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편 한국사
  • 근대
  • 48권 임시정부의 수립과 독립전쟁
  • Ⅱ. 대한민국임시정부의 수립과 활동
  • 3. 임시정부와 유일당운동
  • 1) 유일당운동의 배경과 계기

1) 유일당운동의 배경과 계기

 유일당운동이 일어나게 된 배경 가운데 임시정부 자체의 배경을 들자면, 무엇보다 먼저 임시정부의 ‘역할가치’가 미흡했다는 점을 거론해야 한다. 임시정부가 ‘존립가치’만큼 역할을 소화해 냈더라면, 굳이 정부조직을 두고서 ‘오직 하나의 당’이라는 존재가 논의되지 않았을 것이다. 그렇지 못하니까, 민족독립·민족해방이라는 절대명제를 내걸고 정부조직 자체에 대한 부정적인 세력이 형성되었고, 또 그러한 주장이 터져 나온 것이다. 어느 정부조직이든 문제가 없을 수는 없다. 더욱이 국토와 주권을 갖고 있는 정부조차도 수립과정이 험난한데, 하물며 이런 경우야 더 말할 나위도 없다. 그렇다고 하더라도 역할가치에 따른 성과가 나타났다면 숱한 암초야 헤쳐 나갈 수도 있는 것이었다. 그러나 그렇지 못했으므로 대내외의 부정적인 요인들이 모두 임시정부의 ‘존립’ 자체를 어렵게 만들었던 것이다.

 임시정부는 수립 단계에서부터 숱한 암초를 품은 채 출발하였다. 수립을 주도했던 인물들은 그 시작점에서부터 반대세력을 배태시켰고, 두고두고 그들의 공격에 시달려야 했다. 노선의 적합성, 대통령 李承晩 선출에 대한 일부의 격렬한 저항, 이승만의 위임청원문제, 연고주의적인 분파성 등은 모두 임시정부의 발목을 잡을만한 주제들이었다. 특히 수립기 임시정부의 외교적 노력이 별 다른 성과를 거두지 못하자, 날아오는 화살을 견뎌낼 수 없었다. 이를 극복하기 위해 독립운동계 전체가 참여한 국민대표회의(1923. 1∼5)가 상해에서 열렸다. 전 세계에 분포한 독립운동조직의 대다수 대표들이 참여한 이 회의는 코민테른의 자금지원 아래 성대하게 열렸지만, 이마저도 임시정부에 대한 처리문제를 두고 창조파와 개조파로 양분되고 말았다. 민족운동의 대통합이 일단 좌절된 것이다. 그렇다고 해서 이 좌절이 완전한 종결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었다. 민족운동의 대통합이라는 노력은 반일-반제투쟁이 필요한 이상 다시 추진되어야 하는 명제였고, 더구나 독립과 해방이라는 목적지로 가는 길목에 가로놓인 장애물이 있을 때면 더욱 긴요한 부분이었다.

 다음으로 유일당운동이 일어나게 된 배경 가운데, 국내의 투쟁상황 판도 변화도 중요하다. 국내 활동가들 가운데 타협주의자들이 등장한 것이다. 국내 일부 자산계급과 지식층을 중심으로 자치론·참정권·실력양성론·민족개조론 등의 이름을 내건 대일 타협주의 노선과 민족개량주의 풍조가 대두하여 그 세를 불려가고 있었다.338)김영범,<대한민국임시정부와 민족유일당운동>(≪대한민국임시정부수립80주년기념논문집≫하, 국가보훈처, 1999), 488쪽. 특히 토지조사사업 이후 일제의 정책이 자작농의 몰락으로 가닥을 잡아가자, 소수의 한인 대지주들은 조선총독부와 일본지주들과 동일한 이해관계를 가지면서 정책 지원자로 자리잡아 갔다. 일제의 통치를 받아들이고 타협하는 목소리가 이광수를 비롯한 개량주의자들의 주장으로 내뱉어지자, 일제의 통치에 타협하지 않는 강경세력, ‘민족좌파’들은 이를 공격하고 나섰다. 그 논리가 바로 비타협주의, 즉 반자치론이었다. 이것은 국내외에 걸쳐 대단한 반향을 불러 일으켰는데, 특히 해외 망명세력들은 더욱 강렬했다. 그 가운데서도 1923년에 의열단선언으로 발표된 申采浩의<朝鮮革命宣言>이 대표적인 논조였다. 일진회와 같은 조직이 1910년 병합을 가져온 敵이었다면, 1920년대에 들어 민족을 배신하는 새로운 적이 장애물로 나타났고, 그것이 민족운동조직들을 통합운동 대열에 다시 서게 만드는 요인으로 작용하였다. 유일당운동이 다시 전개되는 배경에 바로 이러한 장애물에 대한 공동투쟁의 인식이 깔려 있었던 것이다.

 유일당운동의 대외적인 배경으로 민족협동전선론의 등장을 꼽을 수 있다. 이 논리·전략은 1920년대 초에 사회주의 사상의 유입으로 나타난 사상적인 분화와 갈등을 극복하려는 데서 비롯하였다. 코민테른의 지도와 요구, 중국의 제1차 국공합작 등이 결정적으로 작용하였다. 전자의 경우는 1922년 모스크바에서 개최된 극동인민대표회의를 통해 요구된 것이고, 후자의 경우는 임시정부가 존립해 있던 중국본토에서 벌어진 일이어서 그만큼 영향도 컸다. 그 결과 우리 독립운동계에도 협동전선을 촉구하는 요구가 빗발치게 나타났다.

 우선 임시정부 내부에서 이를 지지하는 목소리가 터져 나온 사실을 짚어야겠다. 국민대표회의에 대해 해산명령을 내린 뒤,<이승만의 유고안>을 통과시킨 임시정부는 앞길을 헤아리고 있었다. 1920년대 초반을 넘어서면서 정부로서의 역할가치를 크게 상실하고 있던 임시정부는 새로운 돌파구를 찾고 있었던 것이다. 마침 대두된 타협주의에 강력히 반발하면서 임시정부도 좌파세력을 항일투쟁의 연대세력으로 떠올리고 있었다. 임시정부가 수립된 그 해 9월에 李東輝가 이끄는 연해주의 대한국민의회와 통합했다가 분리되고, 다시 국민대표회의를 통해 통합을 시도하다가 다시 나뉘었지만, 또 다시 합작을 도모해야 한다는 필요성이 절박하게 제시되고 있었다. 그 증거가 朴殷植의 유언에서 드러난다. 이승만 면직 직후인 1925년 3월부터 7월까지 대통령직을 역임하다가 병사한 박은식은 유언에서 민족협동전선의 필요성을 강조했는데, 그 내용은 이 운동에 대한 임시정부의 자세를 잘 나타내 주고 있다.

① 독립운동을 하려면 全族的으로 통일되어야 한다.

② 독립운동을 최고운동으로 하며 독립운동을 위하여는 어떠한 수단방략이라도 쓸 수 있는 것이다.

③ 독립운동은 吾族 전체에 관한 공공사업이니 운동 동지간에는 愛憎親疎의 別이 없어야 한다.

우리가 이 귀중한 독립을 期成시키려면 무엇보다도 전민족이 통일을 요구하여야 되겠오. … 어떤 나라에나 각 당파의 분열이 없을 수는 없으나 적어도 일을 보는 민족들은 士黨 혹은 朋黨을 짓지 않음이 사실이니, 우리도 이점에 크게 주의하여 장차 국가대업에 악영향을 끼치지 말아야 되겠오(≪獨立新聞≫, 1925년 11월 11일).

 즉 박은식은 이 유언에서 독립운동계가 나아갈 방향과 방법의 선택도 각 분파의 통일없이는 불가능하다고 주장했다. 특히 둘째 항에서 “어떠한 수단 방략이라도 쓸 수 있다”고 하여 임시정부 세력이 좌파의 움직임을 신축성 있게 받아들여야 함을 시사했다.

 한편 사회주의 세력은 극동인민대표회의의 결의 내용과 같이 계급해방을 최종의 목표로 삼고, 그 앞 단계로 민족해방을 성취해야 한다고 했다. 결국 민족해방을 달성할 때까지의 한시적인 전략이기는 하지만, 일단 우파의 대동통일론과 합치될 수 있는 공간이 마련된 것이다. 그래서 1926년 1월에 상해에서 여운형·金燦·趙東祜·曺奉岩 등에 의해 조직된 조선공산당 해외부(임시상해부)는 그 첫 사업으로 국민당 건립 계획을 세우고 그 복안을 국내당(2차 조선공산당)에도 전달하였다.339)장석흥,<조선공산당 임시상해부의 통일전선과 6·10만세운동>(≪우송조동걸선생정년기념논총 한국민족운동사연구≫, 나남출판, 1997), 756∼758쪽. 그리고 이들은 바로 그 직후 상해에도 동일한 방향으로 일을 추진해 나갔다. 여운형이 중심이 되어 1926년 2월 상해에서 조직한 ‘主義者同盟’이 바로 그것인데, 그들은 2월 13일에 주의자간담회를 개최하고 다음과 같은 사항을 결의하였다.

1. 우리 無産同盟과 독립운동과의 연합을 촉성하기에 노력할 일.

1. 내외지를 통하여 진실한 ‘맑스’주의자를(의) 통일적 조직을 완성하기에 적극 노력할 것.

1. 종래의 불순분자를 규합하여 파생적 惡癖을 조장하던 일파가 名實不合○○○○○ 僞名으로써 全朝鮮의 무산계급을 농단하여 운동선의 분열혼돈의 禍端을 作함으로써, 우리는 如斯한 투기와 발호를 철저히 제지 匡正할 것(國史編纂委員會,≪日帝侵略下 韓國三十六年史≫8, 探求堂, 1973, 49쪽).

 이 결의내용은 사회주의 세력도 민족협동전선을 추구하고 있었음을 보여준다. 결국 민족협동전선은 독립운동계의 대동통일을 이루어 임시정부의 강력한 옹호세력과의 연합을 통해 1단계 목표인 민족해방을 달성하고, 궁극적으로 계급해방을 이루고자 한 좌파의 목적이 합치점에 이른 데서 성립될 수 있었다. 즉 민족주의에서 탈락해 나간 개량주의자들을 일제와 동일한 적으로 파악할 때, 나머지 세력들은 하나의 광장으로 집결할 수 있었던 것이다. 이것과 다른 성격이긴 하지만, 1925년 5월의 기록을 보면, 북경의 학생조직들도 각 출판물을 통해 동일한 주장을 펼치고 있던 사실이 확인된다. 즉 “兩主義는 그 목적을 달리하면서도 道程을 하나로 함으로써 알력투쟁을 그치고 마땅히 共力一致 혁명의 완성에 절규하지 않으면 안된다”340)金正柱,≪朝鮮統治史料≫8(東京:韓國史料硏究所, 1971), 115쪽.라고 주장하고 나섰으니, 민족협동전선의 결성이 곧 민족운동세력의 통일운동임을 확인할 수 있는 것이다.

 이처럼 좌우세력은 합치점을 찾았다. 임시정부쪽은 계급해방에 앞서 민족해방에 목표를 둔 좌파와 결합을 시도하고, 좌파는 개량주의를 배제한 ‘혁명적 우파세력’ 또는 ‘민족좌파세력’이라 불릴 수 있는 세력과의 전략적 합류를 도모하고 나선 것이다. 결국 식민지에서는 먼저 민족혁명이 성취되어야 하고, 레닌주의 반제운동론은 식민지의 사회주의자가 민족주의자와 동맹을 맺어야 함을 강조했으며, 코민테른도 부르주아민주주의혁명단계에 걸맞은 광범위한 민족통일전선의 결성이 현 단계의 유일한 정당 노선임을 천명한 것이다.341)金俊燁·金昌順,≪한국공산주의운동사≫1(청계연구소, 1986), 373쪽.

 국내 독립운동계의 변화, 임시정부의 역할 가치하락과 주도세력의 인식변화, 좌파세력의 협동전선론 수용 등은 중국본토지역에서만 펼쳐지던 일이 아니었다. 국민대표회의 진행과정에서 이미 이르쿠츠크파가 임시정부를 부인하고 통일적인 민족혁명당으로서 ‘고려국민혁명당’ 결성을 제의한 바 있고,342)보이틴스키·이동휘·한명세,<상해 민족대회에 참가한 조선 공산주의자들에게 보내는 메시지>(조철행,<국민대표회(1921-1923) 연구>,≪사총≫44, 1995), 167쪽 재인용. 개조파이던 여운형도 단체를 통합한 ‘一大 독립당’ 건설을 제안한 바 있었다.343)노경채,≪한국독립당 연구≫(신서원, 1996), 28쪽. 이후 연해주로 옮겨간 창조파들이<한국독립당 조직안>을 내놓기도 하였고,344)申肅,≪나의 一生≫(일신사, 1963), 81쪽.
國會圖書館,≪韓國民族運動史료(中國篇)≫(1976), 512∼513쪽.
이들이 북경으로 돌아온 1924년 7월에는 한국독립당조직촉성회를 설립하려고도 했다.345)金正柱,≪朝鮮統治史料≫8(1971), 116쪽. 그러므로 국내외 전반에 걸쳐 국민대표회의가 열리던 1923년 이후 전체를 하나로 아우르는 ‘대독립당’ 혹은 ‘민족혁명당’을 추구하는 노력이 큰 조류를 형성하고 있었다고 정리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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