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편 한국사
  • 근대
  • 48권 임시정부의 수립과 독립전쟁
  • Ⅰ. 문화정치와 수탈의 강화
  • 2. 수탈체제의 강화
  • 3) 공업
  • (1) 식민지 공업구조의 형성

(1) 식민지 공업구조의 형성

 1920년대 들어<회사령>폐지 및 관세폐지에 따라 일본 자본의 투자가 증대하였으며, 이에 따라 공업의 규모도 확대되었다. 먼저 공업의 확대를 통계수치를 통하여 확인해 보기로 하자. 조선 전체의 물자생산액 가운데 농산액과 공산액의 비중을 보면 1918년에 80%라는 높은 비중을 차지하던 농산액이 1930년에는 60%로 하락하였으며, 15%에 불과하던 공산액의 비중은 26%로 높아졌다. 공장 수도 1918년에 1,800여 개이던 것이 1930년의 4,400여 개로 증가하였으며, 회사(조선에 본점을 둔 회사)의 자본금도 1918년에 7,000여 만원에 불과하던 것이 1929년에는 3억 1천여 만원으로 크게 증가하였다. 공산품시장도 확대되었다. 조선 내 공산품 생산의 확대 및 일본에서 공산품의 이입에 힘입어 전체 소비 중에서 공산품의 소비는 1918년의 21%에서 1930년에는 41%로 확대되었다.

 이러한 공업의 양적인 확대는 조선 산업에 대한 일본 자본의 지배가 확립되었고, 식민지 본국과 식민지를 연결하는 식민지적 공업구조가 형성되었음을 의미하는 것이었다. 1910년대 후반부터 일본 자본의 진출이 본격화되면서 조선 산업에서 차지하는 일본 자본의 비중이 크게 증대되었다.

    구분
연도
공업회사 회사 전체
불입자본금 불입자본금
1918 소 계 82 10,501(100) 266 69,870(100)
조선인 8 379( 3.6) 18 7,316(10.5)
일본인 70 9,974(95.0) 208 54,662(78.2)
합 자 4 139( 1.3) 39 5,891( 8.4)
기 타 - - 1 2,000( 2.9)
1925 소 계 322 54,637(100) 1,189 221,478(100)
조선인 42 3,523( 6.4) 163 22,584(10.2)
일본인 250 42,967(78.6) 938 156,652(70.7)
합 자 30 8,147(14.9) 86 40,232(18.2)
기 타 - - 2 2,010( 0.9)
1929 소 계 520 107,740(100) 1,768 310,621(100)
조선인 148 5,204( 4.8) 362 19,878( 6.4)
일본인 333 98,587(91.5) 1,237 193,737(62.4)
합 자 38 3,838( 3.6) 165 95,785(30.8)
기 타 1 112( 1.0) 4 1,222( 0.4)

<표 2>조선에 본점을 둔 회사 (단위:천원)

≪朝鮮總督府統計年報≫, 각년판.

 조선에 본점을 둔 회사의 경우 일본인 자본의 비중은 1918년에 87%에서 1925년에 89%, 1929년에 93%로 증가한 반면 조선인 자본의 비중은 1918년의 11%에서 1925년에 10%, 1929년에 6%로 감소되었다.151)합자자본은 일본인 자본에 포함시켰다. 합자자본이 형식적으로 조선인을 참가시켰다는 점에서, 식산은행·동양척식·경성전기 등 특수회사가 포함되어 있다는 점에서 일본인 자본으로 보아도 무리는 없을 것이다. 공업회사의 경우 일본인 자본의 비중은 더욱 압도적이었다. 1919년에 96%를 차지하던 일본인 자본은 1925년에 94%, 1929년에 95%로 여전히 절대적인 비중을 유지하였으며, 조선인 자본은 1919년의 4%에서 1925년에 6%, 1929년에 5%로 미미한 비중에는 별다른 변화가 없었다. 이렇게 압도적인 비중을 점하고 있는 일본인 공업자본도 규모면에서는 중소 규모에 불과하였다. 즉 1회사당 자본금 규모를 볼 때 1925년에 17만원, 1929년에 30만원 정도였다. 물론 조선인 공업회사의 1회사당 자본금이 1929년에 3만 5천원 정도인 것에 비하면 상당한 규모라고 할 수 있지만 일본에서 들어오는 독점자본 계통의 대규모 회사와는 질적인 차이가 있었다.

 조선에 본점을 둔 공업회사뿐만 아니라 일본에 본점을 두고 조선에 지점을 둔 공업회사까지 포괄해서 볼 때 20년대 중반까지 일본 중소자본에 의한 투자가 주류였다면, 20년대 후반 이후 일본 독점자본의 투자가 본격화되었다. 1920년대 후반 일본 독점자본의 진출은 미쓰이(三井)와 노구치(野口)를 중심으로 방직공업과 화학공업에 집중되었으며, 중소자본과는 비교할 수 없는 대규모 독점자본이 들어옴으로써 조선 산업에 대한 일본 자본의 지배는 더욱 확고하게 되었다.152)1929년의 경우 일본에 본점을 두고 조선에 지점을 둔 공업회사는 16개, 불입자본금은 1억 6천여 만원으로, 1회사당 자본금은 1천만원에 달하였다(≪朝鮮總督府統計年報≫, 1929년판).

  연도
계통
1917∼1920 1921∼1925 1926∼1930
三井 朝鮮紡織, 南北綿業
朝鮮生絲, 王子製紙

 
  義州鑛山, 三成鑛業
郡是製絲, 東洋製絲
鐘淵紡織
小野田시멘트
日産 朝鮮燐寸    
日窒   雄基電氣

 
朝鮮鑛業開發
赴戰江發電所
朝鮮窒素, 新興鐵道
片倉   片倉製絲  
日綿   朝鮮棉花, 全南道是  

<표 3>1920년대 조선에 들어온 일본독점자본

 공업구조에서는 식민지 본국에의 예속이 강화되었다. 공업의 대부분이 경공업이었으며 그 중에서도 정미업이 가장 큰 비중을 차지하고 있었다. 강점 이전부터 일본인에게 쌀을 공급하고 일본으로 쌀을 반출하기 위하여 성장한 정미업은 1920년대에 들어서도 전체 공업 생산액의 2/3 가량을 차지하는 유력한 업종으로 자리잡고 있었다. 정미업 다음으로 큰 비중을 차지하고 있는 것은 방직공업이다. 방직공업은 조면업·방적업·직물업·제사업으로 구성되는데, 특히 방직원료 생산부문인 조면업과 제사업에 일본 독점자본의 진출이 집중되었다. 조선방직주식회사·남북면업주식회사·조선면화주식회사 등의 대규모 공장에서는 목화를 반제품인 繰綿으로 가공하여 일본으로 반출하였으며, 조선생사주식회사·동양제사주식회사·편창제사주식회사·군시제사주식회사 등의 대규모 공장에서는 누에고치를 생사로 가공하여 일본으로 반출하였다. 이처럼 조면업과 생사업은 국내의 직물 생산과 연결되지 않고 일본의 방직공업과 바로 연결되었다.

 특히 면방직 부문은 식민지 본국에 예속된 식민지 공업구조를 가장 잘 보여준다. 면방직 부문은 수확한 목화를 조면으로 가공하는 조면업, 조면을 가공하여 綿絲를 생산하는 면방적업, 면사를 짜서 면직물을 생산하는 면직물업으로 나누어지는데, 조선에서는 조면업만 발달하였을 뿐 면방적업은 거의 없었고 면직물업도 일본 면제품이 지배하는 영역 바깥에서 겨우 명맥을 유지하는 정도였다. 이러한 상황에서 조선에서 생산된 목화는 조면공장에서 조면으로 가공되어 일본으로 반출되며, 이렇게 반출된 조면이 일본의 면방적공장과 면방직공장을 거치면서 면사로 가공된 후 면제품으로 만들어졌다. 이렇게 생산된 면제품이 다시 조선에 이입되어 조선의 면제품시장을 지배하였다. 시장에서는 일본에서 들여온 광목·옥양목이 면제품시장을 독점하였다.

 京城지역에서 식민지 공업이 형성되는 과정은 조선의 공업이 어떠한 방식으로 일본의 영향 아래 일본에 예속되면서 그 틀이 만들어지는가를 잘 보여준다.153)이하 경성지역 공업구조에 대해서는 배성준,≪일제하 경성지역 공업 연구≫(서울대 박사학위논문, 1998), 제2장 참조. 경성지역의 공업이 한말과는 다른 식민지적 모습을 띠게 된 것은 1920년대 초반이었다. 러일전쟁 이후 일본인의 이주 및 일본인 공장의 설립, 1910년대 식민지 도시화 및 1910년대 말에서 1920년대 초반에 이르는 조선인 공장과 일본인 공장의 설립 붐을 거치면서 경성지역의 소비인구와 시장을 대상으로 하는 경성 공업이 형성되었는데, 여기에 가장 커다란 영향을 미친 것은 일본에서 들어오는 일본 제품과 경성 및 인접지역에 거주하는 조선인과 일본인의 거주지 분포였다.

 대규모 소비인구를 가진 경성지역은 강점 이전부터 일본의 유력한 상품시장이었으며, 면직물·설탕·종이 같은 대중소비재는 대부분 일본 제품이 시장을 장악하고 있었다.

   연도
구분
1915년 1928년
이입(A) 생산(B) B/A 이입(A) 생산(B) B/A
소맥분 104 1 1.0 1,752 888 50.7
설탕 600 - - 716 - -
청주 357 53 14.8 557 396 71.1
일본 간장 60 54 90.0 213 819 384.5
비누 57 41 71.9 460 478 103.9
염료·도료 60 58 96.7 1,056 468 44.3
면직사 719 - - 2,047 - -
면직물 3,682 73 2.0 16,413 *1,399 8.5
견직물 96 - - 8,646 0.4 -
종이 870 - - 4,328 3 0.1
유리 88 17 19.3 596 59 9.9
금속제품 644 60 9.3 5,511 2,227 40.4
차량 196 33 16.8 3,518 53 1.5
기계류 280 68 24.3 2,958 223 7.5
기구류 255 - - 1,117 300 26.9
고무제품 3 - - 403 1,918 475.9

<표 4>이입 공산품의 품목별 생산·이입 현황 (단위:천원)

이입액은≪朝鮮貿易年表≫, 각년판;1915년 생산액은≪京畿道統計年報≫, 1915년판;1928년 생산액은 京城府,≪京城の工場と工産≫(1929).

 이입품의 시장장악 속에서 일정한 수요를 확보할 수 있고 기술 없이 소자본만으로도 경쟁이 가능한 일부 업종에서 이입대체가 진행되었다. 고무신·간장·비누·청주 등의 품목에서는 이입품을 구축하는 정도에 이르렀으며, 청주·밀가루 등의 업종에서도 이입대체가 이루어지고 있었다. 그렇지만 이러한 이입대체는 일부 업종에 불과할 뿐 대다수 업종은 일본 제품이 잠식하지 않은 공간에서 독자적인 수요를 창출해 나갔다. 대표적인 업종이 면직물인데, 대부분의 면직물공장이 이입면직물의 압박을 피하여 마포 대용품이나 허리띠·대님 같은 編造物을 생산하였다. 편조물업·금은세공업·유기제조업·기름제조업·고무제품제조업·전통가구제작업·조선주제조업·재봉업 등 조선인 수요를 겨냥한 업종도 이입품의 압박을 피하여 협소한 시장을 형성하였다.

 또한 전통적인 업종은 주로 조선인을 대상으로 제품을 생산하였고, 일본에서 들어온 업종은 주로 일본인을 대상으로 하였기 때문에 조선인과 일본인의 거주지 분포가 공장 분포에 직접적인 영향을 미쳤다. 경성의 일본인 인구는 강점 이후 크게 증가하여 1920년대에는 경성 인구의 약 1/4을 넘어서게 되는데, 일본인 거주지가 진고개·명동 일대에서 본정통과 용산으로 확대된 결과 1910년대 말에는 청계천을 경계로 일본인 거주구역인 ‘南村’과 조선인 거주구역인 ‘北村’이 분리되었다.154)손정목,≪일제강점기 도시화과정 연구≫(일지사, 1996), 360∼366쪽. 공장 설립도 민족별 거주지를 따라 이루어지면서 청계천을 경계로 남쪽에는 일본인 공장이, 북쪽에는 조선인 공장이 집중되었다. 일본인이 거주하는 용산지역에는 일본인 금속공장이, 조선인이 거주하는 마포지역에는 한국인 정미소가 몰려 있었다.

 또한 원료면에서도 방직공업·금속공업·기계기구공업·화학공업 및 기타공업의 일부는 일본을 통한 이입 혹은 수입에 원료 공급을 의존하였다. 방직공업의 경우 생사를 제외한 대부분의 原絲를 이입하였으며, 원면은 오사카의 무역상을 통하여 인도면을 수입하였다. 금속공업과 기계공업의 경우 강재·철재·각종 금속원료를 이입하였다. 화학공업의 경우 생고무는 미쓰이물산 등 일본의 무역상을 통하여 공급되었으며, 염료·약품·기름을 비롯한 각종 원료가 이입되었다. 기타공업의 경우에도 양복지·종이·밀짚 등이 이입되었으며, 그밖에도 고급 원료의 대부분은 이입에 의존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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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 1>경성지역 공장 분포도(1922년)
<그림 1>경성지역 공장 분포도(1922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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