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편 한국사
  • 근대
  • 48권 임시정부의 수립과 독립전쟁
  • Ⅰ. 문화정치와 수탈의 강화
  • 1. 문화정치의 실상
  • 2) 지방제도의 개편
  • (1) 동화정책하의 참정권 문제

(1) 동화정책하의 참정권 문제

 하세가와 요시미치(長谷川好道)의 후임으로 부임한 사이토는 1919년 9월 3일 조선총독부 관리에게 다음과 같은 새로운 시정방침을 훈시하였다.

조선통치의 대방침은 1910년 한일합병 당시 메이지천황의 조서에 입각하였다. 종래 총독부 관제 및 그 하부에서 행하였던 각반의 행정시설은 모두 이 성지의 실현을 기도하는 것 외에는 아무것도 아니다. 관제의 개정 취지는 위에 나타난 바와 같으며 일한병합의 본지에 기초하여 一視同仁을 각기 실행하였던 것이며 … 더욱이 헌병경찰에 의한 경찰제도에 대신하여 보통경찰관에 의한 경찰제도로서 더욱이 복제의 개정을 위해 일반 관리·교원 등의 복제·帶劍을 폐지하고 조선인의 임용·대우 등에 고려를 가한다(≪朝鮮總督府官報≫, 1919년 9월 4일).

 1910년 9월에 취임한 테라우치 마사타케(寺內正毅)의 훈시와 비교하였을 때 다소 유화적인 표현을 쓰고 있으나 이는 3·1운동의 영향을 참작하여 식민통치의 변용을 초래하였던 것이다. 하라 수상의 담화 내용에서도 이러한 측면, 즉 조선인과 일본인은 하나라고 하여 참정권 문제를 부각시키고 있었다.045)姜東鎭, 앞의 책, 299쪽.

 식민지를 경영하는 제국주의 국가들의 통치방침은 이견은 있지만 대략 두 가지로 구분된다. 하나는 자치방식이며 다른 하나는 동화방식이다.046)일제는 동화정책의 기조하에 교육에서도 이를 철저히 추진하였다. 당시 특수층에 대한 포섭 내지 흡수화 정책이라고도 할 수 있다. 일제는 후자의 방식으로 식민지 조선을 통치하였다. 동화주의는 일제가 정치·경제·사회·문화·교육 등 식민정책의 여러 부문 정책을 시행할 때 그들의 목적을 극대화하기 위한 명분을 창출하는 이데올로기의 역할을 맡았다. 특히 일제가 1910년대 무력을 축으로 제도적 권력과 동시에 자신들의 목적을 실현하기 위한 수단의 하나이며 무단권력을 보완하는 역할로서 동화주의라는 이데올로기를 이용하였다.047)朴成眞,≪한말-일제하 사회진화론 연구≫(韓國精神文化硏究院 博士學位論文, 1998), 113쪽. 특히 동화주의 슬로건은 內鮮融和와 內鮮一體 단계를 거치고 있는데, 1920년대까지는 대략 내선융화로서 동화의 주요 대상은 중상류층 또는 지식인 계급이었다. 나아가 이는 일제가 식민지 조선의 문화적 열등성을 강조하는 방향으로 흘러 조선인의 저항력을 약화시키고자 하였던 것이다. 이러한 동화주의 기조하에 일제는 조선인에게 제한된 정치적 참여를 신중하게 고려하였다.

 참정권은 자치방식의 기본 골격이다. 근대 국민국가에서 참정권은 국민이 “국가권력·국정에 참여하는 것을 내용으로 하는 적극적인 권리로서, 국민이 국가지배기구에 참여하든지 아니면 참여하는 자를 결정하는 권리, 즉 선거권·피선거권·국민투표권·국민심사권 및 공무원이나 배심원이 되는 권리”를 뜻한다. 하지만 20세기 초 제국주의 국가에 의해 식민지로 전락한 국가들에게 참정권을 부여하는 것은 극히 이례적인 일이다. 자치와 참정권 부여는 지배국가의 자본주의 발달과 피지배 국가의 저항과 그 역량에 의해 규정된다. 따라서 참정권 문제는 그것이 피지배민족의 독립과 효과에 어떠한 관계를 갖느냐에 따라 구체적인 의의를 확인할 수 있다.048)姜東鎭, 앞의 책, 296쪽.

원래 정부에서는 조선의 관제에 대해 오래 전부터 개혁을 단행할 생각이었다. 그러나 뜻하지 않는 소요로 인해 이것이 연기되었고, 그 후 소요가 진정되었기 때문에 전부터 추진하려 했던 관제개혁을 단행하기에 이르렀다. 여러 면에서 조선의 제도·법률 등은 일본과 비교할 때 어딘지 모르게 차별대우가 있는 듯한 느낌이 드는데 이는 단지 실제적 사정에 근거한 것이고 일본과 조선 사이에 차별을 두어야 할 하등의 이유가 근본적으로 없다. … 종국에 이르러서는 조선도 일본과 똑같은 지위에 도달하지 않으면 안되겠지만, 그렇다고 해서 사정여하를 불문하고 지금 즉시 무리하여 조선을 일본과 똑같이 만들어 놓고 이로서 日韓同化가 되었다고 생각하는 것은 아주 잘못된 견해라고 생각된다. 어디까지나 조선 자체가 가지고 있는 특수한 사정이 있다는 것을 잊어서는 안될 것이다(朝鮮總督府,≪朝鮮統治秘話≫, 158쪽).

 3·1운동 이후 일본 수상 하라가 조선의 자치불가능을 피력한 견해이다. 당시 하라를 방문한 조선의 친일파가 자치와 조선 의회 개설을 주장한 데 대해, 그는 조선의 자치는 절대 불가능하다고 일축하였으며 우회적인 조선인 정치참여를 개진하였다.049)朝鮮總督府,≪朝鮮統治秘話≫, 160∼161쪽. 사이토 또한 조선의 자치를 허용하지 않는다는 것을 부임 초부터 견지하였다.050)朝鮮總督府, 위의 책, 161쪽. 그렇다면 일본정부의 참정권 문제가 대두하게 된 근본적인 이유는 어디에 근거한 것일까. 이는 조선의 저항이 강할 때 이를 무마하고 회유할 목적에 기인한다고 할 수 있다.051)朴成眞, 앞의 책, 111쪽.

 조선총독부는 참정권문제를 정책적인 의도로 이용하였다. 특히 참정권 청원운동을 주장한 친일파들을 적극 이용하여 정치선전을 추진하였다. 청원운동을 처음 시작한 인물은 경무국장 마루야마 쓰루기치(丸山鶴吉)의 지시를 받은 閔元植이며, 이에 일부 대지주와 예속자본가가 동조하였다.052)姜東鎭, 앞의 책, 306쪽. 그러나 조선에서의 이러한 청원운동에 대하여 일본 언론의 반응은 매우 냉담했다.053)≪帝國議會衆議院議事速記錄≫4(太山, 1991), 155쪽.

 참정권 청원운동이 제기되고 이에 대한 총독부의 대응은 체제유지 차원에서 매우 유용한 측면을 내포하고 있었다. 1920년부터 1924년까지 친일운동의 주된 내용은 청원운동으로서 해마다 연중행사처럼 아무 반응도 없는 일본의회에 청원서가 제출되었다. 사이토는 참정권 문제를 조선의회 창설이 아니라 일본의회로 보내는 참정권 부여 청원에만 한정하였다.054)朝鮮總督府,≪朝鮮統治秘話≫, 161∼162쪽. 이러한 총독의 통치방침에 대하여 당시 친일인사들은 내정독립 청원을 일본 국회에 제출하기도 하였다. 1922년 3월 22일 鄭薰謨 외 42명은 일본 헌법에 저촉되지 않는 범위 내에서 일본 ‘천황’의 ‘聖慮’에 따라 조선의 내정독립을 갈구하였다.055)강동진, 앞의 책, 308∼309쪽. 그러나 이에 대해 조선민중의 반응은 냉담하였다. 일본 제국주의의 식민통치방식에 대한 정확한 이해부족과 자신들의 영달을 위해 식민주체의 실현불가능한 참정권 문제는 동화라는 큰 틀 속에서 매몰되어 갔다.056)조선의 자치론은 일반인 보다는 기업인들에게 상당한 관심을 불러일으켰다. 1923년 제정된<新朝鮮關稅令>에 酒精, 주정함유 음료, 직물을 제외한 나머지 모든 상품에 대해 무관세가 규정된 다음부터 실력양성론자는 자치주의운동에 본격적인 관심을 갖게 되었다. 한국인 기업가가 정치권력에 의해 보호받지 못하는 한 한국시장조차 차지할 수 없었음을 알았기 때문이었다(박섭,≪식민지의 경제변동≫, 문학과지성사, 2001, 125쪽).

 한편 일본 본국에서는 1923년 관동대지진과 금융불황, 1925년<치안유지법>및 정권의 교체 등 일련의 사건 속에서 체제의 공고화를 위해 여러 가지 방책을 모색하였다. 이러한 가운데 1926년 조선인의 거족적인 저항과 신간회운동으로 대표되는 민족적 저항이 고조되는 분위기 속에서 1927년부터 조선총독부에서는 조선인 참정권 부여 문제를 재론하였다.057)副島道正,<朝鮮統治に就いて>(≪齋藤總督の文化政治≫, 友邦協會, 1970), 110쪽. 한일합병 이후 식민통치 당국자가 언급하였듯이 일본과 조선은 지리적 인접성, 문화적인 동질성, 자연환경의 유사성에 기초하여 동화방식을 택하여 통치되어 왔으나, 식민지 통치를 지속적으로 수행하기 위해서는 식민지에 대한 보다 확고한 관념적 국가이념을 주입시켜야만 하였다. 총독 사이토는 1927년 조선총독부 관방 문서과장 나카무라 소노스케(中村宗之助)에게 현 시기 조선지배체제의 동요를 막을 수 있는 방안을 강구하라고 지시하였다.058)金東明,<1920년대 조선에서의 일본제국주의의 지배체제의 동요>(≪일본역사연구≫8, 1998), 68쪽. 이에 나카무라는 프랑스의 알제리 지배를 모델로 내세워 정치적 능력이 있을지라도 본국인과의 동일한 국가관념이 없다면 참정권 부여는 식민지를 위해서만 이용될 수 있고 일제에게는 큰 위험 요소로 작용할 수 있다고 경고하였다.059)金東明, 위의 글, 75쪽. 따라서 일본 의회에 참정권의 부여보다는 국가관념이 서로 다른 사실에 근거하여 자치주의 지배체제로 전환하는 것이 바람직하다고 하였다. 이러한 견해는≪京城日報≫사장으로 재임하면서 조선의 자치를 주장했던 토미시마 미치마사(副島道正)도 마찬가지였다.060)副島道正, 앞의 글, 95∼102쪽. 토미시마는 하라의 동화정책, 즉 내지연장주의 등을 비판하면서 조선인에게 일정한 자치를 주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061)森山武德,<現地新聞と總督政治>(≪近代日本と植民地≫7, 岩波書店, 1993), 17쪽. 그는 동화주의는 조선의 현실과 괴리되어 이들을 통치하는 데 역기능을 초래할 수 있어 이를 지양하고 조선 특유의 문화적 특질에 입각한 문명적 정치형식을 제공해야 한다고 하였다.062)副島道正, 앞의 글, 100쪽.
姜東鎭, 앞의 책, 347쪽.
조선의 식민지배에 대한 억압된 형태를 지속하기에는 일제에게 상당한 타격을 줄 수 있고 따라서 이를 미봉하기 위해 통치에 전면으로 내세운 것이 이른바 자치론이다.063)朝鮮總督府,<朝鮮治安の現狀及將來>(≪齋藤總督の文化政治≫), 392∼394쪽. 즉 토미시마가 자치론을 제기하였지만, 조선의 독립에 대하여서는 ‘夢想’이라 하여 실현불가능한 것으로 인식하였다. 이러한 자치론이 제기되면서 조선의 지식인들은 이에 경도되어 민족개조론과 같은 일제의 기만적인 문화통치에 포섭되는 경우가 많았다.064)朴成眞, 앞의 책, 162∼163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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