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편 한국사
  • 근대
  • 48권 임시정부의 수립과 독립전쟁
  • Ⅱ. 대한민국임시정부의 수립과 활동
  • 3. 임시정부와 유일당운동
  • 3) 유일당운동의 발전과 임시정부 참여
  • (1) 한국독립당관내촉성회연합회의 결성

(1) 한국독립당관내촉성회연합회의 결성

 1927년 가을에 들면서 5개 도시에 유일당촉성회가 결성되자, 다음 수순을 가늠하게 되었다. 다음 단계의 일은 그들을 하나로 묶는 것이었다. 결합을 위한 움직임은 북경촉성회가 1927년 9월에 중국관내에서 성립된 각지 촉성회의 연합회 결성을 상해로 교섭해 옴으로써 비롯되었다. 이 교섭에 따라 상해촉성회는 연합회 출석대표로 이동녕·홍진·김두봉·홍남표·조소앙을 선출했다. 그리고 각지에 교섭하여 1927년 11월 9일 상해에서 ‘한국독립당관내촉성회연합회’(이하 연합회라 함)를 개최하였다. 이에 참석한 각지촉성회와 대표자 및 회원의 상황은 다음의<표>와 같다.

단 체 명 대 표 창립 시기 회원 비 고
대독립당조직
북경촉성회
曺成煥 1926. 10. 16 40 기관지 促成報
한국유일독립당
상해촉성회
陳德三(洪南杓) 1927. 4. 11 160 임시정부가 있음에도
대표는 좌파인물
대한독립당
광동촉성회
鄭學彬(有燐) 1927. 5. 8 170 의열단 영향 큼
한국유일독립당
무한촉성회
朴建雄 白德林 1927. 7월초 150 의열단원 다수
한국유일독립당
남경촉성회
金一柱 金秀靑 1927. 9. 27  30 의열단원 다수

<표>한국독립당관내촉성회연합회 개황

*金正明, 위의 책, 329쪽.
 朝鮮總督府 慶北警察部, 앞의 책, 106·109∼111쪽.
 金承學,≪韓國獨立史≫(獨立文化社, 1966), 410쪽.
 國會圖書館,≪韓國獨立運動史料(中國篇)≫, 621쪽.

 이 연합회는 1927년 11월 22일의 본회의에서 채택한 선언서를 통해, 지금까지 광복운동단체의 숫자가 적지 않았으나, 그 성격이 좋지 못했던 이유는 운동방법이 적합하지 못했기 때문이라고 했다. 그리고 이러한 현상은 전민족의 운동역량을 총집중시킨 유기적 통일기관이 없었다는 사실에 기인한다고 했다. 그래서 ‘대독립당’·‘민족단일당’ 등이라고 하는 대동조직이 필요했고 또 긴급했기 때문에 각지에서 촉성회를 성립시켰다고 하고, 아울러 이 연합회는 다음 순서가 黨組織籌備會를 조직하는 것이라고 밝혔다. 즉 연합회는 각지촉성회를 연결하여 유일당의 조직을 주비할 모임을 결성하는 데 그 목적을 두었다.375)朝鮮總督府 慶北警察部, 앞의 책, 106쪽.

 이 선언은 이어서 독립운동의 興廢가 당조직 여부에 있음을 깊이 인식하지 않으면 안 된다고 하여 ‘以黨治國’의 개념을 도입한 유일독립당 결성의 의지를 밝혔다.376)國會圖書館,≪韓國獨立運動史料(中國篇)≫, 621쪽. 그리고<규약>16조에서 독립당주비회가 성립될 때에 연합회를 해산한다고 했으니, 이 과정이 곧 촉성회 주도자들이 생각한 독립당 조직의 과정이었음을 알 수 있다.377)國會圖書館,≪韓國獨立運動史料(中國篇)≫, 619쪽.

 또 연합회는 만주·노령·미주 등지에도 촉성회 설립을 촉구하기로 하고, 먼저 만주지역에 대표 2명(상해 1명, 북경 1명)을 파견하기로 결의했다.378)규약 3항(2);만주·노령·미주 기타 각지에 인원을 파견 또는 公函을 발송하여 촉성회 설립을 실현하는데 노력한다(國會圖書館,≪韓國獨立運動史料(中國篇)≫, 618쪽). 그리하여 홍진과 鄭遠(鄭世鎬)이 1928년 1월 초에 吉林省 盤石縣에 파견되어 분열되어 있던 在滿 각 단체의 통일을 종용하였다. 한편 홍진은 만주로 가서 그곳에서 조직된 한국독립당의 주역이 되었다. 그의 활동은 유일당운동의 일환으로, 상해에서 파견된 목적을 달성코자 했던 것으로 보인다.

 연합회의 조직에는 전체회원이 모이는 대회, 15인으로 구성되는 집행위원회 및 5인으로 구성되는 상무위원회가 있었다. 집행위원은 박건병·裵天澤·장건상(이상 북경)·崔秋海·咸聲(이상 광주)·張聖山·김일주(이상 남경)·許悅秋·崔圓(이상 무창)·진덕삼(홍남표)·홍진·현정건·조소앙·김두봉(이상 상해) 등 15인이었다. 그리고 상무위원은 진덕삼·홍진·김두봉·배천택·장건상 등 5인이었다.379)國會圖書館,≪韓國獨立運動史料(中國篇)≫, 619쪽.

 연합회의 성립에 중국본토지역의 독립운동계가 총망라하여 참가했다. 거기에는 상해·북경·남경·광동·무한 등 각 지역의 대표만이 아니라 홍진을 비롯한 임시정부계열과 박건병·배천택 등의 북경 중심의 세력, 그리고 사회주의 세력 가운데 이르쿠츠크파·화요회파 계열과 상해파·서울청년회파 등 각 계열의 독립운동자들이 통합하기에 이르렀다.

 이렇게 연합회가 개최되던 시기에 상해에서 발행된≪新道≫라는 잡지에는<한국유일독립당의 촉성에 대하여>라는 선언이 게재되었다. 이 글은 당시의 전선통일에 대한 이론을 집약한 것이었다.

산만 무통일한 각 소단체의 분립으로부터 조직적·통일적·전민족적 결합을 촉성하고, 국부적 경제투쟁-자연발생적 운동-으로부터 전민족적 정치투쟁-目的意的 運動-을 절규하기에 至하다. 그리하여 전자는 此 민족운동의 전선통일에 관한 노력으로서, 후자는 正히 공산주의의 전선확충에 대한 叫呼이다(國史編纂委員會,≪韓國獨立運動史≫4, 1968, 874쪽).

 이 글에서 민족주의자들은 민족운동계를 통일하여 결집된 힘으로 민족운동에 나서자는 목적을 가졌으나, 좌파세력은 전민족적 정치투쟁으로의 전환이라는<正友會선언>과 그 軌를 같이하는 데 목적이 있음을 알 수 있다. 이 두 가지의 상황이 서로 일치하는 데서 민족협동전선 조직의 원칙이 성립되고 이에 의해 ‘勞農群衆’을 기반으로 혁명역량을 총집중하여 계급과 연합전선을 형성할 수 있다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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