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편 한국사
  • 근대
  • 48권 임시정부의 수립과 독립전쟁
  • Ⅲ. 독립군의 편성과 독립전쟁
  • 1. 독립군의 편성과 국내진입작전
  • 1) 시대적 배경

1) 시대적 배경

 한국독립운동의 일대 분수령이 된 1919년의 3·1운동은 독립군 편성과 독립전쟁의 계기가 되었다. 한민족의 저력은 3·1운동에서 엄청난 규모로 분출되었지만, 전 민족이 갈망하던 독립은 이룩되지 않고 일제의 탄압과 감시만 더욱 강화될 뿐이었다. 이와 같은 상황에서 3·1운동에 참여하였던 인사들은 일제의 감시를 피해 새로운 독립운동의 방향을 모색코자 서북간도와 연해주, 상해와 북경, 그리고 미주 등 해외 각지로 탈출하였다.

 3·1운동 직후 국내외의 민족지사들은 강력한 무장투쟁만이 일제로부터 민족이 해방될 수 있는 유일한 방편임을 절감하고 있었다. 이와 같은 인식은 민족해방운동의 방편으로서의 평화적인 만세시위운동이 갖는 한계를 절감한 결과이기도 하다. 그리하여 1910년 국치 전후부터 민족운동자들은 그동안 국외 독립운동의 주된 사조였던 ‘독립전쟁론’의 구현을 위해 총력을 기울였던 것이다.

 한편 1894년 청일전쟁 이후 개시된 의병항전은 전국적 규모로 확대 고조되는 1907년 이후가 되면 북한지역을 비롯해 압록·두만강 대안의 간도와 연해주지역에까지 확대되어 활발하게 전개되었다. 의병은 국망에 직면한 절박한 시대상황에서 일제 침략세력을 축출하고 국권을 회복하기 위한 집요하고도 처절한 항일전을 수행하였다. 그러나 1908년 하반기 이후 수년 동안 일제의 탄압이 가중되는 상황에서 전력이 고갈된 이들 의병은 새로운 항전 방향을 모색하고 근거지를 구축, 지속적인 항일투쟁을 위해 간도와 연해주 등지로 넘어간 것이 일반적 경향었이다. 제천의병장 柳麟錫을 비롯해 李鎭龍·趙孟善·朴長浩·白三圭·趙秉準·全德元 등의 양서지역 의병장, 洪範圖·車道善 등의 함경도 의병장 등이 그러한 경향을 보여주는 두드러진 인물들이다. 그 가운데 망명 직후 홍범도 의병의 경우, 일제측의 한 기록에서는 “500명이 전원 무장을 하고 매월 15∼17일간씩 훈련하는 한편, 항전준비를 서두르고 있었으며 … 국내 일반 군경의 배치현황을 조사하기 위하여 39명의 密査班을 파견하고 있다”고 지적함으로써 재기항전에 대한 노력과 열망을 잘 보여주고 있다.406)윤병석,≪한국독립운동의 해외사적탐방기≫(지식산업사, 1994), 32∼33쪽. 결국 이러한 의병의 북상 세력은 국망 이후 1919년 3·1운동을 계기로 항일무장투쟁사의 새로운 장을 열게 되는 독립군의 모태가 되면서 민족운동의 새로운 방향을 제시하게 되었던 것이다.407)朴敏泳,≪大韓帝國期 義兵硏究≫(한울, 1998), 360쪽.

 또 3·1운동 이후 독립운동의 여건변화에 능동적으로 대처하기 위해 서북간도의 한인단체들도 새로운 변신을 시도하였다. 국치 이후 북간도의 대표적인 한인자치 단체였던 墾民會가 大韓國民會로, 서간도의 扶民團이 韓族會로 각기 확대 개편되어 그 산하에 독립군단을 편성하고 군비확충과 군사훈련에 진력한 것이 그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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