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편 한국사
  • 근대
  • 48권 임시정부의 수립과 독립전쟁
  • Ⅱ. 대한민국임시정부의 수립과 활동
  • 3. 임시정부와 유일당운동
  • 4) 유일당운동의 중단과 임시정부의 여당 결성

4) 유일당운동의 중단과 임시정부의 여당 결성

 1928년에 들면서 유일당운동이 답보상태에 빠지기 시작했다. 이후의 과정은 크게 두 단계로 나누어 살펴야 한다. 그 첫 단계는 1928년 중반부터 1929년 10월의 유호한국독립운동자동맹(이하 유호동맹)의 결성까지, 다음 둘째 단계는 유호동맹과 한국독립당이 분립했으면서도 협동전선운동의 여진이 남아있던 1931년 말까지이며, 마지막으로는 1931년 말에 유호동맹이 해체되어 협동전선운동의 한쪽 편 상대가 없어진 시기이다.385)金喜坤,<1930년대 초 상해지역 한인공산주의자의 동향-留滬韓國獨立運動者同盟을 중심으로->(≪國史館論叢≫47, 1993), 169∼194쪽.

 첫 단계는 다시 작은 두 단계로 나뉜다. 1928년 중반 이후 1929년 후반기 초입까지인 첫 시기에는 두 가지 구도로 나타났다. 하나는 좌우의 분립구도이며, 또 하나는 좌파 내부의 화요파와 ML파의 분립구도였다. 그리고 두 번째 시기는 1929년 후반기에 나타난 것으로 화요파에 비해 상대적으로 ML파가 승세를 타면서 국제주의로 몰입하던 시기였다.386)김영범은 유일당운동이 좌초에 부딪치는 원인을 좌우분립구도로만 보아 왔던 김희곤의 견해를 진일보시켜 좌익진영 가운데서 화요파와 ML파의 갈등 구조를 세심하게 분석하여 추가시켰다. 따라서 본고는 1929년의 유일당운동에 대해 김영범의 연구성과를 참고한다(김영범, 앞의 글(1994), 127∼133쪽).

 먼저 유일당운동이 좌초에 부딪치는 첫 단계는 1928년에 나타났다. 그 하나의 요인은 좌우익 진영의 갈등이었다. 1927년 12월 광주에서의 공산주의 폭동사건387)이것은 1927년 12월 11일에 中國共産黨 廣東省委員會 지도하에 무장봉기하여 廣東市에 인민정권을 수립한 사건이다. 廣州公社라고도 하며 파리코뮌을 모방하여 광동코뮌이라 하였다. 중국공산당 중앙정치국원인 張太雷와 사관교육연대를 지휘하는 葉劍英 및 코민테른 대표인 26세의 하인츠 노이만 등이 지휘한 이 봉기는 13일 오후에 붕괴되고, 3일간의 혼란 끝에 무너졌다(佐伯有一·野村浩一 外 著, 吳相勳 譯,≪中國現代史≫, 한길사, 1980, 358쪽). 이래 한국인 공산당원이 상해로 도피해 오게 됨에 따라, 이들의 세력은 크게 확대되었다. 중국공산당의 지도하에 결집된 공산주의 청년들이 여기에 대거 가세하여 민족주의세력에 압박을 가하면서, “다수 공산계 청년회원을 가진 촉성회를 유인하여 임시정부 및 기타 제 단체를 통일하여 공산제하의 대단체를 건설하려고” 하였다.388)國會圖書館,≪韓國獨立運動史料(中國篇)≫, 633쪽. 여기에 국내에서 상해로 망명한 安光泉과 韓偉健의 경우나 광동에서 진출해 온 의열단의 세력도 덧붙여졌다. 이에 따라 1928년 중반에는 촉성회와 이의 전위적 청년단체인 중본한청은 좌우익세력의 결합이란 외적상태에도 불구하고 내적으로는 양분되는 형태를 띠게 되었다.

 민족주의세력과 사회주의세력은 동상이몽적인 자세를 갖고 있었다. 전자는 대당결성을 통한 민족운동계의 통일과 임시정부의 강화를 도모하고 나아가 새로운 돌파구를 찾고자 했다. 이에 반해 후자는 일시적 전술로 전선통일을 상정하고 자파 세력의 확산을 위해 노력했다. 그런데 후자는 전자에 비해 전략적인 면에서 비교적 주도면밀한 모습을 보였다. 이렇게 사회주의 세력이 강화되는 가운데, 촉성회는 민족운동을 위해서 결집된 조직이라는 당초의 목표와 강령과는 달리 서로의 세력을 확충 또는 방어하는 자세로 바뀌어 혼란을 거듭하게 되었다. 즉 1928년부터 나타난 좌우 분립구도는 “우익진영이 ‘전민일치’의 중앙집권적 대독립당 결성을, 좌익진영은 노농대중의 이해와 입장에 기초한 ‘전투적 협동전선’ 내지 ‘혁명적 통일전선’의 결성을 주창하면서 나뉘었다.”389)김영범, 앞의 글(1994), 128쪽.

 또 하나의 요인은 화요파와 ML파의 갈등이었다. 그것은 좌파 헤게모니 전략의 즉각 적용 여부를 둘러싼 분립 구도로 나타났는데, “화요파(중본한청)가 우파와의 ‘결합’을 우선시하여 그 적용을 유보했다면, ML파(재중한청)는 우파와의 ‘분리’와 헤게모니 전략의 상시적 및 즉각적인 적용을 강조하여 날카로운 대립을 보인 것이다.”390)위와 같음.

 좌파의 양대 세력이 분열 구도로 나서기 시작한 모습은 재중국한인청년동맹(이하 재중한청)의 성립에서부터 드러났다. 재중한청을 장악한 ML파가 이 동맹을 성립시킨 날(1928년 5월 27일) 보다 하루 앞선 26일에, 그것도 같은 지역인 길림성 반석현에서 조직방법론의 차이를 이유로 전민족유일당조직촉성회의를 결렬시킴으로써 일단 유일당운동에 찬물을 끼얹고, 이어서 상해를 중심한 중본한청의 장악으로 행로를 바꾸었다.

 재중한청의 주도권을 장악한 ML파는 상해의 중본한청을 장악한 화요파에 대해 공세를 취했다. 우선 중국 전역에 걸쳐 11개구로 된 지역단위를 설정하고, 상해를 중심한 관내지역을 제1구로 정했다. 그러면서 중본한청의 대표로 파견되었던 이관수를 상해로 귀환시키면서,391)원래 정원이 대표였으나 일제에 투항했고, 그 후임으로 파견된 인물이 이관수였다(金正明,≪朝鮮民族運動≫2, 338쪽). 상해에 ML파 중심의 재중한청 제1구 조직책임자로 지명했다. 이에 따라 중본한청의 공산계 중앙집행위원인 이관수는 재중한청의 일지대적인 활동을 하고자 이에 가입하고, 1928년 8월에 일방적으로 중본한청상해지부의 해체를 선언한 뒤,392)선언은 “… 정당의 조직 원칙 및 과거에 있어서의 쓰라린 경험과 조선의 현실에 따라 단체 본위의 봉건적·할거적 이론을 단연 배제함과 동시에 금후는 재중국한인청년동맹의 1지대로서 우리들이 다하지 못한 임무를 계속 수행하려고 함”이라고 주장했다(獨立運動史編纂委員會,≪獨立運動史資料集≫7, 1405쪽). 이어서 상해에서 재중한청 제1지구의 창립을 선언했다.393)秋憲樹,≪韓國獨立運動≫2, (延世大出版部, 1972), 94쪽. 이에 鄭泰熙·韓鎔 등은 그 선언을 반박하고 중본한청에서 이관수를 제명시켰다.394)獨立運動史編纂委員會, 앞의 책, 1410쪽. 이에 따라 촉성회의 전위조직인 중본한청에서 ML파가 이탈하고 우익진영과 화요파만 잔존하였다.

 1929년 후반기로 들면서 둘째 시기에 접어들었다. 그것은 앞의 구도에 또 다른 하나의 축이 중첩·부가되는 양상으로 나타났다. 그 새로운 축은 국제주의 대 민족주의의 대립 구도였다. 즉 코민테른이<12월테제>로 지령한 민족부르조아 세력과의 결별 요구를 좌익진영이 받아들여 유일당운동을 좌절시킨 것이었다.395)<12월테제>는 1928년 7월 17일부터 9월 1일까지 모스크바에서 열린 코민테른 제6회 대회에서 채택된 방침에 기초하여 그 해 12월에 작성되었다.<12월테제>가 발표될 당시 코민테른은 신간회를 결코 포기하지 않았지만, 실제로 국외에서 전개된 민족유일당운동에서는 그 자체에 대한 부정적인 움직임이 일어나고 있었다. ML계 조선공산당재건운동의 이론적 지도자인 한위건이 1929년 12월 1일, 天津에서 발간된≪階級鬪爭≫에 기고한 논문에서 “현재 조선○○주의운동 진영에는 신간회의 즉시 해체론이 일부에서 일어나고 있다”라고 한 것은 국외에서의 움직임을 지적한 것이었다(李鐵岳,<大衆的戰鬪的協同戰線の結成と新幹會及獨立促成會の任務>;李均永,≪新幹會硏究≫, 漢陽大 博士學位論文, 1990, 198쪽에서 재인용). 국제주의 노선을 강하게 띠고 있던 ML파의 논리와 태도가 종래 우파와의 결합을 우선시하던 화요파의 그것을 누르고 승세를 얻게 되었다. 특히 의열단도 ML파에 지지를 보냄으로써 우열은 확연히 드러났다.

 이러한 충돌은 특히 1929년 7월에 재중한청제1구상해지부가 발표한 격문에 의해 결정적으로 대두하였다. 그 격문 가운데는 “제군의 조국 소비에트

 러시아는 제국주의 강도군의 무력적 포위에 직면하였다”는 귀절이 있었다. 이에 대해 우익진영은 그 내용을 “모국을 팔아먹고 조상을 바꾸는 행위”라고 강렬하게 비판을 제기하였다.396)獨立運動史編纂委員會, 앞의 책, 1425∼1429쪽. 그때 우익세력과의 연합을 ML파보다 강하게 유지하고 있던 화요파는 그 동안의 대립적 관계를 넘어서서 결속을 도모하였다. 결국 좌파의 두 세력 모두가 좌익 국제주의 노선을 걷게 되었다. 즉 좌익의 두 세력은 민족주의에 대한 “국제주의의 논리를 내세워 코민테른-소련의 지도적 지위를 절대시하고, 그 권위를 맹목적으로 추종하는 풍조를 갖게 되었고, 이에 따라 결국은 좌우익의 전선분리”397)김영범, 앞의 글(1994), 128쪽.를 초래하였다.

 그 결과 유일당상해촉성회가 1929년 10월 26일에 해체되었다.398)<해체선언>은 1929년 11월에 발표되었지만 실제로 해체가 결의된 시일은 그보다 조금 앞선 10월 26일이었다. 상해에서도 만주의 전민족유일당촉성회의와 마찬가지로 조직방법론상의 문제를 제기한 것이<해체선언서>에서 내세운 표면적인 이유였다.399)國會圖書館,≪韓國獨立運動史料(中國篇)≫, 635쪽. 이 선언문은 관내촉성회가 성립된 후 만주에서는 독립당의 조직 방법문제를 둘러싸고 분열되어 유일독립당의 산출이 불가능하게 되었다고 했다. 또 이 선언은 一國의 혁명을 지도할 대당의 결성은 구체적인 조건 아래에서 대중적 공동투쟁을 통하여야만 결합할 수 있다고 하고, 시대의 추이로 볼 때 유일당이냐 아니면 협동전선이 필요한가라는 문제가 논의되어야 한다고 하면서 ‘민족유일당론’의 단계가 아닌 ‘대중적 협동전선론’을 주장했다.400)이 문제는 앞에서도 본 것처럼 신간회에 대한 안광천·한위건의 이론과 그 궤를 같이하는 것이었다.

 1929년 10월 26일에 상해촉성회 해체를 결의하기 위한 모임이 프랑스 조계의 斜橋에 있던 惠中學校의 대강당에서 열렸다.401)이 학교의 이름을 ‘斜橋中學校’라고 기록한 경우도 있으나, 현지에서 확인한 바로는 프랑스 조계의 斜橋에 있던 惠中學校가 옳다. 이 학교는 현재 李惠利中學校가 되어 있다(金喜坤,≪중국관내 한국독립운동단체연구≫, 지식산업사, 1995, 274쪽). 이 회의에 참석한 대표적인 인물은 사회를 맡은 崔昌植을 비롯하여 洪南杓·黃勳·具然欽·郭憲·鄭泰熙·李敏達·崔鳳官·曺奉岩·金元植(金炯善)·李東寧·金枓奉·趙琬九 등 좌우파를 대표한 인물이었다.402)國會圖書館,≪韓國獨立運動史料(中國篇)≫, 638쪽.
<外務省警察史 支那之部>(≪朝鮮民族運動史≫(未定稿)6, 고려서림, 1989), 618쪽.
그렇지만 대다수의 인물이 좌파세력의 대표들이었고,403)이들 가운데 홍남표·황훈·구연흠·곽헌·정태희·이민달·최봉관·조봉암·김원식(김형선)·김두봉 등이 좌파세력이었다. 이들의 대다수가 이르쿠츠크·화요회계열인데, 뒤에 언급하겠지만, 동일한 자리에서 열린 유호동맹 창립과정에는 ML계열인 黃俊(韓偉健)의 참석과 鄭栢이 위원으로 선임된 사실이 확인된다(<外務省警察史 支那之部>(≪朝鮮民族運動史≫(未定稿)6, 고려서림, 1989), 619쪽).
당시의 성향으로 김두봉과 정태희는 중도좌파적인 성향을 보이고 있었다. 김두봉은 1920년대에 임시정부 중심의 우파세력과 밀접한 관계를 유지하였고, 유호동맹의 결성 직후인 1930년 1월에 우파세력의 결집체로 조직되는 한국독립당에 가담하였다. 그리고 정태희는 1920년대에 줄곧 민족주의계열에서 활동했으나, 유호동맹에 가담하는 무렵에는 공산주의자로 나타난다. 그가 언제부터 공산주의자로 전향하였는지에 대해 확실하지는 않지만, 대체로 중국본부한인청년동맹을 거치는 과정에서 이루어진 것이 아닌가 하는 추정을 해본다.
그것도 화요파와 ML파의 양 세력이 동참한 가운데 이루어졌다.404)이러한 사실은 유호동맹의 기관지인≪앞으로≫의 창간호 가운데<독립당촉성회의 해체와 독립운동자연맹의 창립경과>라는 기사에 해체안이 만장일치로 통과되었고, 잔무처리위원으로 洪南杓·朴仁煥·鄭臺寅 등이 선출되었으며, 그 자리에서 좌파 단체인 유호동맹이 조직된 내용으로 알 수 있다(國會圖書館,≪韓國獨立運動史料(中國篇)≫, 638쪽). 참석자 가운데 이동녕과 조완구만이 우파인사인 셈이었다. 이 모임에 우파세력 가운데 오직 이동녕과 조완구의 2명만이 참가한 이유는 분명하지 않다. 물론 당시에 임시정부의 주석 겸 법무장을 맡고 있던 이동녕이 참석함으로써 그 비중은 컸다고 하겠지만, 사실상 유일당운동에 있어 가장 중심인물이었던 안창호나 임시정부의 내무장이면서 실세로 부각된 김구 등이 참석하지 않았던 점으로 미루어 볼 때, 이미 우파세력은 좌파세력의 동향을 파악하고서 의례적인 대표만 참석하도록 했던 것으로 여겨진다. 이들은 그 자리에서 사회자인 최창식의 주도로 상해촉성회의 해체를 결의하였으니,405)최창식에 대한 일본 관헌의 기록에는 그가 해체과정을 주도했던 것으로 정리하였다(<外務省警察史 支那之部>,≪朝鮮民族運動史≫(未定稿)6, 고려서림, 1989, 618쪽). 이로써 상해지역의 좌우합작운동은 일단락을 짓게 되었다.

 상해촉성회가 해체되면서 유일당운동은 일단 멈추었다. 그 자리에서 좌파는 留滬韓國獨立運動者同盟(滬:상해의 별칭)을 조직하였다. 그러자 3개월 뒤인 1930년 1월 25일에 임시정부 중심의 우파세력은 한국독립당을 결성하였다. 결국 좌우합작을 통한 유일당 결성이라는 꿈은 깨어지고 각각의 조직으로 분립되었는데, 우파는 전체를 통합한 대혁명당은 아니지만 일단 정당체를 결성하는 데 이르렀다. 이것은 조직 성격상으로 발전한 것이라 규정할만하다. 1920년대 전반을 거쳐오면서 독립운동의 조직이 의열투쟁 단체라거나 임시정부 지원을 도모하는 단체 등이 있었지만, 임시정부 자체를 경영해 나갈 정당조직이 없었고, 때문에 정당 결성을 위한 노력이 되풀이 되었는데, 그 결실이 이때 와서 비로소 맺어진 것이다. 다만 아쉽게도 단일당·민족대당·대혁명당은 아니었다는 데 한계가 있다.

 그렇지만 합작을 위한 노력이 완전히 종결된 것은 아니었다. 한국독립당이 채택한 이념에 경제·사회 분야에서 사회주의 요소를 표방함으로써 장차 좌파세력과 만날 수 있는 공간을 마련해 두기도 했다. 그래서 유일당운동은 1933년 한국대일전선통일동맹이 추진되면서 다시 부활의 길을 걷게 되고, 그 중심에 임시정부가 존재했다. 더러는 ‘정부’라는 이름에 걸맞기도 하고, 또 더러는 이름 값에 미치지 못하는 경우도 있었지만, 임시정부는 광복을 맞을 때까지 항상 민족운동세력의 통일운동에서 핵심에 놓여 있게 된다.

<金喜坤>

개요
팝업창 닫기
책목차 글자확대 글자축소 이전페이지 다음페이지 페이지상단이동 오류신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