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편 한국사
  • 근대
  • 48권 임시정부의 수립과 독립전쟁
  • Ⅱ. 대한민국임시정부의 수립과 활동
  • 1. 임시정부의 수립과 초기 활동
  • 1) 임시정부 수립의 배경
  • (2) 정부수립운동과<대동단결선언>

(2) 정부수립운동과<대동단결선언>

 1910년의 ‘한일합방’부터 3·1운동에 이르기까지 줄기차게 전개된 정부수립운동의 무대는 미주와 노령, 북경과 상해 등 세계정세의 변동에 민감한 지역이었다. 이 시기에 전개된 정부수립운동에 가장 큰 영향을 준 사건은 역시 제1차 세계대전이었다. 따라서 1910년대 정부수립운동은 전쟁이 발발하는 1914년을 전후로 하여 두 시기로 구분해 볼 수 있다.

 처음 정부수립이 제창된 곳은 미주 한인사회였다. 1911년 초 ‘미일전쟁’설이 유포되자 박용만은 이를 조선이 독립할 기회로 포착하여 사회조직인 대한인국민회를 정치조직인 ‘無形國家’로 건설할 것을 제창했다.182)≪新韓民報≫, 1911년 3월 29일.
金度勳,<1910년대 초반 미주한인의 임시정부 건설론>(≪한국근현대사연구≫10, 1999), 258쪽.
이를 위해 대한인국민회를 국가인민을 대표하는 총기관인 ‘임시정부’로 설립, 3권 분립에 의한 자치제도를 실시하며, 병역과 납세의무를 규정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 주장은 1910년대 전반기 한국민족운동의 주된 방략인 독립전쟁론을 미일전쟁이라는 가정하에 제시한 것으로 당시 노령과 만주의 무장독립운동 세력과 연계된 것으로 주목된다.183)尹炳奭,≪增補 李相卨傳≫(일조각, 1998), 159쪽. 그러나 전쟁설의 誤判, 대한인국민회를 임시정부보다는 한인의 ‘자치기관’으로 위치지우려는 온건론에 밀려 더 나아가지 못했다.

 반면에 노령 연해주는 만주와 함께 ‘독립전쟁론’에 따라 독립운동기지화가 추진된 독립전쟁의 주요 거점이었다. 여기에서 勸業會는 1914년 러시아에서 ‘제2 러일전쟁’설이 팽배한 가운데 大韓光復軍政府의 설립을 주도했다. 대한광복군정부는 노령과 중령을 세 개의 군구로 나누고 사관학교를 설치, 운영하는 한편 독립전쟁에 대비하여 노령과 만주에서 양성된 ‘광복군’을 망라하는 전투 편성계획까지 수립했다.184)리영일,≪리동휘 성재선생≫(필사본), 201쪽.
반병률,<이동휘와 1910년대 海外民族運動>(≪한국사론≫33, 서울대, 1995), 227∼228쪽.

 그러나 세계대전의 발발로 ‘제2 러일전쟁’에 대한 기대가 사라짐으로써 이 계획은 물거품이 되었다. 대한광복군정부 안의 복벽주의와 공화주의를 둘러싼 이념적 갈등, 출신지역에 따른 파쟁도 급격한 정세변동기에 독립전쟁을 지휘할 사령부로 출범한 대한광복군정부의 효과적 운용을 어렵게 만들었다.

 세계대전의 발발은 한국민족운동에 ‘외교독립노선’을 정립시켰다. 1914년 권업회와 대한광복군정부의 해산으로 중국 상해에 집결한 민족운동자들은 일본의 참전으로 독일의 승전과 중·독 연합에 의한 對日開戰을 전망하면서 전쟁을 국권회복의 기회로 판단했다. 이들은 상해에서 신한혁명당을 결성하고 광무황제(고종)를 당수로 추대, 대한제국의 망명정부 수립을 추진했다. 이들의 구상은 독일정부의 보증하에 중국과 한국 망명정부 사이에 군사동맹을 체결함으로써 독립전쟁에 대비한다는 것이었다. 이 계획은 무위로 끝났지만 대한광복군정부가 와해된 뒤 세계대전의 발발을 계기로 정세변화에 능동적으로 대처하여 독립전쟁론에 외교노선을 접목시킨 사례로 주목된다.185)李賢周,<1910년대 국제정세와 정부수립운동>(≪대한민국임시정부수립 80주년기념논문집≫상, 국가보훈처, 1999), 89쪽.

 신한혁명당이 추진한 망명정부 수립의 실패는 세계정세에 대한 오판과 복벽주의와 공화주의 등 조직 내부의 정치·사상적 갈등 때문이었다. 이런 가운데 미국의 참전으로 전선이 확대되고 신한혁명당의 붕괴로 국외 독립운동의 구심이 사라지자 국면의 전환이 필요했다. 1917년 7월 상해에서 14명의 명의로 발표된<대동단결선언>은 이러한 상황에서 나온 것이었다.<대동단결선언>은 단결의 필요성, 국내동포의 참상, 해외동포의 역할, 선언 당시의 국제환경, 대동단결에의 호소, 그리고 ‘提議의 강령’으로 구성되어 있는데186)<大同團結宣言>은 독립기념관에 기증된 도산 안창호의 유품과 문서에서 나온 자료로 원문이≪韓國學論叢≫9(국민대 한국학연구소, 1987) 끝에 영인, 수록되었다. 요지는 다음과 같다.

 첫째 주권불멸론에 의한 국민주권설을 제창했다. 주권은 민족 고유의 것이므로 대내적으로 융희황제가 주권을 포기한 것은 국민에게 이를 讓與한 것으로 인식했다. 둘째 주권상속의 방법으로 “국가상속의 대의를 선포하여 해외동지의 총단결을 주장하며 국가적 행동의 進級的 활동을 표방”했다. 셋째 세계 피압박 민족운동이 고조됨을 예시하면서 당시의 국제정세를 “吾人의 유기적 통일”을 가능하게 해주는 유리한 조건이라고 판단, 세계여론을 환기할 것을 주장했다.

 <대동단결선언>은 임시정부의 수립과 이를 위한 민족대동의 회의를 제창한 것으로 요약된다.187)조동걸,<臨時政府 樹立을 위한 1917년의 ‘大同團結宣言’>(≪韓國學論叢≫9, 국민대 한국학연구소, 1987), 131쪽. 이들은 공화주의에 입각하여 주권불멸론에 의한 국민주권설을 제창하고 대한제국 황제가 포기한 주권을 상속하기 위해 임시정부를 수립할 것을 주장했다. 이를 위해 국외 독립운동 단체나 개인으로 민족대회의를 소집할 것을 제안한 것이다. 따라서<대동단결선언>의 임시정부 수립론은 1910년대 이래 제기된 임시정부 수립론이 결집된 것이라 할 수 있다.

 <대동단결선언>은 주도 인물들이 국외 각지에 흩어져 있었기 때문에 그 이념이 당장에 구현되기는 어려웠다. 그러나 전쟁 중에 국외 민족운동자들이 국제정세의 변동에 능동적으로 대처하여 공화정체의 국민국가를 건설하고자 기도했던 노력은 높이 평가할만하다. 2년 뒤에 3·1운동을 계기로 국내외 각지에서 임시정부 수립운동이 일어나는 것도 1910년대 초 ‘한일합방’ 직후부터 시작되어 이념적으로는 1917년에 이르러 국민주권론에 의거, 공화정을 표방하는<대동단결선언>의 토대 위에서 가능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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