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정이 기대했던 태평양회의가 아무런 성과도 얻지 못한 뒤 상해정국의 관심은 다시 국민대표회 소집으로 이어졌다. 이후 국민대표회 소집을 둘러싼 정부옹호파와 국민대표회 지지파 사이의 대립은 1922년 2월 8일 개최된 제10회 임시의정원으로 옮겨 갔다.305)1922년 3월 10일 내무차장 조완구가 보고한 제10회 임시의정원의 의원 선거 상황을 보면, 총의원 57명 가운데 지금 補選이 안된 의원은 俄領 6명, 함경도 6명, 경상도 6명, 전라도 5명, 서북간도 5명(이상 4개 지방은 의원이 自退하고 補選치 않음), 강원도 2명, 美洲 2명(선출했으나 未到)으로서 合 32명이라고 하여 현재 선출 의원은 25명이라 하였다(≪독립신문≫, 1922년 4월 15일). 임시의정원에서는 개회 이래 의정원의 결의를 통해 국민대표회 소집을 공식화하려는 지지파 의원과 이를 반대하는 정부옹호파 의원 사이의 치열한 정쟁이 6월 말까지 계속되었다.
먼저 회의 제11일째인 1922년 3월 11일 신익희·윤기섭·양기하·손정도·연병호 등 5명은 우리의 조국을 광복하려는 독립운동에 관한 일체의 강령·방략·정책을 원만히 협의하여 적법 또는 합리적으로 신속히 실행키 위하여, 국내외 각지의 단체 대표(독립운동에 종사하는 자)와 각지의 신망과 지식이 특정한 인사를 망라한 대회의를 가급적 속히 소집할 것을 임시정부에 건의하자는 안을 제출했다.306)≪독립신문≫, 1922년 4월 15일. 국내외 각지 단체의 대표 및 신망있는 인사를 망라한 대회의의 소집을 정부에 촉구한 이 건의안은 이미 소집된 국민대표회를 정부가 승인하라는 것이었다. 이 안은 아직 시기가 아니라는 조완구 등 정부옹호파의 반대에 부딪혀 찬성 6, 반대 9표로 부결되었다.
이어 회의 25일째인 1922년 4월 3일 도인권 등 의원 5명은 千世憲 등 상해 교민 100여 명이 연서한<인민청원서>를 제출했다. 이것은 정부가 국민대표회에 찬의를 표하여 이 회가 소집되도록 해달라는 것이었다.307)≪독립신문≫, 1922년 5월 6일. 이 청원안이 제출되었을 때 임시의정원에서는 국민대표회 지지파 의원과 정부옹호파 의원 사이에 격론이 벌어졌고, 그 쟁점은 “국민대표회의 소집이 합리적인가 아닌가”, “본안을 임시의정원에서 수리함이 위헌인가 아닌가” 하는 문제였다.
먼저 반대 토론에 나선 장붕·조완구 등은 이 청원안이 인민의 자발적 의사인지 의심하면서 법리상으로 민법기관인 임시의정원이 있는데도 국민대표회가 있음은 불가하고, 청원자가 국민대표회 소집 당사자인 주비회가 아니라는 등의 이유로 청원안의 승인을 반대했다. 이에 대해 도인권·이유필·신익희 등은 법리론으로 따져도 국민대표회가 헌법상 기관이 아닌 점에서 위헌도 아니고 임시의정원의 존엄을 손상하지 않으며, 사실론으로도 인민이 의회에 청원함은 민주국에서 가장 적법한 행위이고 청원인과 주비회측은 다른 사람이 아니니 관계 유무를 따질 필요가 없다는 점에서 승인을 주장했다.308)≪독립신문≫, 1920년 5월 27일, 6월 3·14·24일.
국민대표회 지지파 의원과 정부옹호파 의원 사이에 치열한 찬반 토의를 거친 뒤 1922년 4월 13일 토론의 막바지 단계에서 정부옹호파 의원인 조완구·윤기섭·閔忠植·李駜珪 등이 퇴장함으로써 찬반의 표결을 하지 못한 채 회의는 정회되었다. 이튿날 출석 의원 15명이 표결하여 찬성 10, 반대 3표로 인민청원안이 통과되었다.
정부옹호파인 장붕 등 6명은 이에 대한 대안으로서 “임시정부와 임시의정원을 영구적 제도로 개정하기로 준비하기 위하여 4개월 이내에 임시의정원을 소집하고 아울러 광복운동자 회의를 소집할 것을 대통령에게 요구하자”는 안을 제출했다.309)≪독립신문≫, 1922년 7월 1일. 이 안은 정부가 주최가 되어 광복운동자 회의를 소집하고 정부와 의정원의 제도 개혁을 통해 임정 중심의 통일을 하자는 것으로 내용상으로는 국민대표회 소집 이유와 크게 다를 바 없었지만 여기에는 국민대표회를 임시의정원의 결의로 무력화시키겠다는 의도가 담겨 있었다. 그러나 이 제안은 1922년 5월 8일 국민대표회 지지파 의원들의 반대로 임시정부와 임시의정원의 법규와 제도를 개선하기 위한 법정연구회를 설치하고 각 방면의 의견을 구하여 연구·주비키 위해 금후 5개월 이내에 임시의정원 회의를 소집할 것을 대통령에게 요구하기로 결의한다는 수정안으로 변질되어 통과되었다.
이런 가운데 국민대표회 지지파 의원들은 국민대표회 소집 명분 가운데 하나였던 ‘이승만의 퇴진문제’를 들고 나왔다. 지지파 의원인 조상섭·오영선 등은 지난 태평양회의에 대한 외교 실패에 책임지고 군무총장 노백린을 제외한 전 각원이 사직하여 무정부 상태인 정부의 복원을 이승만에게 촉구했다. 임시의정원에서는 여러 차례 이승만에게 각원 조각을 촉구했으나 그의 대답은 “지금 의론 중이니 기다리라”거나 “돈 거두는 일에 방해되니 속히 정돈하라”는 무책임한 반응뿐이었다.
국민대표회 지지파 의원들이 이렇게 여러 차례 각원 조각을 이승만에게 촉구한 것은, 무정부 상태에 있는 정부를 하루빨리 회복하려는 의도도 있었겠지만 그 이면에는 이승만의 퇴진문제를 제기하기 위한 명분을 쌓으려는 의도도 있었다. 이것은 이승만이 대통령으로서 각원 조각의 책임을 이행하지 않는다는 이유로 오영선 등 5명이<대통령 및 현임각원 불신임안>을 제출하고 1922년 6월 5일 이승만에게 불신임안에 대한 의향을 묻는 전보를 보낸 데서 분명해진다.
자신에 대한 불신임안의 의향을 묻는 전보를 받은 이승만은, 1922년 6월 10일 정식 후임자가 나오기 전에는 모든 것을 專任할 곳이 없어 辭免을 못하겠다고 임시의정원에 답해 왔다. 이에 임시의정원은 비공식 회의를 열고 후임자 선거의 책임은 임시의정원에 있으니 염려하지 말고 사직하라는 답전을 보내기로 결정하고, 6월 12일<대통령 및 현임 각원 불신임안>을 본회의에 상정했다. 대통령불신임안의 제출 이유는 ‘내정 불통일’, ‘외교의 실패’, ‘조각 불능’ 등 세 가지였고, 국무원불신임 이유는 대통령 불신임 이유에 대한 책임 외에 무정부 상태에 빠진 시국을 회복하려는 성의가 없다는 것이었다.310)≪독립신문≫, 1922년 7월 22일.
국민대표회 소집론의 명분 가운데 하나가 이승만의 퇴진문제였듯이, 이승만은 1919년 4월 임정 수립 이래 외형적으로는 독립운동계의 통일을 가로막는 최대 장애요소였다. 때문에 임시대통령 불신임안은 당시 정국에 있어 매우 중요한 의미를 지니고 있었다. 그럼에도 정부옹호파는 이 안을 받아들일 수 없었다. 이들이 불신임안에 찬성한다는 것은 국민대표회 지지파의 입장을 인정, 결국 국민대표회를 승인하게 되는 결과를 초래하는 것이었고 현실적으로는 기호파의 중심축을 잃게 되는 것이었기 때문이었다. 이런 이유로 1922년 6월 17일 표결할 때 이필규·李秉周·민충식 등이 퇴장한 가운데 이 안은 찬성 12표, 반대 0표로 통과되었다. 수세에 몰린 정부옹호파는 6월 26일 최종적인 수단으로서 金甫淵 등 상해 교민 113명의 연서로 임시의정원에서 이미 통과된 국민대표회의 제안에 대하여 이를 취소한다는<인민청원안>을 제출, 국민대표회를 저지시키려 하였으나 부결되었다.
제10회 임시의정원에서는<국민대표회의 찬성안>과<대통령 및 각원 불신임안>이 통과되었지만 이승만은 대통령직을 사직하지 않았고 또한 그를 옹대하는 일부 인사 가운데서는 의정원의 처사를 불법이라 하여 승복하지 않았다. 이에 신익희·오영선·이유필·손정도·안정근·양기하·조상섭 등 국민대표회 지지파 의원들은 임시의정원의 결의대로 실행하는 날에는 두 개의 정부가 출현할 우려가 있다고 판단하고 자신들의 의견을 포기하고 정부옹호파들이 원하는대로 해 보라고 하는 자포자기적 심정에서 1922년 7월 4일 의원직을 사직했다.311)≪독립신문≫, 1922년 7월 8일. 이로써 임시의정원에서마저 국민대표회 지지파 의원들이 나옴으로써 임시정부와 임시의정원은 완전히 무정부 상태에 빠지고 말았다.
임시의정원에서 국민대표회 지지파와 정부옹호파의 대립으로 국민대표회의 소집이 거의 불가능해지자 이번에는 정부 외곽에서 국민대표회 개최를 위한 모임이 활발히 이루어졌다. 1922년 6월 8일 慕爾堂에서는 임시의정원·국민대표회주비회·정부 등 세 방면의 대표들이 나서 시국에 관한 각자의 정견 발표를 하고, 이어 12일 ‘留滬靑年大會’, 24일 ‘비판연설회’ 등을 잇달아 열었으나 서로의 입장 차이만 확인했을 뿐이었다. 또한 孫斗煥 등도 7월 13일 임시정부·임시의정원의 신구 각원 및 의원, 국민대표회주비원 등 40여 명을 불러 시사책진회를 조직하고 여러 차례 토론회를 가졌으나 조소앙·이필규·김용철 등 정부옹호파들이 시사책진회가 자신들의 의사에 적합치 않다는 이유로 탈퇴함으로써 이것마저 무위로 끝나고 말았다.
이상과 같이 국민대표회의가 정식 개최되기 전 국민대표회 지지파들은 임시대통령 불신임안으로 독립운동계 통일의 최대 장애 요인을 제거하고 임시의정원으로 하여금 국민대표회를 승인케 함으로써 원만한 국민대표회의를 개최하려고 했다. 그러나 국민대표회가 불법이라는 법리상 명분을 내세워 국민대표회의 개최를 저지하려는 정부옹호파의 반대에 부딪혀 국민대표회 지지파는 뜻을 이루지 못했고, 이후 국민대표회의는 두 파 사이의 불신과 대립 속에서 열리게 되었다.
이 글의 내용은 집필자의 개인적 견해이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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