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편 한국사
  • 근대
  • 48권 임시정부의 수립과 독립전쟁
  • Ⅱ. 대한민국임시정부의 수립과 활동
  • 3. 임시정부와 유일당운동
  • 3) 유일당운동의 발전과 임시정부 참여
  • (2) 전위조직 중국본부한인청년동맹의 성립

(2) 전위조직 중국본부한인청년동맹의 성립

 1927년 11월에 연합회의 성립이 추진되는 가운데 同會의 전위가 될 목적으로 ‘中國本部韓人靑年同盟’(이하 ‘중본한청’이라 함)이 조직되었다. 기존 단체인 ‘上海靑年會’(상해한인청년회인 듯)가 1927년 12월 4일 제4회 임시총회에서 “청년회의 진보 발전을 기하는 데 있어서 청년회의 연맹을 필요로”하여 상해·남경·북경·광주·무한의 다섯 지역 청년회 대표와 협의한 결과 중본한청을 창립했다고 밝혔다.380)國會圖書館,≪韓國獨立運動史料(中國篇)≫, 628쪽. 이어 5일에 집행위원회를 열고 내부 조직 및 위원을 선출하였는데, 중앙집행위원장 邊長城(邊東華)을 비롯한 23명의 대표로 이루어진 집행위원회를 구성하였고, 그 가운데서도 중심인물은 鄭泰熙·李寬洙·金基鎭 등이었다.381)23명의 대표는 상해지부 대표 邊長城(邊東華;위원장)·鄭泰熙·李寬洙(崔煥)·金基鎭·嚴恒燮·鄭遠(鄭世鎬) 등 11명, 북경지부 대표 金英植 등 5명, 광동지부 대표 鄭學彬(鄭有燐)·咸聲(吳成崙)·崔秋海·張志樂 등 5명, 무창지부 대표 陳甲秀 1명, 남경지부 대표 金秀靑 1명 등으로 구성되었다(國會圖書館,≪韓國獨立運動史料(中國篇)≫, 623쪽). 구성 인물을 보면 좌파인물이 상당히 진출해 있고, 특히 화요파가 장악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동맹의 조직은 상해에 본부를 두고, 각 지역의 지회로 구성되었는데, 각 지역의 청년회를 지회로 개조토록 했다.

 이 동맹은 “한국독립 및 세계혁명의 이론과 실제적 진술을 討究樹立하여 그 실현을 도모한다”는 강령에 이어<선언서>를 발표했다.

현실에 직면한 한국민족은 종래의 지식계급, 중산계급을 주력으로 한 반항운동으로 노농대중을 주력으로 하는 각 계급층의 반항요소를 결합하여 全線的으로 진출하게 되었다. 이리하여 재래의 봉건적 투쟁과 부분적 組合主義的 경제투쟁에서 전면적 정치투쟁으로 진출하게 되었다. … 혁명을 광대히 하기 위해서는 민족적 유일당을 노동자와 농민대중의 위에 세우는 데 노력하지 않으면 안 된다. 現下 생산과정에서 잔존한 봉건층으로부터 발생하는 온갖 餘弊와 불순한 투쟁을 버려야 할 것이다. … 종래로부터 민족주의 진영에서, 사회주의 진영에서 혁명역량을 살해하는 파벌주의와 地方割據爭權에 대한 배격과 온갖 기회주의자의 정체를 폭로하여 민중의 진정한 진로를 열어야 할 것이다. … (國會圖書館,≪韓國民族運動史料(中國篇)≫, 621∼622쪽).

 이 동맹은 선언을 통해 정치적 투쟁으로 방향을 전환할 것과 노동자와 농민대중의 기반 위에 투쟁하기를 주장했다. 이들의 구성과 이념을 살펴보면, 중본한청의 주도권이 좌파 세력에게로 기울었음을 쉽게 알 수 있다. 또한 좌파 세력이 화요회계열과 ML계열이 모두 참가하고 있음도 알 수 있다.

 이 동맹은 이어서 다음과 같은<결의안>을 발표하였다.

① 만주청년단체와 연락하여 재중국한인청년총기관을 조직할 것.

② 內地·日本·美洲 기타 각지 청년단체와 유기적 활동을 취할 것.

③ 한국청년회 총본영인 한국청년총동맹의 一支隊的 임무를 행할 것.

 (金俊燁·金昌順,≪韓國共産主義運動史≫4, 청계연구소, 1986, 269쪽).

 이<결의안>은 중본한청이 만주의 청년단체와 유기적인 관계를 갖고 한국청년총동맹의 支隊的 역할을 하고자 했던 사실을 나타낸다. 이 결의에 근거하여 중앙집행위원인 鄭遠을 1928년 1월 상순에 만주로 파견하여 각지 청년 단체들과 접촉하게 하였는데, 만주에서도 이미 1927년 8월에 海林에서 개최한 남북청년단체대표협의회 이래 통합운동을 벌이고 있었으므로, 전중국의 항일청년운동기관을 결성한다는 점에 대해서는 상해의 중본한청과 만주의 각 청년단체들 사이에 이의가 있을 수 없었다. 그리하여 정원과 韓哲(남만청년총동맹 집행위원장)이 그에 대한 창립준비를 진행하고, 마침내 1928년 4월 20일에 발기대회를 개최하기에 이르렀는데, 참가단체는 북만청년총동맹·남만청년총동맹·중국본부한인총동맹(재상해)·淞江청년총동맹·哈長청년동맹·麗(勵)新청년동맹 외 1개 청년동맹이었다.382)金俊燁·金昌順, 앞의 책, 269∼270쪽.

 이들은 1928년 5월 27일에 滿洲 吉林省 盤石縣에서 在中國韓人靑年同盟을 성립시켰다. 그리고 이들은 노동문제에 대하여 “일반노동자와 농민으로 하여금 吾조직을 촉진하여 계급적 의식을 각성케 하고 정치적 의식을 보급시켜 전민족적 정치운동의 주력부대가 되게 할 것”이라고 결의했다.383)國會圖書館,≪韓國獨立運動史料(中國篇)≫, 625쪽. 또한 동맹은 창립대회에서 채택한 당면 투쟁슬로건을 통하여 정치·경제·교육·사회 등 4개 부문에 대해 주장을 펼쳤는데, 특히 정치 부문에서 자치권과 공민권의 획득을 주장했다. 이것은 당시 만주에서 전개된 민족주의 계열의 주된 운동이 무장독립운동과 반일자치운동이었기 때문에, 사회주의 세력은 민족주의 진영과 제휴하기 위해 그러한 주장을 슬로건으로 채택했다.384)金俊燁·金昌順, 앞의 책, 275∼276쪽. 자치권 획득이란 당시 東三省 정권 및 남경정부와 교섭하여 만주에서의 한인추방정책을 철회시키고 자치권을 확보하며 또 국민당 세력과 제휴하여 반일독립운동을 진행하려던 운동으로, 주로 민족주의 세력의 운동이었다.

 이러한 강령에도 불구하고 좌파세력이 주도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뿐만 아니라 좌파세력 가운데서도 조선공산당만주총국을 장악하고 있던 ML계열이 화요회계열을 압박하는 현상이 나타나게 되었고, 다음 장에서 언급하겠지만 이것이 유일당운동을 주춤거리게 만드는 결정적인 요인으로 작용하게 되었다.

개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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