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편 한국사
  • 근대
  • 48권 임시정부의 수립과 독립전쟁
  • Ⅰ. 문화정치와 수탈의 강화
  • 1. 문화정치의 실상
  • 2) 지방제도의 개편
  • (2) 지방제도의 개편과 자문기구의 설치

(2) 지방제도의 개편과 자문기구의 설치

 조선총독부는 조선의 자치(Home rule)를 인정하지 않았지만 지방단체의 자치는 상황에 따라 점차 이를 인정할 필요성이 있다고 판단하였다. 한일합병 이후 조선총독부는 1914년과 1917년 두 차례 지방 행정단위를 조정하여 조선의 전통적인 공동체적 행정단위를 개선하고 식민지 경영에 필요한 명령조직 체계를 구축하였다.065)3·1운동 이전의 지방행정에 대해서는 아래의 연구를 참조.
강동진, 앞의 책, 323∼327쪽.
김익한,<일제의 초기 식민통치와 사회구조변화>(한국정신문화연구원,≪일제식민통치연구 1:1905∼1919≫, 백산서당, 1999).

 이러한 지방제도의 개정은 일제가 기존의 총독부 중심의 집권적 통치체제를 기본틀로 하고 3·1운동 이후 지방민에 대한 효율적인 통제를 위해서는 지방제도의 개편을 단행할 수밖에 없었기 때문에 이루어진 것이었다. 또한 일제는 지방행정 사무의 개선과 진흥을 위해 행정강습소를 설치하였다. 행정강습소는 지방관리의 훈련·보충을 목적으로 이전의 판임관 교육에 치중한 것을 지방제도의 개정 이후 다시 이 시설을 확충하여 우선 1922년 京城에 설치되었다. 교육기간은 종래 6개월에서 1년으로 연장하였고 매년 관비 강습생 약 50명을 수용하여 지방관리에게 필수적인 학과를 교수하였다.066)朝鮮總督府,≪朝鮮に於ける新施政≫, 60쪽.

 근대 국민국가의 지방자치는 ‘官治’라기 보다는 ‘民治’에 가깝다. 즉 지방행정기구의 구성원을 지방민의 선거에 의해 선출하기 때문에 정부 주도의 행정의 단일화와 지방민에 대한 직접적인 정보취득 및 대민업무를 추진할 수 있는 장점이 있다.

 조선총독 사이토는 지방제도의 개정에 대하여, “지방 民力의 함양 및 民風의 長興은 지방단체의 힘에 맡기는 것이 편리한 만큼 장래에는 적당한 시기를 보아 지방자치제를 시행하는 것을 목적으로 하고, 하루라도 빨리 이에 대한 조사 연구에 착수하라”067)朝鮮總督府,≪朝鮮統治秘話≫, 254쪽.는 뜻을 밝혔다. 총독부에서는 이 안건을 둘러싸고 두 가지 논의를 개진하였다. 첫째 자문기관을 임명제로 하는 것, 둘째 선거에 의한 의결기관으로 하는 것이다.068)일본의회에서는 1922년 1월 27일 原敬에게 조선의 자치기구 성격에 대한 질의가 있었으며, 이를 조선인의 참정권 부여와 연결하지 말 것을 주문하였다(≪帝國議會衆議院議事速記錄≫4, 224쪽). 그러나 미즈노 정무총감은 조선의 도시와 농촌 현실에 적합한 제도를 선택해야 한다는 취지를 밝혔다. 즉 도에는 평의회, 부와 면에는 협의회를 각각 설치하고 도평의회의 일부는 선거에 의해, 일부는 임명에 의해 조직한다는 취지였다. 또 부와 면협의회는 선거에 의해 선출된 의원으로 조직하는 것을 원칙으로 하여, 그 1/3은 지방 유력자 가운데 도지사가 임명한 자를 배치하고 指定面069)새 법령 시행당시의 부와 지정면은 다음과 같다. 부는 경성·인천·군산·목포·대구·부산·마산·평양·진남포·신의주·원산·청진이며, 지정면은 경기도의 수원군 수원면·개성군 송도면·시흥군 영등포면, 충청북도 청주군 청주면, 충청남도 공주군 공주면·대전군 대전면·논산군 강경면·연기군 조치원면, 전라북도 전주군 전주면·익산군 익산면, 전라남도 광주군 광주면, 경상남도 진주군 진주면·창원군 진해면·통영군 통영면, 황해도 해주군 해주면·황주군 겸이포면, 평안북도 의주군 의주면·강원도 춘천군 춘천면, 함경남도 함흥군 함흥면, 함경북도 경성군 나남면·성진군 성진면·회령군 회령면 등 24개 면이다(朝鮮總督府,≪施政二十五年史≫, 330쪽).에서는 선거주의를 택하고, 그 이외의 면에서는 임명주의로 하고 군수·島司가 이를 임명하는 것으로 하였다. 의원수는 대략 인구비례로 결정하고 그 수가 많은 곳은 30명으로 하며 적은 곳이라 할지라도 최소한 8명 이상은 배치하는 것을 원칙으로 하여 그 이전 제도보다 수를 늘렸다.070)朝鮮總督府,≪朝鮮統治秘話≫, 256쪽.

 1920년 7월 29일 지방제도의 대폭적인 개정이 이루어졌으며, 道·府·面에 자문기관이 설치되었다.071)≪朝鮮總督府官報≫, 1920년 7월 29일, 號外.
糟谷憲一, 앞의 글, 133쪽.
府制는 1914년 4월 설치되었는데, 府尹의 자문기관으로서 도지사가072)1920년 7월 29일 총독부관제 개정 때 기존 道長官을 ‘知事’로 개칭하였다(≪朝鮮總督府官報≫, 1920년 7월 29일, 號外). 임명하는 府協議會가 설치되었다. 지방제도의 개정에 따라 부협의회는 임명제에서 선거제로 바뀌었으며, 협의회원의 임기도 2년에서 3년으로 연장하였다. 정원은 부의 인구규모에 따라 총독이 정하였으며 종래 6∼16명에서 12∼30명으로 증원되었다. 기능은 부 조례의 제정·개폐, 세출입 예산의 결정, 부의 부채에 관한 것 등이었지만 임명제와 큰 차이가 없었다.

 면에는 새롭게 面협의회가 설치되었다. 이 가운데 총독이 지정하는 면협의회는 선거제로 하고 나머지 면협의회는 군수·도사의 임명제로 정하였다. 면협의회원의 임기는 3년, 정원은 8∼14명의 범위 내에서 총독이 정하게 되었다.073)≪朝鮮總督府官報≫, 1920년 7월 29일, 號外. 자문사항은 세출입 예산의 결정, 사용료·수수료·부과금 등의 징수에 관한 것 등이었다. 보통면의 협의회원은 지방유지의 의견을 참작해서 군수·도사에게 임명시키는 것으로 친일적인 지주가 많이 임명되었다.074)姜東鎭, 앞의 책, 328∼329쪽.

 한편<學校費令>과<도지방비령>을 제정하여 교육과 재정을 강화시키는 자문기구를 설치하였다. 조선인 일반교육에 관한 사무는 이전에는 관청에서 직접 관장하였으나, 학교비의 부과, 사용료의 징수에 관한 사항은 학교평의회의 자문을 받도록 하였다.075)朝鮮總督府,≪朝鮮に於ける新施政≫, 52쪽. 학교평의회원은 府에서는 부 주민의 선거로, 군과 島에서는 면협의회원이 뽑은 후보자 가운데 군수·도사가 임명했다. 정원은 부에서는 6명 이상 20명 이하, 군과 도에서는 面數와 같게 하였다. 하지만 일본인 자제의 교육사무 처리를 위해서 학교조합은 그대로 존속되었다. 도에는<도지방비령>이 새롭게 제정되었다. 도지방비에 관한 자문기관으로서 도평의회가 설치되었다.

 도지방비는076)京畿道,≪京畿道事業ノ槪況≫(1934), 4∼11쪽. 경기도의 경우 지방비 재원의 팽창에 따라 조세제도 역시 개정할 수밖에 없었으며, 시장세와 같은 새로운 세수원을 확보해야만 하였다(朝鮮總督府,≪朝鮮に於ける新施政≫, 52∼53쪽). 재산수입 및 부과금을 재원으로 하여 권업·토목·구휼·위해·교육·소방 그 외 지방의 공공사업을 행하는 데 필요한 사업비로서 도의 독자적인 재정이었다. 도평의회원은 도지사가 임명하고 그 2/3는 부·군·島에서 부·면협의회원이 선거한 후보자 가운데 임명하였으며 나머지는 ‘학식이 유망한 자’ 가운데 임명하였다.077)糟谷憲一, 앞의 글, 134∼135쪽.
姜東鎭, 앞의 책, 329쪽.
도평의회의 자문사항은 세출예산의 결정, 지방세·사용료·수수료 부역 현품의 부과징수에 관한 것 등이었다. 또 도평의회는 ‘도의 공익에 관한 사건’에 대하여 의견서를 도지사에게 제출할 수 있는 권한을 가지고 있었다. 하지만 자문기관은 행정에 대한 규정력 및 강제력은 없었다. 그야말로 행정에 대한 보조적인 역할을 수행하였을 뿐 실질적인 권한은 없었다. 즉 자문기관의 의장은 부윤·면장·도지사이며 이들은 자문회의를 소집할 권한이 있고, 의장은 의원에 대하여 발언의 금지·취소, 회의장 밖으로의 퇴거를 명할 수 있는 권한이 있었다.078)≪朝鮮總督府官報≫, 1920년 7월 29일, 號外. 또 각 자문기관의 구성원이 직무를 태만이 하는 경우에는 부협의회원·도평의회원은 총독의 인가를 받은 도지사가, 면협의회원은 도지사의 허가를 받은 군사·도사가 해임시킬 수 있는 불안정한 자리였다.079)糟谷憲一, 앞의 글, 134쪽.

 자문기구의 설치에 대하여 조선총독부에서는 이른바 획일주의를 피하고 절충주의 제도를 시행하였다고 선전하였다.080)朝鮮總督府,≪朝鮮統治秘話≫, 260쪽. 하지만 자문기구는 설치자체가 갖는 의미는 있을지라도, 그것이 식민지 지방행정에 직접적인 영향을 미쳤는가에 대해서는 재고의 여지가 있다. 먼저 지정면으로 선택한 곳은 일본인들이 가장 많이 거주하는 곳이며, 총독부의 입장에서는 이곳에서 선거를 통해 자문기구의 구성원을 뽑는다는 것은 식민통치 근간에 별다른 영향을 끼치지 않을 것이라고 판단하였다.081)朝鮮總督府,≪朝鮮統治秘話≫, 258∼259쪽. 또한 지정면협의회원의 피선거권자와 선거권자의 자격에 관한 문제이다. 1920년 11월 20일 협의원과 평의원 선거가 실시되었다. 부협의회원의 선거권자는 25세 이상의 남자로서 부 주민으로 1년 이상 거주한 자에 한하며 府稅를 년 5엔 이상 납부한 자로 제한하였다. 피선거권자는 소속 도와 그 부의 관리, 유급관원·검사 및 경찰관리·종교인·소학교 및 보통학교의 교원을 제외한 자였다. 지정면협의회원의 선거권자의 자격요건은 부협의회원과 동일하며 피선거권자는 소속 道·郡·島의 관리 및 유급관원과 그 면의 면장과 유급관리는 제외되었다.082)糟谷憲一, 앞의 글, 135쪽.

 이와 같이 民意暢達과 지방민의 정치참여라는 거창한 슬로건 속에서 추진된 자문기구의 설치는 관치 중심의 큰 틀을 벗어나지 않았다. 그리고 선거라는 국민대의제의 형식을 가장하여 오히려 계층간의 분열을 더욱 조장하는 방향으로 흘러갔다. 예를 들면 면협의회원의 선거권자는 지정면마다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모든 구성원이 투표권을 행사하지는 못했다. 이러한 과정에서 발생하는 계층간의 알력과 분열은 민족적인 저항을 불러 일으키는데 상당한 제약으로 표출되었다.

 또한 자문기관의 설치·운용에도 민족차별주의로 일관하였다. 일본인이 많은 부협의회의 권능은 다른 여러 자문기관보다 컸다. 게다가 의장의 회원해임권이 없다는 것이나 한국인이 다수를 차지하였던 도평의회원을 민선으로 하지 않고 부·면협의회 회원이 뽑은 후보 중에서 도지사가 임명하고 나머지 1/3도 관선으로 하였다.083)姜東鎭, 앞의 책, 331쪽. 따라서 국가의 구성원이 모두 참여하는 보통선거의 형태를 띤 것이 아니라 권력기관의 체제유지를 위한 제한선거를 실시하였던 것이다.084)≪東亞日報≫, 1920년 7월 30일. 즉 선거가 실시된 부·면협의회원의 선거자격에도 총독부는 극도의 제한을 두었다. 이는 당시 조선총독부의 정책 시행의 핵심은 식민지 구성원 가운데 중산층(부유층) 이상을 중점으로 두어 이들을 매수·회유하는 방식을 취하였다는 데 있다. 이는 다음의 인용문을 통해서 보다 명확하게 알 볼 수 있다.

당시 조선인은 사상적으로 매우 흔들리고 있던 시절이라서 늙은이는 보수적인 반면, 청년은 공연히 급진적인 정세를 나타내고 있었다. 때문에 납세액에 제한을 두지 않으면 당장 조선인 협의회원은 소장층에서 많이 나와 부협의회는 공론도의의 자리가 되고 만다. 중정하고 온건한 인사가 뽑히도록 하기 위해서는 납세액 제한을 두어야 했다. 부협의회의 다수 의석을 조선인에게 주게 되면 민족적으로 편중되어 회의를 정쟁터로 만드는 것과 같은 폐단이 생기지 않을까. 그 영향을 끼치는 바가 있으므로 이 제도는 시행 초에는 협의회원의 반수 이상은 일본인을 뽑도록 해야 한다. 그래서 의사진행상 일본인에게 조선인을 지도시켜 협의회제도의 운용에 공정과 원만을 가한다(朝鮮總督府,≪齋藤實文書≫4 참조).

 이러한 가운데 1920년 11월 제1회 선거는 府에서는 투표자 수가 일본인 1,224명, 한국인 1,198명으로 당선자는 일본인 133명, 한국인 57명이었다. 지정면에서는 투표자 수 일본인 1,224명, 한국인 1,198명으로 당선자는 일본인 130명, 한국인 126명이었다. 이들 당선자의 민족별 대비는 일본인이 다수를 차지하였으며, 한국인 당선자 가운데 상당수는 사상이 온건한 친일적인 인물이었다.085)朝鮮總督府,≪朝鮮總攬≫(1933), 33∼34쪽.
朝鮮總督府,≪朝鮮に於ける新施政≫(1919), 53쪽.
姜東鎭, 앞의 책, 337∼338쪽.
糟谷憲一, 앞의 글, 137∼141쪽.

 이와 같이 일제는 관치중심의 지방제도를 식민지인이 일정부분 정치에 참여할 수 있는 권한을 부여하여 식민지의 불만요소를 제고하고자 하였다. 따라서 먼저 지방관제의 개정 때 협의기관으로서 자문기관을 설치함으로써 예산 및 과세 등에 관한 식민지인의 의견을 개진할 수 있는 길을 열어 주었다고 자평하였다.086)朝鮮總督府,≪朝鮮統治秘話≫, 260쪽. 하지만 이러한 표면적인 기구설치가 조선인의 정치참여에 직결되는 것은 아니었다. 그리고 지방의회에 참여한 자들의 성분을 분석해 보면 대다수가 일제에 협력할 수 있는 가능성이 있는 자들이었다. 즉 지방자문기구는 조선인 상층과 자산가 대부분을 식민지 권력에 끌어들이려는 역할을 수행하였던 것이다.087)驅込武,≪植民地帝國日本の文化統合≫(岩波書店, 1996), 196쪽.

 면협의회원이나 도평의회원도 명예직이었으며, 급여를 지급받지 않고 직무에 필요한 수당만을 받았다. 그리고 대다수는 자산가들이었으며 이들은 자문기구를 통해 자신들의 정치력을 발휘하고 사회적 지위를 공고히 하고자 하였다. 비록 한정된 발언권이었지만 이는 자산가들의 높은 정치력을 표출하는 데 매우 유용한 수단이었으며, 이들에게 자문기관은 필요조건이었다. 즉 지정면에서 투표율의 제고는 이를 반영한다.088)糟谷憲一, 앞의 글, 142쪽.

 요컨대 일제가 실시한 지방제도의 개정은 지방자치제를 실시한 것이 아니라 지금까지 총독부가 쥐고 있던 중앙집권적인 통치권력의 일부를 나누어 맡긴다는 分任主義 원칙에 따라 각급 지방관청에 분할한 것에 지나지 않았다.089)姜東鎭, 앞의 책, 313쪽. 그리고 중앙정부에서 지방민에 대한 직접적인 통제라는 인식을 심어 주기보다는 지방관의 권한을 확대하고 조선인의 정치참여에 대한 긴박성을 어느 정도 해소하여 지배력의 강화를 추진하였던 것이다.

개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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