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편 한국사
  • 근대
  • 48권 임시정부의 수립과 독립전쟁
  • Ⅱ. 대한민국임시정부의 수립과 활동
  • 2. 임시정부와 국민대표회의
  • 1) 국민대표회의 소집론과 ‘정부옹호파’의 반대운동
  • (1) 국민대표회의 소집배경과 참가세력

(1) 국민대표회의 소집배경과 참가세력

 1923년 1월에서 6월 초까지 5개월 넘게 상해에서 열린 국민대표회의는 국내외 각지의 거의 모든 독립운동세력이 참가한 최대의 민족대표회의였다. 1919년 4월 수립된 대한민국임시정부(이하 임정)는 그 해 9월 노령의 대한국민의회와 통합, 통합정부로 거듭나면서 독립운동의 최고 구심점으로서 기대를 받았다. 그러나 임정은 독립운동 노선을 둘러싼 내부 분열과 임시대통령 李承晩의 독선, 기호파와 서북파의 지방열 등이 겹쳐 그 역할에 한계를 드러내었다. 한때 국무총리 李東輝와 노동국총판 安昌浩, 젊은 차장들을 중심으로 제도 개혁을 통해 임정을 강화하려던 노력마저 실패하고 그 동안 임정을 실질적으로 이끌어온 이동휘·안창호 등이 1921년 초 임정을 떠나면서 임정은 심각한 존폐 위기에 처했다. 국민대표회의는 이러한 임정의 위기와 독립운동 진영의 분열을 극복, 새롭게 통일해야 할 필요성에서 제기되었고, 그것은 1921년 2월 상해에서 朴殷植·元世勳·왕삼덕 등 14명이 발포한<우리 동포에게 고함>을 계기로 구체화되었다.

 박은식 등은 애초 임정을 조직할 당시 각 방면의 여러 의견을 구하지 않고 몇 사람의 擅行으로 신시대에 적합하지 않는 복잡한 계급과 방만한 제도를 설정하여 현재의 위기에 이르게 되었다고 하면서, 전국민의 의사에 의한 통일적인 강고한 정부조직과 독립운동의 최량의 방침을 수립하기 위해 국민대표회 소집을 요구했다.294)국회도서관,≪韓國民族運動史料(中國篇)≫(1976), 276∼277쪽. 이 선언에 참여한 14명은 대체로 임정 수립 초기 임시의정원 의원으로 참여한 경험이 있거나 임정의 독립운동 노선과 내분에 반대하여 임정 외곽에서 활동했던 인물이었다.

 국민대표회 소집 요구는 북경, 만주에서도 이어졌다. 반임정 세력의 근거지였던 북경에서는 朴容萬·申采浩 등이 1921년 4월 군사통일회의를 열어 임시의정원과 임시정부에 대한 불신임안을 가결하고 4월 27일 이것을 임시의정원에 직접 전달했다. 5월 6일에는 만주의 독립운동 단체들도 액목현에서 회의를 열고 위임통치를 청원한 李承晩의 퇴거와 임정개조를 요구하는 5개항의 결의서를 채택하고 이것을 서간도 출신 의원이자 의정원 의장이던 尹琦燮에게 전달했다.295)독립운동사편찬위원회,≪독립운동사≫4(1973), 516∼517쪽. 1921년 5월 6일 만주의 액목현회의에서 결의된 5개항은 다음과 같다. ① 현재 間西代議士를 소개하여 임시의정원에 향하여 정부 개조의 필요를 제의케 할 일, ② 위임통치를 청원한 사실이 확실한 이상 그 행위의 주창자에게 퇴거를 명할 일, ③ 의정원에 제출한 개조의안이 체결되지 않을 때는 현재 間西의원을 소환할 것, ④ 위 의안의 결정 전에 본 기관 대표 명의로 정부를 파괴하려는 제3 단체의 참가를 불허할 일, ⑤ 양 방면에 대한 제의 또는 권고가 무효로 될 시는 間西는 간서 자체를 보장 자퇴할 일. 이 회의를 주도했던 呂準·李沰·金東三·李震山 등은 그 동안 임정을 지지했던 인사들이란 점에서 이 결의서는 임정에 큰 타격이 되었다.

 임정 외곽에서 국민대표회 소집론이 강력히 대두되는 가운데 1921년 5월 12일 상해에서도 국민대표회 소집을 요구하는 연설회가 열렸다. 연설회에서 呂運亨은 임정 자체 내에서의 임정 개조는 공상에 불과하기 때문에 분규가 극에 달한 시국문제를 해결하려면 국민대표회 소집이 필요하다고 주장했다. 안창호도 정부를 세울 때 각 방면의 의견을 충분히 구하지 못한 한계를 인정하고 임정을 더욱 견고한 민족적 통일기관으로 만들려면 국민대표회 소집이 필요하다고 주장했다.

 이와 같이 상해·북경·만주 등지에서 제기된 국민대표회 소집론의 밑바닥에는 공통적으로 현재의 임정은 더 이상 독립운동의 최고기관으로서 자기 역할을 할 수 없다는 비판 의식이 깔려 있었다. 그 이유는 대체로 세 가지였다. 첫째는 애초 임정을 조직할 당시 각 방면의 여러 의견을 구하지 못하고 소수인의 擅行으로 성립되어 임정 성립 그 자체에 한계가 있고, 둘째는 임정의 직위와 제도가 실제 독립운동에 적합하게 조직되지 못하여 스스로 불필요한 내부 분열만 낳았고, 셋째는 국제연맹에 위임통치를 주장한 이승만이 임시대통령으로서 부적합하다는 것이었다.

 상해에서 국민대표회 소집을 요구하는 제1차 연설회가 있은 지 1주일 뒤인 1921년 5월 19일에 열린 제2차 연설회에서는 20명의 상해 국민대표회기성회 조직위원을 선거하고, 그 자리에서 상해 국민대표회기성회(이하 상해기성회)가 조직되었다. 이어 7월 16일부터 상해와 북경 양측 대표가 국민대표회의를 9월 15일 개최할 예정으로 협의한 뒤 8월에는 상해기성회 위원 30명, 북경교민회 선출위원 15명, 북경군사통일회 선출위원 5명, 천진교민회 선출위원 5명으로 국민대표회 주비위원회(이하 주비회)를 조직했다.296)≪독립신문≫, 1921년 10월 5일.

 그러나 국민대표회의의 개최는 1921년 11월 미국 워싱턴에서 극동아시아의 문제를 다룰 태평양회의가 열린다는 국제 정세의 변화와 경비 조달의 어려움 때문에 계속 연기되었다. 특히 태평양회의에 대한 기대는 국민대표회의 문제를 잠깐 휴식의 상태에 빠지게 했다.

 1922년 2월 기대를 걸었던 태평양회의가 아무런 성과없이 끝나고 태평양회의에 대응하여 모스크바에서 열렸던 극동인민대표회의에 참석했던 대표들이 상해로 돌아오면서 1922년 4월 이후 국민대표회의 소집 추진은 다시 활기를 띠었다. 1922년 5월 중순 북경군사통일회·천진기성회·동녕현기성회·상해기성회에서 선출된 대표들로 주비회를 보완하고 9월 1일 국민대표회의를 개최할 예정이었지만 자금문제와 대표들의 도착이 늦어져 연기를 거듭해야 했다. 이런 가운데 12월 27일 62명의 주비회원이 국민대표회의 예비회의를 열고 1923년 1월 3일부터 정식회의를 열기로 결정함으로써 역사적인 국민대표회의가 개최되기에 이르렀다.

 국내외 각지에서 상해의 국민대표회의에 참여한 주요 대표들은 이념적으로 민족주의와 사회주의 진영으로 구별되었고, 각 진영 모두 자신들의 이념과 독립운동 노선에 따라 국민대표회의에 임하는 입장이 달랐다.

 민족주의 진영은 대체로 임정에 대한 입장과 독립운동 노선에 따라 임정의 개조를 주장하는 개조파와 임정을 부인하고 새로운 기관의 건설을 주장하는 창조 양파로 분화되었다. 개조파에는 상해를 중심으로 임정 안팎에서 활동했던 안창호를 중심한 서북파와 기호파 일부, 서로군정서·한족회가 중심인 서간도의 독립군단체가 대표적인 세력을 형성했다. 그러나 이들 사이에도 운동노선에서는 안창호 등의 준비론과 서간도의 독립전쟁론의 입장 차이가 있었다. 그리고 임정의 외교독립론·준비론에 반발하여 독립전쟁론을 주장하며 북경을 중심으로 반임정 활동을 해 온 박용만·신숙 등 북경군사통일회는 민족주의 진영의 창조파를 대표했다.

 국민대표회의에 참가한 사회주의진영에는 초기 한국 사회주의운동의 특징을 반영하듯 주로 해외 사회주의자들이 주축을 이루었다. 이들은 1918년 노령에서 이동휘가 한인사회당을 조직한 이후 이동휘의 상해파 고려공산당과 김만겸의 이르쿠츠크파 고려공산당으로 분열되어 그 주도권을 둘러싸고 대립해 왔다. 이 가운데 이동휘의 상해파 고려공산당은 노령의 대한국민의회와 상해 임정의 통합에 적극적이었듯이 일찍부터 민족주의 진영과 연합을 꾀해 온 반면에, 김만겸 등의 이르쿠츠크파 고려공산당은 반임정의 입장을 취했다.297)상해파와 이르쿠츠크파의 분열, 대립에는 비귀화선인·귀화선인이라는 조직기반의 차이뿐만 아니라 그 배후에는 조선혁명의 성격과 운동론에 대한 뿌리깊은 이견이 있었다. 즉 상해파는 민족해방을 민족혁명으로부터 사회주의혁명으로 성장·전환한다는 연속혁명론을, 이르쿠츠크파는 사회주의혁명론을 주장했다. 때문에 상해 임정에 대한 입장도 크게 달랐던 것이다. 이에 대한 보다 상세한 내용은 林京錫,≪高麗共産黨硏究≫(성균관대 박사학위논문, 1992) 참조. 1922년 코민테른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상해파와 이르쿠츠크파의 통합이 실패한 뒤 상해파는 민족혁명에 우선 목표를 두고 개조파의 입장을 견지한 반면에, 이르쿠츠크파는 반임정의 입장에서 창조파에 참여했다. 국민대표회의에 참가한 개조·창조 양파의 참가세력과 입장을 정리하면 아래<표>와 같다.

  주요 참가 세력 주요 인물 主 義 주 요 입 장
임정에 대한
태도
지 향 운동 노선


상해의 개조파 임정내의 개조파 안창호 등 서북파 민족주의 임정 인정 정부개조 및
대독립당건설
실력양성론
상해파고려공산당 윤자영·김철수 등 공산주의 임정 인정 정부개조 및
민족혁명당건설
무장독립론
서간도의 개조파
(서로군정서·한족회)
김동삼·이진산 등 민족주의 임정 인정 정부개조 무장독립론


북경의 창조파
(북경군사통일회)
박용만·신숙·
신채호
진보적
민족주의
임정불신임 신조직 건설
(위원제정부)
무장투쟁론
상해·노령의
창조파
이르쿠츠크파
고려공산당
김만겸 등 공산주의 임정불신임 민족혁명당
건설
무장투쟁론
대한국민의회파 문창범 등 공산주의 임정불신임 신조직 건설
(위원제정부)
무장투쟁론

<표>개조·창조파의 참가세력과 운동노선

*趙澈行,<국민대표회(1921∼1923)연구>(≪史叢≫44, 고려대, 1995), 163∼167쪽.

 <표>에서 보듯이 국민대표회의에 참가한 독립운동 세력들이 각기 이념이나 독립운동 노선을 달리함에도 불구하고 크게 개조·창조 양파로 양립하게 된 가장 중요한 요인은 임정에 대한 입장 차이 때문이었다.

개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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