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편 한국사
  • 근대
  • 48권 임시정부의 수립과 독립전쟁
  • Ⅱ. 대한민국임시정부의 수립과 활동
  • 1. 임시정부의 수립과 초기 활동
  • 2) 임시정부의 수립과 통합
  • (1) ‘국민대회’와 국내 정부수립운동

가. ‘국민대회’와 한성정부의 선포

 3·1운동 뒤 국내에서 전개된 임시정부 수립운동은 향후 민족운동을 이끌어 갈 영도기관이 될 것이라는 점에서 민족 구성원의 합의라는 절차가 중시되었다. 이런 점에서 국민대회는 합의의 절차로 간주되었다. 즉 국민대회가 갖추어야 할 요건은 국내를 기초로 13도 ‘국민대표’로 조직되어야 하며, 임시정부의 정치형태는 민주공화정이어야 한다는 것 등이었다.188)≪朝鮮獨立新聞≫제2호(國史編纂委員會 編,≪韓國獨立運動史≫資料5:3·1運動編, 正音文化社, 1968), 2쪽.
李賢周,<3·1운동 직후 ‘國民大會’와 임시정부 수립운동>(≪한국근현대사연구≫6, 한울, 1997), 114쪽.

 국민대회를 통해 임시정부를 수립하려는 계획은 3월초부터 李奎甲·洪冕禧(洪震)·韓南洙·金思國 등에 의해 비밀리에 추진되었다. 여기에는 申泰鍊(申肅)·安商悳 등 천도교 측의 인물들도 개입하고 있었다.189)李奎甲,<漢城臨時政府 樹立의 顚末>(≪新東亞≫1969년 4월호, 동아일보사), 176쪽.
독립운동사편찬위원회,<한남수·김사국에 대한 신문조서>(≪독립운동사자료집≫5:3·1운동재판기록, 1975), 78쪽.
申肅,≪나의 一生≫(日新社, 1963), 50쪽.

 이들은 ‘비밀독립운동본부’를 조직하고 임시정부 수립과 국민대회 개최를 위한 준비위원회를 구성했다. 3월 17일에는 현직검사 韓聖五의 집에서 준비위원 회의를 개최하여 “13도 대표자회의를 4월 2일 인천 만국공원에서 열고, 임시정부를 수립하여 이를 국민에게 공포할 것”을 결의했다. 회합에는 위의 4명 외에도 이교헌·윤이병·윤용주·최전구·이용규·김규·이민태·閔橿 등 준비위원 거의 전원이 참석해<국민대회 취지서>와<임시정부 약법>등을 작성하고 임시정부 각원, 평정관, 파리강화회의에 출석할 국민대표 명단을 확정했다.190)李奎甲, 위의 글, 176쪽.
<국민대회취지서>의 내용은≪이화장소장 우남 이승만문서≫4(연세대 현대한국학연구소, 1998), 26∼27쪽.

 그러나 인천 만국공원에서 열린 13도 대표자회의는 성원 미달로 국민대회를 준비하는 회합에 머물렀다. 여기서 참석자들은 “국민대회를 조직하고 假政府를 만들어 파리강화회의 및 각국에 조선독립의 승인을 요구할 것”을 결정했다.191)<한남수 및 안상덕 신문조서>(독립운동사편찬위원회,≪독립운동사자료집≫5), 138∼139쪽.

 국민대회의 실행은 김사국의 주도하에 이루어졌다. 한남수와 홍면희·이규갑 등이 해외와의 연락을 위해 상해로 망명했기 때문이다. 김사국은 이미 3월 중순께 보성전문학교 졸업생인 朱翼의 소개로 明治大에 재학중인 金裕寅을 만나면서 張彩極·金鴻植·全玉玦·李鐵·崔上德 등을 끌어들였다.192)<김사국 예심조서>(독립운동사편찬위원회,≪독립운동사자료집≫5, 1975), 140쪽. 김사국·김유인·玄錫七·민강 등 국민대회 지도부는 4월 23일을 거사일로 정하고 제반 준비를 진행했다. 현석칠과 민강은<국민대회 취지서>·<결의문>·<약법>·<선포문>등을 인쇄하기 위해 서소문동 李敏洪 집 홍제당에서 목판을 새겨 6천장을 인쇄했다.

 이들의 계획은 4월 23일 정오에 서린동 춘추관에서 국내 13도 대표자가 모여 임시정부를 선포하고 노동자를 동원, 종로 보신각을 중심으로 대대적인 시위를 벌이고 문서를 배포한다는 것이었다.

 당일 종로 일대에서는 이들 주도로 ‘國民大會’와 ‘共和萬歲’의 깃발 아래 만세시위가 벌어졌고 한성정부의 수립이 선포되었다.193)고정휴는 13도 대표자회회의와 국민대회 개최사실을 부인하고 있다(高珽烋,<세칭 한성정부의 조직주체와 선포경위에 대한 검토>,≪한국사연구≫97, 1997;<대한민국임시정부의 성립과정에 대한 검토>,≪한국근현대사연구≫12, 2000 참조).

4월 23일 낮 12시 10분 종로 보신각 부근에서 4∼5명의 학생 같은 자가 3本의 小旗를 흔들고 만세를 부르면서 질주하여 종로서 방면으로 향하는 것을 보고 곧 추적하였는데 소기를 종로통에 버리고 관철동 소로로 도망하여 드디어 소재가 불명되었는데 24일 이 5명 중 2명은 체포했다. 소기는 목면제이며 2本에는 國民大會라고 쓰고 1本에는 共和萬歲라고 묵서한 것이다. 4월 23일 경성에서<임시정부선포문>·<국민대회취지서>·<선포문>이라는 불온인쇄물을 발견하였다. 전항 1부의 행동은 이 선포에 관계가 있는 것으로 관찰되어 목하 신문중이나 … (≪韓國民族運動史料≫三一運動篇 其三, 국회도서관, 1979, 323쪽).

 현장에서 주동자가 체포된 데 이어 5월 초에는 지도부를 포함하여 십수 명이 검속되었고, 8월 30일 예심 개정 전까지 모두 28명이 검거되었다. 이 사건으로 검거된 사람은 270여 명에 달했다.194)≪每日申報≫, 1920년 2월 2일.
≪獨立新聞≫, 1920년 2월 12일.
≪新韓民報≫, 1920년 4월 2일.

 주목되는 것은 검거가 계속되는 와중에서도 임시정부 수립을 알리는 만세시위와 전단의 살포가 계속되었다는 점이다. 4월 23일의 국민대회가 원만하게 진행되지 못했다고 판단한 김유인·장채극 등은 풍선을 이용한 대규모 전단 살포를 계획, 준비하던 중 장채극 등이 체포되었고 5월 7일 서울 일원에서는 국민대회 당일보다 확대된 규모의 집회가 다시 시도되었다.195)<京城覆審法院 公判始末書, 장채극 신문>(國史編纂委員會 編,≪韓國獨立運動史資料≫5), 61쪽.
<韓人이 端午節에 臨時政府組織布告文을 宣布코자 하는데 關한 電報>, 特第131號, 1919. 5. 9(국회도서관,≪韓國民族運動史料≫三一運動篇 其一, 1977), 177∼178쪽.

 한성정부의 조직 소식은 국민대회 이전에 중국 신문에 보도되었다.≪天津大公報≫(4월 11일자)와≪上海時報≫(4월 16일자)는 한성정부의 조직과 각료 명단을 보도했다.196)任椿洙,<1920-30년대 中國 新聞에 실린 韓國 關係記事 硏究>(≪國史館論叢≫90, 國史編纂委員會, 2000), 245쪽. 뿐만 아니라 한성정부의 성립은 국민대회 직후 尹致昊 등 기독교 세력과 국내 민족운동세력에게 알려지고 서울발 연합통신의 電文에 의해 미국 등 해외 한인사회에까지 전파되었다.197)≪尹致昊日記≫7, 1919년 4월 26일.
≪新韓民報≫, 1919년 6월 12일.

 그런데 국민대회를 통한 임시정부 수립운동이 ‘민족대표 33인’이 상해에 파견한 대표와의 연락 속에서 태동되었다는 것은 주목할 만한 일이다. 김사국의 공판기록에 따르면 이규갑은 상해에 파견된 현순에게서 편지를 받고 3월 중순 경 이것을 한남수와 자신을 설득하여 국민대회의 준비에 착수했다는 것이다.198)<三一獨立示威關聯者公判始末書-5>(國史編纂委員會 編,≪韓民族獨立運動史資料集≫19:三一運動Ⅸ, 1994), 30쪽. 玄楯의 막후 역할에 대해서는 윤치호도 동일한 견해를 피력한 적이 있다.199)≪尹致昊日記≫7, 1919년 4월 26일.

 현순이 3·1운동 계획에 처음 참여한 것은 1919년 2월 17·8일 무렵 세브란스병원 구내의 이갑성 방에서 열린 회합에서였다. 이 자리에는 이승훈·함태영·안세환·이갑성·박희도 등이 참여했다. 참석자들은 독립을 선언하고 천도교와 공동으로 일본정부 및 조선총독부에 건의서를 보낼 것, 상해에 대표를 파견하여 열강에 독립을 청원하는 문서를 발송할 것 등을 결정했다. 이에 따라 상해 파견대표로 현순이 선임되었다.200)<朴熙道先生取調書>(李炳憲 편,≪三一運動秘史≫), 434∼435쪽.

 그에게 부여된 임무는, 즉시 한국을 빠져나가 중국 奉天으로 가서 그곳에서 ‘한 독립운동가’를 만나 동행하는 것이었다. 현순은 봉천에서 崔昌植을 만나고 그와 동행하여 3월 1일 상해에 도착했다. 당일 이들은 미국인 선교사 피치(George A. Fitch)의 소개로 선우혁을 만나고 이튿날에는 申圭植·李光洙·金澈·신석우 등 신한청년당계 인사들을 만나 자신들이 “민족독립당(‘National Independence Party’)을 대표하여 연락·선전과 외교를 위해” 상해에 왔음을 밝혔다. 최창식은<독립선언서>를 소지했고 3·1운동 발발 소식이 연합통신을 통해 3월 4일자 중국신문에 보도되었다.201)Soon Hyun(현순), MY AUTOBIOGRAPHY(나의 자서전), p.79.

 이들은 상해 프랑스 조계지 내에 독립임시사무소를 설치했다. 현순은 총무로 뽑혀 상해주재 각국 공관에<독립선언서>를 배포하고 국내의 독립운동 상황을 현지 언론에 제공하면서 신한청년당이 파리강화회의에 파견한 김규식 및 미국의 이승만에게도 연락을 취했다.

 3월 초·중순 경 현순은 국내의 이규갑에게 편지를 보내 ‘모종의 계획’을 지시한 것으로 보인다. 그가 특별히 이규갑에게 편지를 보낸 이유는 분명치 않으나, 1919년 1월 이규갑이 전도사로 시무하던 의주장로교회에서 부흥회를 인도했다는 기록이 있어 참고된다.202)Soon Hyun, ibid., p.77. 독립임시사무소의 이광수도 현순과는 별도로 3·1운동 지도자들이 남겨놓은 의사를 확인하기 위해 이봉수를 서울에 파견했다.203)이광수,<나의 고백>(≪이광수전집≫7, 삼중당, 1970), 255∼257쪽.

 3월 27일 밤 상해 프랑스 조계의 한 예배당에서 상해의 독립운동자들이 모인 가운데 ‘최고기관’을 조직하기 위한 회의가 열렸다. 다수의 참석자들이 최고기관의 수립을 서두를 것을 주장했다. 그러나 현순은 “국내로부터 지시가 올 때까지 기다려야 한다”며 이에 반대했다.

 이광수도 “독립선언을 하였으니 정부를 조직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나<독립선언서>에 서명한 33인의 의사도 듣지 않고 우리가 여기에서 정부를 조직한다면 미국동포들도, 하와이동포들도, 노령에서도, 서북간도에서도 저마다 정부를 조직하게 될지도 모르니 이리되면 우리 독립운동이 분열될 염려가 있다. 그러므로 서울에 보낸 사람이 돌아오기를 기다리는 것이 옳다”고204)이광수, 위의 글, 254쪽. 현순의 주장에 동조했다.

 이규갑은 현순의 편지를 받고 바로 동지 규합에 나섰다. 먼저 정부수립운동을 지휘할 ‘중앙대표’로 이규갑·신태련(신숙)·안상덕·권혁채·홍면희 등 5인이 선정되었다.205)李炳憲, 앞의 책, 854쪽. 이들은 실행을 담당할 조직으로 ‘비밀독립운동본부’를 조직했다.

 이 무렵 상해로부터 임시정부 조직문제에 관해 “국내의 동의를 얻기 위해” 洪濤(洪鎭義)와 李鳳洙가 파견되었다.206)申肅, 앞의 책, 50쪽. 이에 5인의 중앙대표는 신숙의 중재로 통합을 시도했으나 실패했다. 통합이 결렬되자 5인 중앙대표는 당시 조직중이던 대동단에 주목했다. 대동단은 3·1운동 중 조직되어 의친왕 이강을 상해로 망명시켜 독립운동의 구심점으로 삼으려던 비밀결사였다. 그러나 이들은 정치사상과 노선의 차이로 국민대회와 조직적으로 결합하지 않고, 일부가 개인으로 참여하는 데 그쳤다.

 남은 문제는 정부형태와 각료의 인선이었다. 국민대회 지도부는 이 문제를 논의하기 위해 ‘준비위원회’를 구성하고 3월 16, 7일 경 회의를 개최했다. 이 회합에서 논란이 된 것은 정부형태였다. 기독교계 인사들은 공화정체를 주장했고 유림출신 인사들은 대한제국의 회복을 역설했다.207)그러나 이들도 공화정체를 대세로 받아들였다(≪省齋遺稿≫, 省齋尹履炳先生遺蹟刊行協會, 1959, 14∼16쪽). 결국 정부수반과 각료 명칭 등 외형상으로는 후자로 했으나, 실제로는 약법을 통해 공화정체의 틀을 갖추었다.208)<약법>제1조 國體는 民主制를 採用함, 제2조 政體는 代議制를 채용함, 제3조 國是는 國民의 自由와 權利를 尊重하고 世界平和의 韋運을 增進케 함, 제4조 臨時政府는 左의 權限이 有함 ① 一切 內政 ② 一切 外政, 제5조 朝鮮國民은 左의 義務가 有함 ① 納稅 ② 兵役, 제6조 本 約法은 正式國會를 召集하여 憲法을 頒布하기까지 此를 適用함(≪이화장소장 우남이승만문서≫4, 1998, 29쪽).

 한성정부의 각원명단은 다음과 같다.

집정관총재 李承晩, 국무총리총재 李東輝, 내무부총장 李東寧, 외무부총장 朴容萬, 재무부총장 李始榮, 차장 韓南洙, 교통부총장 文昌範, 군무부총장 盧伯隣, 법무부총장 申圭植, 학무부총장 金奎植, 노동국총판 安昌浩, 참모부총장 柳東說, 차장 李世永(‘국민대회’ 명의의<宣布文>(≪우남 이승만문서≫4, 28∼29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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