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편 한국사
  • 근대
  • 48권 임시정부의 수립과 독립전쟁
  • Ⅰ. 문화정치와 수탈의 강화
  • 2. 수탈체제의 강화
  • 1) 총독부 산업정책의 전환

1) 총독부 산업정책의 전환

 1910년대 말에서 1920년대 초반에 걸쳐 조선 경제는 전환기를 맞이하였으며, 총독부는 이에 걸맞는 산업정책의 수립을 요청받았다. 조선 경제의 전환을 가져온 계기는 식민지 기반구축사업의 일단락 및 일본 자본의 조선 진출이었다.

 러일전쟁 직후의 화폐정리사업에서 시작된 식민지 기반구축사업은 토지조사사업이 완료됨에 따라 대체적인 윤곽이 드러났다. 일제는 화폐정리사업과 재정정리사업을 통하여 식민지 재정·금융·화폐제도를 정비하고, 관세 및<회사령>을 통하여 자유로운 상품유통 및 자본유통을 제한한 위에서, 토지조사사업을 실시하여 근대적인 등기제도와 지세제도를 도입하였다. 이러한 식민지 기반구축사업을 통하여 조선 경제를 일본 경제에 결합시킴으로써 식민지 조선이 일본 자본주의의 상품시장이자 자본시장으로 기능할 수 있게 만들었다.

 일본 자본의 조선 진출이 본격화된 것은 1910년대 후반이었다. 일본자본주의는 1910년대 후반 제1차 세계대전의 호경기를 이용하여 수입국에서 수출국으로, 채무국에서 채권국으로 전환하는 등 비약적인 발전을 이룩하였다. 그러나 제1차 세계대전 중의 호황은 교전국으로부터 넘어온 군수와 미국의 호황에 힘입은 것이었다. 따라서 1918년 11월 휴전조약이 성립하자 곧 주식시장을 비롯한 산업 전반의 동요가 일어났고, 전쟁종결에 따른 급속한 시장 축소로 인하여 1920년 ‘전후공황’에 돌입하였다. 일제는 공황기에 접어들면서 식량과 원료의 공급기지로 활용해 오던 식민지 조선을 한편으로는 과잉생산된 상품의 수출시장으로, 다른 한편으로는 과잉축적된 자본의 수출시장으로 활용함으로써 공황의 돌파구를 마련하였다. 1916년에 147개이던 일본인 회사는 1920년에 414개로 늘어났으며, 불입자본금도 2천 3백여 만원에서 1억 5천여 만원으로 크게 증가하였다.137)≪朝鮮總督府統計年報≫, 각년판.

 이렇게 일본 자본의 진출이 급증하자 자본의 자유로운 출입을 제한하는 <회사령>과 關稅가 대두되었고, 결국 1920년 4월의<회사령>폐지와 1923년의 관세폐지로 이어졌다. 1910년 12월에 발포된<회사령>은 두 가지 목적을 가지고 있었다. 하나는 조선인 자본, 조선 내 일본인 자본, 조선에 진출하고자 하는 일본 내 자본을 막론하고, 모든 민간자본의 투자방향을 총독부가 장악하는 것이며, 다른 하나는 조선인의 전통적인 상업관행을 말살하고 일본 자본의 자유로운 활동공간을 보장하기 위하여 자유경쟁체제를 구축하려는 것이었다.138)전우용,≪19세기 말∼20세기 초 한인 회사 연구≫(서울대 박사학위논문, 1997). 그러나 1914년 제1차 세계대전의 발발과 함께 일본의 호황이 시작되자 총독부는<회사령>의 시행규칙을 완화하여 조선에서 사업을 경영하려는 일본 내 자본가들의 진출을 원활하게 하였으며, 전쟁경기에 편승하여 조선에 대한 투자가 급증하고 조선 내 회사 설립이 급속하게 늘어남에 따라 1918년 6월<회사령>을 개정하여 자본 진출의 모든 장애물을 제거함으로써 회사령은 사문화되었다. 1920년 4월의<회사령>폐지는 이미 사문화된 채 법령으로만 남아 있는<회사령>을 최종적으로 없앤 것에 불과하였다.

 <회사령>폐지와 더불어 상공업계 초미의 관심사로 떠오른 것은 관세문제였다. 관세제도는 강제병합 당시 국제통상의 마찰을 우려하여 10년간 유지하기로 한 관세율이 1920년 8월로 만료되기 때문에 관세의 개정문제가 대두하였다. 일본은 관세제도 유보기간이 만료됨에 따라 일본과 조선간의 관세를 완전히 철폐하는 방안을 검토하였다. 그러나 당시 관세가 총독부 재정수입에서 地稅 다음으로 큰 비중을 차지하고 있었고, ‘문화정치’가 실시됨에 따라 재정수요가 확대되고 있던 상황에서 관세의 완전한 철폐는 유보되지 않을 수 없었다. 이 때문에 1920년 8월 일본측 이입세만 폐지되고 한국측 이입세 폐지는 유보되었으며, 1923년에 가서야 酒類와 織物類를 제외한 모든 물품의 이입세가 폐지되었다.

 식민지 기반구축사업이 일단락된 뒤에서 일본 자본이 대대적으로 진출함에 따라 종합적인 산업정책의 수립이 요구되는 상황에서 총독부는 1921년 9월 “조선총독의 자문에 응하여 조선산업에 관한 중요사항을 조사, 심의하기”(<조선산업조사위원회규정>제1조) 위하여 ‘朝鮮産業調査委員會’를 개최하였다.139)조선산업조사위원회 개최는 ① ‘문화통치’로의 전환에 따라 조선인을 참가시킨 각종 조사심의기관의 설립, ② 경성상업회의소 등 재조선 일본인 실업가의 건의 등이 직접적인 계기로 작용하였다(金子文夫,<1920年代における朝鮮産業政策の形成-産業調査委員會を中心に->,≪近代日本の經濟と政治≫, 山川出版社, 1986). 조선산업조사위원회는 정무총감을 위원장으로 하여 일본측 20명(관료 4, 학자·전문가 5, 실업가 11), 조선측 27명(관료 8, 일본인 실업가 10, 조선인 실업가 9) 등 47명의 위원으로 구성되었다.

 한편 조선산업조사위원회의 개최를 앞두고 조선인 자본가들은 ‘조선인 본위의 산업정책’을 총독부에 건의하였다.140)조선산업조사위원회를 전후한 조선인 자본가측의 동향에 대해서는 박찬승,≪한국근대 정치사상사연구-민족주의 우파의 실력양성론-≫(역사비평사, 1992), 191∼196쪽. 조선인 자본가들이 자신들의 입장을 표명하게 된 것은 일제의 강점으로 위축되었던 조선인 자본이 1910년대 말의 호황과 일본 자본의 투자를 타고 일어난 회사 설립 붐(‘會社熱’) 속에서 크게 증대하였기 때문이었다. 1916년에 36개이던 조선인 회사가 1920년에는 99개로 늘어났고 불입자본금도 478만원에서 1,920만원으로 크게 늘어났다.141)≪朝鮮總督府統計年報≫, 각년판. 이렇게 회사 설립 붐을 타고 크게 증가한 조선인 자본은 1920년 일본 자본의 홍수와 일본으로부터 불어닥친 불황 앞에서 존립 자체가 위협받기에 이르렀다. 이러한 상황에서 산업조사위원회가 구성된다는 발표가 있자 조선산업조사위원회에 조선인들의 요구를 반영시키기 위하여 저명인사와 조선인 자본가들을 중심으로 1920년 7월에 ‘조선인산업대회’가 창립되었다.

 조선인산업대회에서는 조선산업조사위원회가 열리기 직전인 9월 12일 총회를 열고, 조선인 본위의 산업정책과 조선인 산업의 보호정책을 건의하는 결의문과 강령을 채택하였다.

<결의문>

 산업의 발달 여부는 사회의 흥망성쇠를 결정하는 기초문제라. 이제 우리는 조선인의 생존권을 확충하여 그 발달을 확보하기 위하여 아래의 강령을 결의하는 동시에 집행위원으로 하여금 이 강령을 일반 사회에 선포케하여 조선총독부에 건의케 함.

  

<강 령>

 1. 조선인 본위의 산업정책을 확립하되 소수 유산계급의 이익을 목적하지 말고 일반 다수 민중의 행복을 목표로 할 것.

 1. 농업을 토대로 하여 상공업의 발달을 기하되 보호정책을 채용하여 경쟁의 참화를 제거할 것(≪東亞日報≫, 1921년 9월 14일,<産業大會決議案>).

 친일단체인 維民會에서도 9월 초 임시총회를 열어 ‘조선인 본위의 산업정책’과 조선인 중심의 농업회사와 금융기관의 설립을 건의하는 건의안을 채택하였다.≪동아일보≫도 산업조사위원회의 개막에 즈음하여 수차에 걸친 사설을 통해 ‘조선인 본위의 산업정책’을 세울 것을 촉구하였다.≪동아일보≫는 조선인산업대회와 유민회의 입장을 전폭적으로 지지하면서, 조선인의 경제적 발달을 위해서는 조선인을 일본인과의 자유경쟁 상태에 방임하는 것은 곤란하므로 조선인을 위한 특별한 보호가 필요하다고 주장하였다. 일본인 자본가와 조선인 자본가의 이해관계 차이는 이미 관세폐지 문제에서도 보였지만142)일본에서 관세를 폐지하는 방안을 검토하고 총독부에서도 관세철폐를 표방하자 조선인 상공업자들은 강력하게 항의하였다.≪동아일보≫에서는 관세의 철폐가 ① 조선에서 생산되는 값싼 원료를 보다 생산시설이 잘 갖추어진 일본으로 무제한 방출되게 할 것이며, ② 일본산 상품이 조선에 물밀듯 밀려와 국내시장을 독점하여 자본과 기술면에서 열세에 있는 조선의 공업을 形迹도 없게 할 것이며, ③ 총독부의 수입원이 감축되어 조선인들의 조세부담이 증가하게 될 것이라면서 이를 반대하였다. 반면 일본인 상공업자를 대변하는 경성상업회의소에서는 관세철폐를 적극적으로 지지하였다. 경성상업회의소에서는 1919년 7월 탁지부장관의 자문에 대한 답신에서 한국의 대외관세는 일본 현행<관세법>및<관세정율법>을 시행하고 이입 관세는 철폐를 원칙으로 하되 일정한 산업보호관세 및 재정수입상의 관세를 존치하도록 하였다. 1920년 들어 재정상의 이유로 관세철폐를 연기한다는 소문이 돌자 경성상업회의소는 “조선에서 들어오는 이입품에 대하여 일본 이입관세를 철폐하고, 아울러 일본에서 조선으로 이입하는 공업원료의 조선 이입관세를 면제할 것을 요망”하는 건의서를 내각 및 총독 등에게 제출하였다. 산업정책의 측면에서도 현저한 것이었다.

 9월 15일부터 20일까지 조선산업조사위원회에서는 3개 특별위원회의 항목별 심의를 거쳐<조선산업에 관한 일반 방침>과 10개 항목의<조선산업에 관한 계획요항>을 결의하였다.

<조선산업에 관한 일반 방침>

조선의 산업상 계획은 제국산업정책의 방침에 순응할 것이며 내외의 정세 특히 일본 內地, 중국, 노령아세아 등 인접지방의 경제적 사정을 고찰하여 이 대책을 강구할 필요가 있도다. 조선의 산업은 시정 이래로 진보의 자취가 현저하나 그 진보는 필경 草創의 초기에 속하므로 그 기초가 오히려 박약하여 전도 발전의 요건에 결여한 바가 적지 않다 하노라. 따라서 장래 더욱 더 지식 기능의 향상 발달을 촉진하고 근면·협동의 관습을 조장하여 산업 제반의 조직 및 교통·통신의 기관을 정비하여 資力의 충실 및 금융의 소통을 도모하여 日鮮人 및 日鮮의 관계 연락을 일층 밀접하게 하는 방법을 강구하여 조선 경제력의 진보와 일선 공동의 복리증진을 기하지 아니하지 못할지라. 조선 산업에 관한 제반정책의 실행에 대하여는 미리 일본 內地 및 인접지와의 관계, 조선 내부의 사정 및 재정상의 관계 등을 고려하여 그 규모를 정하고 경중을 較量하고 완급을 안배하기를 요하노라(≪産業調査委員會會議錄≫, 29∼30쪽).

 조선산업조사위원회에서는 조선의 산업정책이 일본제국의 산업방침에 순응해야 하는 것임을 분명히 하였으며, 산미증식과 철도 건설을 중점사업으로 제기한 총독부의 산업정책을 추인하였다.

 조선산업조사위원회에서 산업정책의 대강이 확정되자 일본인이 중심이 된 각지의 상업회의소는 1922년 2월 임시조선상업회의소연합회를 개최하여 철도 건설, 이입세 철폐, 산미증식, 수산 개발 등 ‘産業開發四大要項’을 요구하는 등 일본 정부와 의회에 조선 산업개발을 촉구하는 운동을 전개하였다. 산미증식계획이 총독부의 최우선 시책으로 시행되고, 1923년 4월 대부분의 이입세가 폐지됨에 따라 상업회의소의 활동은 철도 건설로 옮겨졌으며, 상업회의소는 제국철도협회·조선철도협회와 더불어 총독부의<조선철도12년계획>의 입안·실행에 커다란 역할을 하였다.

 반면 조선인 자본가들이 제기한 ‘조선인 본위의 산업정책’이 일본인 위원의 반대에 부딪쳐 무산되고 ‘일본인 본위의 산업정책’으로 귀결되자 조선인 자본가들은 자구책을 마련하지 않을 수 없었다.≪동아일보≫는 조선산업조사위원회에서 채택한 산업정책은 결국 조선의 경제를 일본에 완전히 예속시키려는 것이므로 이제 일본인과 조선인 사이에 ‘경제전쟁’이 시작되었다고 선언하면서 조선인 자본가들의 분발을 촉구하였다. 이러한 ‘조선인 본위의 산업정책’의 좌절은 이후 경제적 실력양성론이 대두되고 물산장려운동이 시작되는 계기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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