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편 한국사
  • 근대
  • 48권 임시정부의 수립과 독립전쟁
  • Ⅰ. 문화정치와 수탈의 강화
  • 1. 문화정치의 실상
  • 2) 지방제도의 개편
  • (3) 면제의 운영과 촌락정책의 실상

(3) 면제의 운영과 촌락정책의 실상

 1917년 실시된 면제는 행정구획 통폐합에 이르는 과정에서 일제가 지향했던 방향성이 법제적으로 응축 표현된 것이다. 강점 직후 지방관제와 면에 관한 규정을 토대로 과도적인 면 운영에 임했던 일제가 통폐합조치를 거치면서 면 재정의 안정화 및 면장층의 질적 개선을 어느 정도 달성하였다. 또한 이러한 변화를 전제로 하면서 면 운영의 정책방향을 면제라는 법제적 형태로 공고히 하려는 움직임을 보이기 시작한 것이다.090)김익한, 앞의 글, 201쪽. 따라서 일제가 1917년 10월부터 시행하였던 制令 제1호<면제 및 면제시행규칙>은 면의 행정력을 강화해 이를 제도적으로 완비하려는 지방통치제도의 틀을 규정한 것이었다. 이러한 일제의 지방행정제도 개정은 한국 행정제도의 내재적 발전을 단절시켰다.

 면제는 면 가운데 일본인이 다수 거주하고 있던 곳을 총독이 지정하는 지정면으로 하고 그 외에는 보통면으로 나누는 것이다. 또 지정면에는 도장관이 임명하는 상담역을 두고 洞里長을 폐하고 區長을 두며, 면 조합을 설치할 수 있도록 하였다.091)일제는 면제의 시행을 자치제를 실시하는 것처럼 선전하였으나 결국 자치제도는 도입하지 않고 면을 잘 정비된 말단 행정단위로 편제하는 선에서 정책방향이 결정되었다(김익한, 위의 글, 207쪽). 따라서 1910년대 면제의 특징은 총독부 권력이 면장·구장을 통해 식민지 사회전반을 장악할 수 있는 구조로 정착해 가는 중요한 제도적 장치였다는 데 있다.092)姜東鎭, 앞의 책, 327쪽.

 1919년 3·1운동 이후 일제가 제도개정을 하면서 면제에도 일정부분 수정이 가해졌고 앞서 언급하였던 면협의회가 설치되었다. 일제는 면협의회를 지방자치제의 실시와 민의창달이란 측면에서 매우 중요시 여겨 이를 적극 홍보하였다.093)任洪淳,≪朝鮮行政要覽≫(朝陽出版社, 1929), 102쪽. 하지만 실질적으로 면협의회는 의결기관이 아닌 자문기관으로서 면장의 권한 안에서 활동하였던 수족과 같은 존재였다. 또한 지정면에서 실시한 선거도 매우 불평등한 것이었으며, 면협의회의 선거권과 피선거권을 제한적으로 규정하는 등 총독정치의 근간은 흔들리지 않았다.

 한편 일제는 면협의회를 설치하여 지역 유지에 대한 분열책을 시행하면서 보다 강력하게 지방민에 대한 통제를 가하고자 하였다. 이러한 일제의 지방통제책의 중심에 있었던 자들이 유지집단이었다.094)지수걸,<일제하 충남서산군의 관료-유지체제>(≪역사문제연구≫3, 1999) 참조. 이 유지집단의 정치적·경제적 성향과 활동은 총독부의 정책적 의도와 합치하는 경향이 강하게 나타났다.095)松本武祝,≪植民地朝鮮と朝鮮農民≫(社會評論社, 1998), 70쪽. 면제는 특히 농촌조직화 정책에서 지방민을 통제하는 데 있어서 전통 행정조직의 단절을 꾀하여 총독부의 지방침투를 원활하게 하였던 제도였다. 이러한 면 행정의 강화 과정에서 중요한 것이 면리원의 증원에 관한 문제였다. 그런데 면리원의 증원에는 몇 가지 선행조건이 있으며 이는 지방통치의 필요충분조건을 완비하는 것이었다. 즉 면서기로 대표되는 행정실무자들의 인력충원은 안정적인 면 행정을 실행하는 데 중요하였기 때문에 일제로서는 이러한 외양적 요소를 갖추어야만 하였다.096)김익한,<1920년대 일제의 지방지배정책과 그 성격>(≪韓國史硏究≫93, 1996), 159쪽.

 한편 모범부락을 통한 농촌통제정책을 시행한 일제는 산미증산계획하에서 농업생산력 증진에 초점을 두었다. 1920년대 초부터 시행된 모범부락정책은 20년대 중후반에 이르러 본격적으로 전개되었다. 1927년부터 성적이 양호한 모범부락을 선정하여 200∼400원씩 보조금을 지급하는 방식으로 동리에 이르는 전 지역을 통제하게 되었다. 즉 모범부락정책의 본격적 수행은 1910년대 동리의 자치적 운영이 제도적으로 부정되고 1920년대에 들어와 기존의 동리운영의 주역이었던 지역 명망가층에 대한 분열정책이 실시됨으로써 그들의 지역 내부에서의 사회적 위상에 일정한 변동이 야기되었고, 이에 따라 동리운영의 관행이 약화되는 지역이 발생하기 시작하였다는 지역사회의 변동을 배경으로 할 때 성립 가능한 것이었다.097)김익한, 위의 글, 164∼165쪽.

 일제는 모범부락을 선정하면서 이를 적극 정책에 이용하고 나아가 전국적인 선전활동도 병행하였다. 1930년대 농촌진흥정책에서 보이는 외형적이며 가시적인 측면을 부각하여 식민지정책의 정당성을 확보하려 했던 모습이 이미 1920년대에도 나타나고 있었던 것이다. 모범부락의 지정 수는 전체 동리에 비하여 매우 적은 수였지만 모범부락의 선정과 이에 대한 경제적 지원을 제도화시킴으로써 모범부락정책이 다른 동리를 체제 순응적으로 재편한다는 점에서 매우 자극적인 요소로 작용하였다. 이러한 ‘모범’이라는 용어의 강제성은 다른 동리에서도 일제의 정책에 대하여 적극적인 호응을 끌어낼 수 있는 것이었다. 하지만 일제가 시행하였던 모범부락정책은 광범위한 지역을 모범부락으로 선정하기 보다는 선정된 곳에 행정력을 집중적으로 지원하여 이를 더욱 발전시키는 형태를 보이면서 진행되었다. 이는 지역마다 특수성에 기인하기도 하였지만 일제의 행정력이 강하게 뿌리내릴 수 있는 내적기반을 확보하지 못한 데서 발생하는 한계였다.

 이를 위해서 일제는 재지세력의 포섭을 진행하였다. 그 가운데 이른바 지역유지 내지 지역 명망가로 대표되는 자들이 일제의 면 행정정책에 부합되는 인물이었다. 이들은 자신들의 사회적 지위를 공고히 하고 식민지 권력과 결탁하여 먼저 면협의회 등을 통하여 정치적 진출을 시도하였다. 1920년대 식민지 수탈이 가속화되면서 농촌의 궁핍화현상이 심해졌으며, 소작쟁의가 광범위하게 발생하였다. 따라서 식민지 권력은 지방행정과 농민간의 갈등을 해소하기 위한 매개체로서 지방유지를 활용하였다.098)松本武祝, 앞의 책, 80∼81쪽. 특히 1921년 8월 지방관제의 개정에 즈음하여 면장 50명에 한하여 주임의 대우를 해주었다. 면제 실시 이후 면장에 대한 처우개선에 대하여 조선총독부에서는 이를 대민업무 및 지방정책의 원활성 확보라는 차원에서 이해하였다.099)朝鮮總督府,≪朝鮮に於ける新施政≫, 59∼60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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