권총 1,272정이었는데, 1922년 10월 31일 현재 소총 13,894정, 권총 4,563정으로 크게 증가하였다. 게다가 소총은 22년식 무라타 연발기총·구라총이 폐기되고 헌병대에서 인계한 30년식 보병총, 새롭게 구입한 44식기총·38식기총이 주력으로 대체되어 보통경찰제 시행 이후 무기 지급의 질적 향상은 더욱 강화되었다. 특히 1925년<치안유지법>발포를 즈음하여 이러한 무기류의 지급은 더욱 증가하였다.038)朝鮮總督府,≪齋藤實文書≫4, 669∼671쪽.

 총독부에서 경찰관의 질적 향상을 위해 실시한 군대식 훈련은 1924년 3월 27일 개정된<朝鮮總督府 警察操典>으로 구체화되었다. 각개교련과 소대교련·중대교련·중대의 산개교련 및 중대의 밀집교련 등을 실시하였다. 경찰관에 대한 교육의 강화는 기술적인 측면에서만 이루어진 것은 아니다. 정신 함양, 즉 조선인 경찰관의 내선일체의 측면을 강화하는 교육이 진행되었다.039)糟谷憲一, 앞의 글, 132쪽.

 한층 강화된 조직체계를 구축한 경찰은 식민지에 대한 감시체제를 더욱 공고히 하였다. 총독부는 1922년 7월 13일<호구조사규정>을 제정하고 경찰서장에게 외근 순사로 하여금 3개월마다 1회 이상 호구조사를 실시케 하였다.040)경찰의 임무 가운데 호구조사는 매우 중요한 것에 속한다. 일본은 메이지유신 이후 근대적인 경찰제도를 수립하였다. 메이지정부에서도 경찰의 임무 가운데 호구조사는 필수적이며, 체제를 공고히 하는 데 중요한 것으로 인식하였다(由井正臣·大日方純夫,≪官僚制警察≫日本近代思想大系 5, 岩波書店, 1990 참조). 호구조사의 실시요령은 도마다 규정되었는데, 이는 보통경찰의 임무와 기능을 엿볼 수 있는 중요한 것이다. 특히 호구조사에서는 자산·소득뿐만 아니라 사상·당파·경력 등에 이르는 그야말로 대민사찰의 성격을 띠고 진행되었기 때문에 일반적인 인구센서스와는 그 내용면에서 질적인 차이를 보이고 있었다. 경찰의 호구조사 및 봄과 가을에 실시한 대청결행사는 일반 식민지 조선인을 주기적으로 감시하는 기능을 하였다.041)≪朝鮮總督府官報≫, 1922년 8월 17일.

 헌병경찰에서 보통경찰제로의 전환은 조선총독부의 문화정치에 부합하여 정치선전으로 이용되었다. 이는 경찰의 업무를 대민편의제공 업무로 전환하는 형식적 양상을 띠면서 진행되었기 때문에 나타난 현상이었다. 하지만 일반인들이 느끼고 있었던 경찰에 대한 것은 식민지경찰 그 이상은 아니었다.042)김정은, 앞의 글, 315쪽. 특히 보통경찰의 일반적 모습과는 달리 1920년대 범죄검거율은 무단통치기 보다 훨씬 많았다. 즉 문화정치를 강조하면서 식민지 조선의 경찰력은 이전에 비하여 더욱 강화되었던 것이다.

 보통경찰제로의 전환은 오히려 경찰조직의 비대화를 초래하였을 뿐 식민지인에 대한 통치방식에는 전혀 변화가 없었음을 알 수 있는 중요한 지표이다. 즉 조선총독부 경찰의 내부조직은 불안정한 상태에서 조선인을 억압하고 사회의 기강을 확립해야 하였다. 앞서 살펴보았듯이 보통경찰제의 확립은 경찰관의 증원을 초래하였으며, 이를 바탕으로 조선민중의 저항을 사전에 방지하고 조선총독부의 시정방침을 조선인에게 관철시킨다는 것이었다. 따라서 저항방지와 사회기강 확립이라는 양면적이지만 동일한 기능을 수행한 보통경찰은 공공의 안녕질서유지, 危害의 예방과 배제, 국민의 복리증진을 위해 존재한다고 하지만 실질적으로는 민중통제를 강화하기 위한 방법으로 활용된 제도였다.043)김정은, 위의 글, 314∼317쪽. 즉 총독훈시의 문화적인 행복 이익의 증진은 경찰력의 강화로 나타났으며, 표현의 자유는 검열의 강화로 대치되었다.044)鈴木敬夫,≪朝鮮植民地統治法の硏究-治安法下の皇國植民敎育-≫(北海道大學 圖書刊行會, 1989), 123∼130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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