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편 한국사
  • 근대
  • 48권 임시정부의 수립과 독립전쟁
  • Ⅱ. 대한민국임시정부의 수립과 활동
  • 2. 임시정부와 국민대표회의
  • 2) 국민대표회의의 전개 과정
  • (2) ‘삼방회의’와 국민대표회의의 결렬

(2) ‘삼방회의’와 국민대표회의의 결렬

 1923년 5월 10일 국민대표회의에서 군사·재정·외교·생계·노동문제 등 6분과안이 차례로 상정, 통과됨으로써 각 분과의 의안이 종결되었다. 그러나 그 동안 개조파와 창조파가 비공식회의에서 합의했던 임정의 국민대표회 참여계획이 제11회 임시의정원에서 좌절되면서 시국문제가 다시 쟁점으로 떠올랐다. 지금까지 시국문제와 관련되어 제출되었던 의안은 申二鎭 등의 임시정부개조안, 金宇希 등의 신기관건설안, 朴健秉 등의 국시확립안, 여운형 등의 신독립당 조직안 등 네 가지였다.

 1923년 5월 12일 열린 회의에서 시국문제는 이미 결정된 두 안으로 종결하고 기타 제안은 일체 기각하자는 鄭寅敎의 긴급 제안이 있은 후 김우희·여운형 등의 제안은 취소되었고, 정인교의 긴급 제안에 대한 의결은 다음 회에서 결정하기로 하여 시국문제에 대한 토의는 일단 연기되었다.

 시국문제를 두고 창조파와 개조파의 대립이 계속되는 가운데 1923년 5월 15일 의장 김동삼, 서기 배천택, 헌법기초의원 이진산 그리고 김형식 등은 자신들이 속해있던 서로군정서 및 한족회로부터 국민대표회의가 더 이상 목적을 이룰 수 없다며 대표 소환의 통지서를 받고 사임했다. 국민대표회는 4명의 대표자격 상실을 인정하고 부의장 윤해가 의장에, 부의장 후보자 신숙이 부의장에, 비서 오창환이 비서장에 각각 보궐됨으로써 본회의를 진행하는 주요 직책을 창조파가 차지하게 되었다.

 그러나 이튿날 개조파도 통일의 유일 방침인 개조안이 기각되고 국호·연호를 새로 정하면 이는 일민족에 두 개 국가를 형성하여 可恐의 화근을 낳는다는 이유로 개조파 대표 57명이 국민대표회의를 집단적으로 탈퇴함으로써 국민대표회의는 최대의 결렬 위기를 맞게 되었다. 다만 개조파를 이끌던 안창호가 창조파에게 비공식회의를 통한 원만한 타협을 제안함으로써 국민대표회의의 파국을 막을 수 있는 마지막 희망을 갖게 했다. 이때부터 창조·개조 및 정부 사이에 비공식회의가 활발히 진행되었다.

 먼저 윤해 등 창조파 대표들은 개조파가 탈퇴한 근본 문제인 정부문제를 해결하려고 1923년 5월 19일 정부측과의 협상을 모색했다. 창조파의 입장에서도 결렬의 책임을 면하고 나아가서는 개조파를 설득하려면 어떤 형식으로든 정부 문제에 대한 분명한 태도 표명이 필요했던 것이다. 그리하여 창조파는 정부측과의 협상을 통해 개조파의 탈퇴 명분을 없애고 동시에 개조파의 회의 참가를 설득하는 데 노력했다.

 창조파는 1923년 5월 20·21·22일 3일간 회의를 휴회시키고 5월 22일 이후 윤해와 국무총리 노백린이 여러 차례 만나 임정과 국민대표회의 통일 문제를 논의했다. 그 결과 24일 협상에서 양측은 노백린이 제출한 임정과 국민대표회의 통합 5개안을 합의하고, 이것을 각각 국무회의와 간부회의에서 결정을 보고 이튿날 다시 만나기로 했다. 합의된<통합원칙 5개안>이란 임정과 국민대표회의는 서로 서한을 주고받는 형식으로 상호 권위를 인정하며, 임정에서 국민대표회의에 3인의 위원을 파견함과 동시에 임정은 국민대표회의에서 정한 헌법을 임시의정원의 승인을 거쳐 선포한다는 것 등이었다. 이때 개조파는 정부측과 건설파(창조파)의 타협이 성립하면 회의 참석을 거부하지 않겠다는 입장이었다.321)국회도서관,≪韓國民族運動史料(中國篇)≫, 318쪽.

 그런데 노백린이 제안한 이 안은 형식적으로는 국민대표회와 임정이 상호 승인을 통해서 양쪽의 명분을 살렸지만 여전히 임정의 현상유지를 고집하는 정부옹호파의 입장과는 크게 달랐다. 노백린이 정부안으로 제안했던 통합원칙은 5월 25일 열린 국무회의에서 미결되어, 창조파와 임정측의 비공식회의에서 논의되던 국민대표회와 임정의 통합 노력도 일단 실패로 돌아가고 말았다.

 창조파와 정부측의 비공식회의가 아무런 성과를 거두지 못하자 이번에는 朴春根 등 상해파 고려공산당측 대표 7명이 창조파·개조파 및 정부측 등 ‘삼방’의 비공식회의를 주선했다. 그 결과 1923년 5월 31일과 6월 1일 두 차례에 걸쳐 임정·개조파·창조파에서 각 3인씩의 대표가 참여한 ‘비공식간담회’가 열렸다. 이 간담회는 정부의 현상유지를 고집하는 정부옹호파의 반대로 무산되고 말았다. 비공식간담회도 아무런 성과없이 끝나자 창조파는 6월 3일 자신들만의 국민대표회의를 열고 국호를 ‘韓’, 연호를 ‘건국기원’으로 정했다.

 창조파에 의한 신기관 건설이 확실해지는 가운데 국무총리 노백린은 1923년 6월 4일 오전과 오후 두 차례에 걸쳐 창조파와 개조파의 주요 간부를 정부사무실로 초청하여 다시 한번 비공식회의인 ‘사후삼방회의’를 열어 마지막 타협을 시도했다. 이날 회의에는 창조파의 윤해·신숙, 정부측의 노백린·조소앙·홍진, 개조파의 안창호·손정도·정신·왕삼덕 등이 대표로 참석했다.

 6월 4일 정부사무실에서 다시 열린 사후삼방회의에서 노백린은<국민대표회의의 선언서>및 국호·연호 등 임정에 저촉되는 사항은 일체 취소하고, 정부 및 의정원에서는 국민대표회의에 헌법개정의 권한을 부여하되 국민대표회의에서 이를 개정하면 다시 의정원에 회부하여 통과시킨 후 이를 공포하자는 2개항의 타협안을 제출했다.322)국회도서관,≪島山安昌浩資料集≫1, 97쪽.

 노백린의 안은 개조·창조 양파가 모두 반대하여 기각되었다. 이어 창조파의 윤해가 마지막 타협안으로, 임시의정원과 국민대표회의가 비공식 연합회를 열어 헌법회의를 조직하여 헌법 및 일체의 결의권을 위임하고 임시정부 및 임시의정원을 자진 해산하고 국민대표회의는 폐회하자는<헌법회의안>을 제출했다.323)吳昌煥,<회의록>(≪宣布文, 憲法, 機關組織≫, 러시아:러시아현대사문서보관 및 연구센터 소장, 1923), 19쪽.
국회도서관,≪島山安昌浩資料集≫1, 97쪽.
그러나 이 안마저 6월 5일 열린 국무원 긴급회의에서 거부됨으로써 사후삼방회의마저 아무런 성과없이 끝나고 말았다. 정부옹호파가 임정에 대한 어떠한 변동도 용납하지 않고 현상유지를 고집하는 상황에서 임정개조나 신기관의 건설을 목적으로 하는 개조파나 창조파의 타협안은 애초부터 성사될 수 없었다.

 세 차례의 삼방회의마저 아무런 성과없이 끝나자 이청천 등을 비롯한 9명의 대표들도 통일이 불가능해진 상태에서 국민대표회의 참여를 반대하여 탈퇴했다. 이로써 국민대표회에 남은 창조파 대표 39명은 1923년 6월 7일 마지막 회의를 열어 새로 제정한 헌법을 통과시키고 국민위원 33명, 국무위원 4명, 고문 31명으로 구성된 위원제정부를 조직하고 국민대표회의를 폐막했다.

 신정부를 구성한 창조파 일행 30여 명은 1923년 8월 상해를 떠나 블라디보스톡으로 향했다. 이들은 이곳에서 소련의 지원을 받아 활동을 강화하려 했지만 곧바로 소련의 반대에 부딪혀 와해되고 말았다. 소련이 신정부 설치를 반대한 주요한 이유는 첫째 창조파만의 국민위원회는 국민대표회의를 통해 민족통일전선으로서 민족단일당 형태를 취하기를 원했던 코민테른의 요구와 달랐기 때문이었다. 둘째 소련과 일본의 협상 전개라는 정세 변화의 영향이었다. 1922년 말 일본군의 시베리아 철병과 소일협상의 새 국면 전개로 소련이 한인의 새 정부를 소련령에 허용할 경우 일본의 재도발에 부딪힐 지 모른다는 우려에서 한인의 독립운동을 적극 지원할 형편이 아니었던 것이다. 결국 국민위원회는 소련에서 추방되어 북경으로 다시 돌아오면서 사실상 와해되고 말았다.

 한편 삼방회의가 아무런 성과없이 끝나고 사실상 국민대표회의가 결렬되자 창조파에 대한 정부옹호파의 공세가 적극 진행되었다. 1923년 6월 6일 내무총장 김구는 창조파의 행위에 대해 민국에 대한 반역행위라고 규정하고 6월 이후 일체 행위의 취소를 명하는<내무령>을 발포했고, 같은 날 같은 내용의<국무령포고>3호를 발포하여 창조파의 행위를 격렬히 성토했다.

 ≪독립신문≫에서 국민대표회의가 실패할 경우 우리 민족 장래에 가공의 대화근을 낳게 될 것이라고 우려했듯이324)≪독립신문≫, 1923년 6월 13일. 국민대표회의의 결렬은 그 동안 국내외 독립운동계 사이에 뿌리 깊은 불신과 분열만을 다시 확인했을 뿐이었다. 민족주의 진영 내부의 서북파·기호파의 대립과 북경파의 반임정 입장, 또한 사회주의 진영 내부에서의 상해파 고려공산당과 이르쿠츠크 고려공산당의 분열은 민족적 대단결의 필요성에도 불구하고 국민대표회의를 결렬시키는 주요한 요인으로 작용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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