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편 한국사
  • 근대
  • 48권 임시정부의 수립과 독립전쟁
  • Ⅱ. 대한민국임시정부의 수립과 활동
  • 1. 임시정부의 수립과 초기 활동
  • 3) 임시정부의 초기활동
  • (3) 군사외교와 독립전쟁 준비

가. 군사외교의 강화

 1919년 6월 파리강화화의가 종결되면서 세계사의 주요 무대는 유럽과 대서양에서 아시아 태평양지역으로 이동하였다. 이 조약으로 영국과 프랑스가 가장 많은 이익을 획득했지만 일본도 독일이 원래 중국의 산동에서 가졌던 권리와 태평양의 적도 이북의 섬들을 차지함으로써 극동과 태평양에서의 우세를 굳혔다.270)양소전,≪중국에 있어서의 한국독립운동사≫(한국정신문화연구원, 1996), 276쪽.

 반면에 전후 합법적인 세계규모의 자본팽창을 위해 국제연맹의 구조 속에 영·불의 대륙세력을 끌어들이려던 미국의 기도는 저지되었다. 이에 따라 미국은 방향을 바꾸어 극동과 태평양 지역에서 새로운 세력균형을 이루고자 했다. 때문에 미국은 전쟁승리의 전리품으로 이 지역에 대한 독점정책을 강화하려던 일본과 대립할 조짐을 보였다. 이러한 상황은 파리강화회의에 실망하고 있던 임시정부를 고무시켰다.

 연해주와 시베리아 지역에서 전개되고 있던 소련과 일본군 사이에 조성되고 있던 적대관계도 임시정부에게 희망을 갖게 했다. 1917년 11월혁명으로 모스크바에 새로운 권력을 수립한 소비에트정부가 모든 자본주의국가의 노동계급에 대해 반전·반정부투쟁을 벌일 것을 선동하며 각국에 혁명을 조장하자 연합국은 대응책으로 무력간섭을 결정했다. 이에 따라 일본은 연합국 가운데 무력 간섭군을 가장 먼저 파견했다.

 1920년대 초 미국과 일본, 소련과 일본 사이에 전개된 극동지역의 정세변화에 따라 임시정부는 이들 사이의 대립관계 형성이 독립을 이룰 수 있는 호기로 판단했다. “俄日戰·美日戰은 기정의 사실이며 다만 시간의 문제”라는 것이었다.271)≪독립신문≫, 1920년 3월 16일. 이에 따라 임시정부는 1920년을 ‘독립전쟁의 원년’으로 선포하고 열강에 대한 군사외교를 강화했다.

 먼저 임시정부는 중국과의 군사협력을 적극 모색했다. 임시정부는 1920년 시정방침에서 “중국외교단을 편성하고 중국 남북정부, 각 성 省長 및 督軍과 교섭하여 중국으로부터 我民國의 정치행동과 군사준비에 편의를 얻도록 꾀하며 중국사관학교에 我國靑年을 입학케 하여 我民國과 중국이 연합행동할 것을 요구”하기로 확정했다.272)≪韓國民族運動史料(중국편)≫(국회도서관, 1976), 111쪽. 임시정부는 黃永熙 등을 외무부 임시선전원으로 임명하여 사천·운남 등에 파견하고 중국의 주요 반일인사 및 단체와 교섭하여 한중공동전선을 형성하려고 노력했다. 임시정부의 민간외교를 통한 한중제휴 노력은 중국 각지에 中韓互助社를 결성하는 성과를 거두었고, 1921년 9월 국무총리 대리 겸 외무총장 신규식이 광동의 護法政府로부터 사실상의 정부 승인을 얻을 수 있었다.

 미일전쟁설에 고무된 임시정부는 대미외교도 한층 강화했다. 대미외교는 1919년 8월 워싱턴에 설립한 대통령 이승만의 구미위원부에 의해 주도되었고, 1920년 대미외교는 파리강화회의가 끝난 뒤 워싱턴에서 개최될 예정이던 국제연맹회의에 대비한 선전사업에 집중되었다.273)高珽烋,<歐美駐箚韓國委員會의 초기조직과 활동>(≪歷史學報≫134·135, 1992) 참조. 1920년 7월 미국의원 동양시찰단이 중국·조선·일본을 차례로 방문할 것이라는 소식이 전해지자 임시정부는 안창호를 중심으로 이들을 대상으로 한 선전활동을 실행에 옮겼다.274)≪도산일기≫, 1920년 8월 16일.

 임시정부는 이어 미국의원단이 한국을 방문하는 때에 맞추어 국내에서도 이들에 대해 환영의 태도를 표하며 시위운동을 하게 하고 관공리 퇴직과 납세의 거절, 소송의 거절 등을 실행하도록 지시했다. 그 결과 이들 의원단이 방문했을 때 국내에서는 비밀결사를 중심으로 지역에 따라 만세시위운동, 관공서 폭파 등이 계획되거나 실행에 옮겨지기도 했다.275)朴永錫,<1920年代의 美議員團 來韓과 民族運動의 動態>(≪日帝下 獨立運動史 硏究≫, 일조각, 1984) 참조.

 초기 임시정부 외교정책의 특징은 대소외교를 적극적으로 모색한 데 있었다. 대소외교는 1919년 11월 한인사회당의 당수인 이동휘가 국무총리에 취임하고, 특히 1920년 초 연합국의 대소 간섭군의 일원으로 시베리아 및 연해주에 파견된 일본군과 적위군과의 사이에 전쟁의 분위기가 고조되면서 본격화되었다.276)尹大遠, 앞의 책, 145쪽.

 이에 따라 임시정부는 1920년 3월 “露國외교에 적당한 인원을 선발하여 노국 내정을 주찰하고 유력한 기관에 교섭하여 군기와 군수품의 공급과 我 민족이 일본과 개전할 때에 후원할 것을 요구”하기로 결정했다.277)≪韓國民族運動史料(중국편)≫(국회도서관), 111쪽. 대소외교의 핵심은 소련으로부터 독립전쟁에 필요한 무기 및 자금을 확보하는 데 있었다.

 그러나 소련과의 교섭문제는 모스크바 파견원 선정에서부터 마찰을 빚었다. 그것은 국무총리 이동휘가 1920년 1월 22일 국무회의의 결정을 무시하고 한인사회당 당원인 한형권을 비밀리에 모스크바로 파견했기 때문이다. 국무회의에서 파견원으로 결정된 여운형은 여러 차례 안창호를 만나 자신을 모스크바로 보내줄 것을 요청했으나 이동휘의 반대로 무산되었다.278)≪도산일기≫, 1920년 1월 26일.

 이동휘와 구상은 달랐지만 대소외교를 중시한 것은 안창호도 마찬가지였다. 그는 1920년 1월부터 흥사단과≪독립신문≫등 자신의 영향력하에 있던 단체와 매체를 통해 사회주의를 수용하고 선전하기 시작했다. 물론 이것은 장차의 독립전쟁에서 소련의 군사적 지원을 염두에 둔 전술적인 행동이었다. 1921년 초에 이르러 그는 한·중·러 3국의 반일연맹론, 3국의 연합 최고기관론을 제기했다.279)이애숙,<상해 임시정부 참여세력의 대소(對蘇)교섭>(≪역사와 현실≫32, 한국역사연구회, 1999), 26쪽. 그의 이른바 독립전쟁 준비론이 한·중·러 연맹론으로 구체화된 것이었다.

 그러나 1921년 이래 임시정부의 대소외교 정책은 이동휘가 임시정부를 탈퇴하고 내부의 친미외교론과 반사회주의적 성향에 부딪혀 별다른 진척을 보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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