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편 한국사
  • 근대
  • 48권 임시정부의 수립과 독립전쟁
  • Ⅰ. 문화정치와 수탈의 강화
  • 2. 수탈체제의 강화
  • 3) 공업
  • (2) ‘민족자본’과 조선인 자본

(2) ‘민족자본’과 조선인 자본

 1920년대 식민지적 공업구조의 형성과 더불어 조선인 자본의 동향이 주목의 대상이 되었다. 조선인 자본의 동향에 대해서는 두 개의 상이한 경향이 제시되었는데, 하나는 ‘민족자본’의 관점에서 조선인 자본의 동향을 추적하는 것이었으며, 다른 하나는 ‘민족자본’을 부정하고 조선인 자본 자체의 동향을 추적하는 것이었다.

 ‘민족자본’의 관점에서 조선인 자본에 대한 연구는 일본 자본과 총독부 권력에 의하여 조선인 자본의 성장이 저지당하고 몰락하는 측면에 집중되었는데, 이러한 측면은 朴玄埰155)박현채,≪민족경제론의 기초이론≫(돌베개, 1989), 28∼33·62∼65쪽.와 가지무라 히데키(梶村秀樹)156)梶村秀樹,<民族資本と隷屬資本>(≪朝鮮における資本主義の形成と展開≫, 龍溪書舍, 1977).에 의하여 ‘민족경제’, ‘민족자본’이라는 이론적 틀로 제시되었다. 박현채에 따르면 ‘민족경제’란 민족주의의 기초이자 민족적 생활을 위한 경제적 기초라고 할 수 있다. 그리고 ‘민족자본’은 민족경제에 자신의 기반을 갖는 자본으로서, 민족경제를 파괴하려는 제국주의 자본이나 그 대행자인 매판자본과 이해가 대립되는 자본으로 규정된다. 가지무라도 조선인 자본의 정치적 자세, 즉 항일운동에 협동적인가 적대적인가에 따라 조선인 자본을 ‘민족자본’과 ‘예속자본’으로 구분하고 식민지에 민족자본이 진보성과 독립성을 유지하려면 독자적인 경제영역(원료 조달, 제품 판매, 금융)을 확보하고 경제적 자유를 지향하는 경쟁적 산업자본이어야 하며, 중간 규모 이하의 자본이어야 한다고 규정하였다.

 이러한 민족자본의 관점에 기반하여 조선인이 운영하는 개별 업종의 동향이 구체적으로 추적되었다. 메리야스업157)梶村秀樹,<日本帝國主義下朝鮮人資本家層の對應>(≪朝鮮史硏究會論文集≫3, 1967
·≪朝鮮史硏究會論文集≫5, 1969). 가지무라는 평양 메리야스공업의 변천사를 초창기(1906∼10), 소경영기(1910∼19), 기업의 증가(1919∼27년), 자동화와 공황(1927∼33), 만주진출 문제와 종합메리야스공업화로의 전개(1933∼38), 전시경제와 자본의 동화(1938∼45)의 6시기로 구분하였다.
은 고무신제조업과 더불어 조선인 자본가층에 의하여 발전된 대표적인 근대적 업종이었다. 1906년 경에 창업된 평양의 메리야스업은 1910년대에 수직기를 몇 대 갖춘 소규모였지만 1920년대에는 상인들이 참여하면서 공장이 속출하고 경영도 대규모화되었다. 잇따른 공황과 업자들 사이의 경쟁 및 노동운동의 고양으로 경영이 위기에 부딪쳤으나 공장주들은 양말생산조합의 조직, 양말外職을 통한 하청화, 제품의 다양화 등의 방법으로 타개해 나가는 한편 권력에의 접근을 통하여 노동운동을 무마하였다. 1926∼1927년 경 저렴한 전력 공급을 계기로 공장주들 사이에 ‘자동화 붐’이 일어났으며, 1920년대 말까지 자동직기의 도입이 진행되었다. 이처럼 평양 메리야스업의 경우 일본인 자본가와 구별되고 조선의 노동자·농민과도 이해를 달리하는 조선 자본가층이 독자적인 논리를 가지고 존재하였다.

 연초업의 경우158)이영학,≪한국 근대 연초업에 대한 연구≫(서울대 박사학위논문, 1990). 일제는<회사령>과<煙草稅令>을 통하여 소자본의 조선인 자본가들을 몰락하게 하고 일본인 자본가들이 제조업을 장악하게 만들었으며, 연초전매제의 기반을 갖추기 위해 연초의 재배·제조·판매업을 통제하였다. 총독부가 1921년 연초전매제를 실시하여 연초업의 모든 부분을 통제함으로써 조선인 연초재배업과 판매업은 몰락하였으며, 조선인들은 비싼 전매연초의 소비로 무거운 경제적 부담을 질 수밖에 없었다. 이에 조선인들은 연초경작 기피, 수납소 습격,<전매령>위반 등 다양한 방법으로 총독부의 전매정책에 저항하였다. 주조업의 경우159)정태헌,<일제하 주세제도의 시행과 주조업의 집적 집중과정에 대한 연구>(≪國史館論叢≫40, 1992). 1916년<주세령>의 시행으로 영세한 조선주 제조장(탁주·소주)의 84∼96%가 정리대상이 되었으며, 이후 制限石數의 대폭 인상과 제조장 집중화정책을 계기로 영세한 조선주 제조장이 급감하여 1915년에 39만여 개이던 제조장이 30년대 초에는 4천여 개로 축소, 정리되었다. 이렇게 영세한 제조장의 정리를 통하여 형성된 주류시장에 20년대 들어 상당수의 조선인 신규 자본가가 새로 주조업에 진출하였으며 주조업은 이들을 중심으로 전개되었다. 식민지 이전부터 주조업에 종사하던 기존의 주조업자들은 대부분 소멸의 길을 걸을 수밖에 없었고, 20년대 주조업의 담당자는 대체로 1920년 이후 주조업에 새로 진출한 자들이었다.

 직물업의 경우160)權泰檍,≪韓國近代綿業史硏究≫(一潮閣, 1989), 제4장. 일본제 면직물의 끊임없는 유입과 시장지배 속에서도 농촌 및 도시의 직물업은 강하게 잔존하였다. 농촌에서는 일제에 의해 강제로 증산된 육지면이나 재래면을 원료로 하여 전통적인 ‘무명’을 생산하였는데, 농가에서는 자신이 생산한 면화를 씨아·물레를 이용하여 실을 만들고 이를 다시 재래 베틀로 짜서 무명을 만들었다. 농민들은 이러한 재래 면직물이 질기고 실질적이었기 때문에 기계제 면직물보다 재래 면직물을 선호하였다. 농촌의 가내직물업은 주로 농한기에 부녀자의 노동에 의해서 직물을 생산하는 부업적인 것이었으며, 자가소비를 위주로 한 가계보충적인 것이었다. 한편 도시지역에서는 전업적 직물업자들이 생산활동을 계속하고 있었는데, 특히 제1차 세계대전으로 인한 호황으로 많은 직물업자들이 등장하였다. 그러나 이들은 대개 영세한 규모였고 사용하는 직기도 대부분 개량 수직기와 足踏機였기 때문에 공장제수공업 단계에 있었다. 이들은 일제 면제품에 대항할 수 없었기 때문에 대개가 색조나 조직에 변화를 가한 직물이나 교직물 혹은 마포 대용품을 생산하였다. 이들은 일제의 방적자본이 침투하지 못하거나 시장 규모가 너무 작아 무시하고 있었던 분야를 자신의 시장으로 삼았으며, 이러한 대응방식이 성공함으로써 일정 수준까지 성장, 존속할 수 있었다. 20년대 들어 일본인 자본가와 조선인 지주·상인 출신에 의해 근대적 공장이 설립되고 力織機를 갖춘 비교적 규모가 큰 공장들이 출현하였지만 이들 역시 견직물 및 마포 대용품을 주로 생산하였다.

 그러나 민족자본을 제기했던 가지무라조차도 1920년대에 전형적인 민족자본의 성격을 보인 메리야스공업이 30년대에는 식민지 지배에 동화됨으로써 독자적이고 능동적인 저항의 흔적을 남기지 못하였기 때문에 완전 식민지 조선에서 민족자본이란 단순 재생산적인 영세자본 이외에는 존재하지 않는다고 보았다.161)梶村秀樹, 앞의 글(1977). 장시원162)장시원,<식민지반봉건사회론>(≪한국자본주의론≫, 까치, 1984).은 완전 식민지에서 민족자본가계급이 부르주아 민족주의운동의 주도세력이 될 수 없다는 점은 인정하더라도 민족주의 운동의 과정에서 ‘동맹의 대상’으로 인식될 수 있는, 경제범주로서 민족자본은 존재한다고 전제하였다. 그리고 경제범주로서 민족자본을 설정하는 기준을 ‘중소 규모의 산업자본’으로 상정하고 민족자본을 추출하려고 시도하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일제하 한국사회에서 민족자본의 범주가 대단히 제한되어 있었고 그나마 선천적 능력부족이라는 취약성을 안고 있었다고 파악하였다. 이렇게 민족자본의 개념을 수용하여 민족자본의 실체를 확인하려는 연구는 논리적인 면에서 민족주의라는 정치논리를 경제분석에 적용하여 관념적인 대상을 추구한다는 문제점이 있으며, 현실적인 면에서 중소공장이나 가내사업장도 원료를 일본에서 공급받는 곳이 많으며, 직물업 같은 일부 중소공업이나 가내공업의 확대가 총독부의 정책적 지원 아래 이루어졌다는 점을 고려할 때 민족자본의 존립 자체를 문제삼을 수밖에 없다.

 이러한 문제점을 비판하면서 민족자본을 부정하고 조선인 자본 자체의 동향을 추적하는 다른 하나의 경향이 등장하였다. 하시타니 히로시(橋谷弘)163)橋谷弘,<兩大戰間期日本帝國主義と朝鮮經濟>(≪朝鮮史硏究會論文集≫20, 1983).는 철도화물의 운송실태를 분석하여 식민지에서는 제국주의 본국의 경제권에 포섭된 식민지 경제권만이 존재할 뿐 독자적인 민족경제권은 있을 수 없다고 주장하였다. 호리 가즈오(堀和生)164)堀和生,<朝鮮人民族資本論-植民地期京城工業の分析->(≪朝鮮近代の歷史像≫, 日本評論社, 1988).도 조선경제가 일본제국주의 경제에 완전히 포섭된 상황에서 독자적인 민족경제나 민족자본은 존재할 수 없다는 전제 아래, 일본에서 진출한 대자본과 한국인 중소자본은 보완관계에 있으며, 원료 공급, 상품유통을 일본(인)에게 의존하고 있다는 점에서 조선인 중소자본을 일본자본주의의 ‘外業部’로 파악하였다. 허수열165)허수열,<식민지경제구조의 변화와 민족자본의 동향>(≪한국사≫14, 한길사, 1994). 허수열은 조선인 자본의 존재양태를 ‘제1차 기업발흥기’(1916∼20), ‘만성적 불황기’(1920∼33), ‘제2차 기업발흥기’(1933∼37), ‘전시경제체제하 조선인 기업의 성장과 몰락’(1937∼45)이라는 4개의 시기로 구분하고 있다.은 1910년대 후반부터 시작된 조선인 자본의 발전 추세는 20년대 들어 만성적 불황을 겪으면서 대자본이 침체되고 영세·소자본에 의하여 지속되었다고 파악하였다. 그에 의하면 조선인 공장은 영세한 규모로 정곡업·양조업·직물업·도자기 제조업·鰮油제조업 등 몇몇 소수의 업종에 집중되었으나, 한편 금속기계공업 가운데 강주물·침류·방직용 기계기구·인쇄제본용 기계기구·의료기계·자동차·톱니바퀴 제조 등 종래의 전통적인 산업과는 이질적인 업종에서 소규모 조선인 업종이 새롭게 출현하였다고 지적하였다. 또한 1928년의 경우 단순가공업인 정미업과 양조업이 전체 공장 수에서 58%를 차지하였는데, 정미업은 원동기 사용을 전국적으로 전파하는 데 상당히 기여했다고 보았다. 朱益鍾166)朱益鍾,≪일제하 평양의 메리야스공업에 관한 연구≫(서울대 경제학과 박사학위논문, 1994).은 성공적인 경제성장의 비결로서 ‘후발성의 이익’ 못지 않게 ‘흡수능력’이 중요하며, 그 중요한 구성요소의 하나가 실제 공장 건설, 제품생산, 시장개척을 수행한 유능한 기업가 집단이라 보고, 평양 메리야스공업을 대상으로 근대적 기업가의 성장과정을 규명하였다. 그에 의하면 1910년대 가내공업 단계로 출발한 평양의 메리야스공업은 1910년대 말에서 1920년대 초에 걸쳐 전국을 제패하고 공장공업적 단계로 발전해 갔다. 평양 공업은 경성 공업의 쇠퇴로 생겨난 시장 기회를 놓치지 않고 활용하여 전국시장을 장악하였으며, 그 과정에서 기존 업체가 규모를 확대하고 안정성을 높였으며 다수의 신규업체가 생겨났다. 그리고 1920년대 중반 일종의 위기를 맞았으나 그에 대응하면서 한층 발전해 갔다. 그 위기란 저렴한 중국인 노동력을 이용하는 신의주 양말공업이 강력한 경쟁자로 대두한 것이었는데, 평양의 업체들이 그와 경쟁하기 위해서는 비용을 절감해야 했다. 따라서 메리야스 공장주들은 우선 직공 임금을 대폭 인하하였고, 그로 인해 촉발된 직공들의 저항을 억눌렀다. 그리고 부분적으로 전동직조기를 도입하여 노동생산성을 높였다. 이렇게 도전에 적극적으로 대응함으로써 평양 메리야스공업은 한층 더 발전할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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