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편 한국사
  • 근대
  • 48권 임시정부의 수립과 독립전쟁
  • Ⅱ. 대한민국임시정부의 수립과 활동
  • 2. 임시정부와 국민대표회의
  • 2) 국민대표회의의 전개 과정
  • (1) ‘비공식회의’와 제11회 임시의정원

(1) ‘비공식회의’와 제11회 임시의정원

 정부옹호파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국민대표회의 정식회의는 국내외의 비상한 관심 속에서 1923년 1월 3일부터 시작되었다. 이 기간 동안에 참가한 지역 및 단체는 135개이며, 대표는 158명이었다. 그러나 회기 동안 자격심사를 받아 대표로 확정된 인원은 125명이었다.312)金喜坤,≪中國關內 韓國獨立運動團體硏究≫(지식산업사, 1995), 170쪽.

 1923년 1월 3일부터 시작된 국민대표회의는 그해 6월 7일 폐회되었는데 회의 형식으로 보면 전체적으로 세 시기로 분류할 수 있다. 제1시기는 정식회의에 앞서 필요한 절차를 협의하기 위한 임시회의기(1. 3∼1. 30), 제2시기는 시국문제와 군사·재정·노동 등 독립운동의 주요 방침이 논의된 정식회의기(1. 31∼5. 15), 제3시기는 시국문제로 개조파가 탈퇴한 뒤 개조파·창조파·정부측의 대표들이 최종적으로 가졌던 三方會議가 열렸던 비밀회의기(5. 16∼6. 7)이다.

 임시회의는 1923년 1월 3일 62명의 대표가 출석한 가운데 열렸다. 1월 29일까지 계속된 회의에서는 대표자격 심사가 진행되고 회의규정이 통과되었으며 국민대표회의 정식간부로 의장 김동삼, 부의장 윤해·안창호, 비서장 배천택, 비서 金綴洙·吳昌煥·朴完三 등이 선출되었다.

 1월 31일부터 시작된 정식회의에서는 주비회와 각 지방·단체의 경과 보고가 있은 후 1923년 3월 5일부터 시국문제가 토론되었다. 3월 9일 윤자영 등 개조파는 다음과 같은 3개항의 개조안을 제출했다.

① 본 국민대표회의는 우리들의 운동으로써 세계의 피압박민족의 해방운동과 동일전선이 되도록 결정한다.

② 본 국민대표회의는 우리들의 운동으로써 血戰에 중점을 두고 조직적으로 추진해 가기로 결정한다.

③ 본 국민대표회의는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조직·방법·헌법·제도·정책 및 기타 일체를 실제 운동에 적합하도록 개선할 것을 결의한다.

 (국회도서관,≪島山安昌浩資料集≫1, 1997, 65∼66쪽).

 이어진 회의에서 1항은 ‘본 국민대표회의는 우리의 독립 운동으로 세계 피압박민족의 해방운동과 통일전선을 구축할 것을 결의한다’로, 2항은 ‘본 국민대표회의는 우리의 독립운동으로써 혈전에 주력하고 조직적 계획하에 급진적 보조로서 추진할 것을 결의한다’로 큰 반대없이 수정, 가결되었으나 문제는 3항이었다.

 1923년 3월 15일 회의에서 창조파인 원세훈이 3항은 시국문제가 아니고 조직문제이므로 차후 일정 중 조직문제가 상정되면 그때 토의하는 것이 타당하다고 하며 반대토론을 벌이면서 창조론과 개조론이 본회의에서 대립하게 되었다. 반대토론이 계속되던 3월 21일 의장 김동삼은 창조파가 구체적으로 반대안을 제출하지 않았다는 이유로 개조안을 본회의에 상정하면서 국민대표회의는 시국문제로 결렬의 첫 위기를 맞게 되었다.

 이에 개조파는 결렬의 국면을 타개하려고 창조파와 3월 28일부터 4월 10일까지 비공식회의를 열었다. 이 회의에서 양측은 시국문제의 쟁점이 된 3항은 의정순서 가운데 노동문제가 종료될 때까지 유보하기로 했고, 대신 그 사이에 개조파는 정부와 임시의정원을 설득하여 국민대표회의에 참가시키기로 합의했다.313)박윤재,<1920年代初 民族統一戰線運動과 國民代表會議>(≪學林≫17, 1997), 171쪽. 만약 이 합의대로 정부와 임시의정원이 국민대표회의를 인정, 참여하여 국민대표회의에서 제정한 헌법에 따라 최고기관이 새롭게 조직된다면 그것은 개조파나 창조파 모두 명분과 실리를 얻을 수 있었기 때문에 합의가 가능했다. 이에 따라 국민대표회의는 1923년 4월 11일부터 다시 개회되어 이후 재정·교육·생계문제 등을 비롯한 노동문제가 통과되는 5월 10일까지 큰 마찰없이 순조롭게 진행되었다.

 안창호 등 개조파는 국민대표회의의 결렬을 막으려고 우선 정치적으로 큰 마찰이 없는 각 분과의 의안을 다루면서 다른 한편으로는 자파 소속의 의정원 의원으로 임시의정원을 통해서 비공식회의에서 창조파와 한 약속을 이행한다는 계획이었다. 이것은 국민대표회의가 개최되기 직전 국민대표회 지지파들이 제10회 임시의정원에서 벌인 노력의 연장이기도 했다. 때문에 이후 상해정국은 한편으로는 국민대표회의가 각 분과를 중심으로 의안을 다루는 동시에, 다른 한편으로는 다시 한번 임시의정원에서 개조파와 정부옹호파가 격돌하는 상황을 맞이하게 되었다.

 개조파들이 정부옹호파를 국민대표회에 참여시키려는 시도는 국민대표회의가 시작되면서부터 있었다. 일제측의 정보에 따르면, “김동삼·왕삼덕·이진산·김갑·김철 등은 吳永善을 중개자로 삼아 정부측의 장붕·조소앙·이시영·노백린 등과 접촉하고 종전의 정부를 계승할테니 임시정부·의정원을 자발적으로 해산하고 모든 것을 국민대표회의에 일임하라고 요구했다”고 한다.314)국회도서관,≪島山安昌浩資料集≫1, 58쪽. 그러나 개조파의 이러한 노력은 국민대표회를 거절하라는 이승만의 강력한 지시로 별다른 성과를 거두지 못했다.

 국민대표회의가 열린 뒤 이승만은 상해와 국내를 대상으로<警告同胞文>을 발표했다. 그는 국민대표회의를 소수 불평분자의 정부파괴운동이며 자신의 거취문제를 국민대회로 결정하자는 것이라고 비판하고 자신은 한성에서 13도 대표가 공식으로 선거하여 세계에 공포한 대통령이기 때문에 국민대표회의가 어떤 결정을 하더라도 내외 인민이 그 결정을 따르지 않을 것이라고 했다. 그리고 정부는 합의될만한 이들끼리 협동하여 인원을 축소, 비용을 절약하고 선동자의 선전에 가벼이 흔들리지 말고 냉정한 상태를 견지하여 임정을 절대 옹호할 것을 지시했다.315)≪李承晩文書≫8, 507∼531쪽. 때문에 개조파와 정부옹호파의 협상이 원만히 진행될 수 없었던 것이다.

 따라서 개조파의 정부옹호파 설득 작업은 1923년 2월 15일 개원된 제11회 임시의정원에서 본격화되었다. 임시의정원은 열렸지만 결원된 의원이 많아 사실상 개원 휴점 상태였다. 이후 보선을 통해 의원 30여 명을 확보하면서 임시의정원은 활기를 띠기 시작했다.

 개조파는 먼저 조덕진 등 9명의 의원이 연서하여 제출한<대국쇄신안>을 제출, 1923년 4월 2일 회의에서 통과시켰다. 이 안은 과거의 모든 사업이 진전되지 못한 원인을 철저히 조사하고 일반 독립운동자의 정당한 여론을 채택하여 필요 또는 적당한 방략을 연구, 우리 독립운동에 관한 국면을 日新케 한다는 것이었다. 이 결의에 따라 의정원에서는 조덕진 외 7명의 의원으로 대국쇄신에 대한 실행방법을 연구하여 구체적 안을 작성, 보고하기 위한 특별위원회를 구성했다.316)≪독립신문≫, 1923년 5월 2일. 여기서 중요한 것은 대국쇄신을 위해 일반 독립운동자의 정당한 여론을 채택한다는 것인데 이것은 곧 국민대표회의에서 모아진 여론을 뜻하는 것임을 쉽게 알 수 있다.

 7인의 특별위원은<대국쇄신실행안>3개 항을 마련하여 제출했는데, 그 내용을 보면 첫째 헌법 제57조317)임시헌법 제57조의 내용은 “임시헌법은 임시의정원의 의원 2/3 이상이나 혹 임시대통령의 제의로 총원 4/5 이상의 출석, 출석의원 3/4 이상의 가결로 개정을 得함” 등이다(≪독립신문≫, 1919년 9월 16일).를 개정하여 임시헌법의 개정 또는 조직제도의 변경 및 중대사업의 처리는 국민대표회의에서 행하되, 단 국민대표회의는 각지방 독립운동단체에서 직접 선출한 대표의 회의이며 임시의정원의 결의로써 이를 인정한 자로 개정하는 일이며, 둘째 임시의정원에서 대통령 이승만을 탄핵하는 일이며, 셋째 현재 개최되고 있는 국민대표회의를 헌법 제57조에 적합한 국민대표회의로 인정하여 헌법개정·정부조직·제도 기타 일체 변경할 권리를 전임한다는 것이었다.318)국회도서관,≪韓國民族運動史料(中國篇)≫, 312쪽.

 결국 특별위원회가 제출한<대국쇄신실행안>은 현재 개최중인 국민대표회의를 개정될 헌법 제57조에 적시한 국민대표회의로 인정하여 임시의정원의 결의를 통해 국민대표회의에 임정의 운명을 맡기자는 것이었다. 안창호 등 개조파가 비공식회의에서 창조파와 약속한 정부 설득방안이란 곧 임시의정원의 결의로 이승만 임시대통령을 탄핵하고 나아가 임시헌법의 개정을 통해 정부개조를 국민대표회의에 전임시킨다는 것이었다.

 개조파의 이러한 계획은 당연히 정부옹호파의 격렬한 반대에 부딪혀 창조파와 약속한 기일을 넘기게 되었다. 개조파는 다시 창조파를 설득하여 국민대표회의를 5월 4일부터 9일까지 휴회하기로 합의를 보았지만, 개조파로서는 어떤 형식으로든지 결정을 보아야 했다. 이에 개조파는 자파 의원 文時煥 등을 통해, 임시의정원의 권한으로 현재 개회중인 국민대표회의로 하여금<대한민국 임시헌법>을 개정케 하고 기타 중대사건을 처리케 하자는 긴급 제의를 했고, 이 제의는 1923년 5월 4일 통과되었다.

 헌법개정의 권한을 법개정도 없이 임시의정원의 의결만으로 다른 기관에 위임하려 한 개조파의 긴급 전술은 법리상 분명 위헌이었고, 이것은 결과적으로 그 동안 수세에 몰려있던 정부옹호파에게 반격할 명분을 제공한 셈이 되었다. 정부옹호파의 강경한 일원인 조완구는 국민대표회와 임시의정원이 병립하는 것은 의회사상 치욕이라고 하며 개조파를 의회의 신성을 모독한 협잡배라고 비난했다.319)위와 같음. 또한 김용철 이하 7명의 의원도 5월 4일 긴급제의를 통과시킨 것은 임시의정원의 직권을 상실케 하고 의정원의 체면을 욕되게 하여 헌장을 문란케 한 불법행위라고 극렬히 비판하고 그 책임을 물어 의장 윤기섭과 부의장 도인권의 징계안을 제출했다.320)≪朝鮮民族運動年鑑≫, 1923년 5월 1일.

 이와 같이 긴급제안의 통과에 대한 정부옹호파의 비난과 반대가 격렬해지면서 의장 윤기섭은 통과된 긴급제의의 무효를 선포했다. 정부옹호파의 반대로 긴급제의가 사실상 무효로 돌아가자 이에 찬성했던 경상·전라·황해·평안·서간도 등지의 의원들이 정국 수습과 각 방면을 통일할 희망이 전혀 없다고 하면서<사면청원서>를 제출하거나 의정원 출석을 거부함으로써 11회 임시의정원은 국민대표회에 임하는 개조파의 의도를 좌절시킨 채 1923년 5월 19일 폐원되고 말았다.

 임시의정원의 이 같은 결과는 곧 비공식회의에서 창조파에게 약속했던 개조파의 의도가 무산되는 것을 의미했고, 그 결과 일시 유보되었던 시국문제를 둘러싸고 개조파와 창조파가 첨예하게 대립하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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