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편 한국사
  • 근대
  • 48권 임시정부의 수립과 독립전쟁
  • Ⅲ. 독립군의 편성과 독립전쟁
  • 1. 독립군의 편성과 국내진입작전
  • 2) 독립군의 편성
  • (1) 북간도지역

가. 대한군정서

 북간도지역에서 편성된 여러 독립군단 가운데 가장 먼저 들 수 있는 것은 大韓軍政署(일명 북로군정서)이다. 대한군정서는 국치 직후에 조직된 대종교의 重光團이 발전한 것이다. 북간도 일대에서 활동하던 徐一 등의 대종교 인사들은 국망 전후 북상도강을 단행하였던 항일의병을 규합하여 1911년 3월에 汪淸縣에서 독립운동 단체인 중광단을 조직하였다.

 중광단은 1919년 3·1운동을 계기로 독립전쟁을 표방하고 만주 일대의 대종교 신도와 북상한 의병 및 공교회원 등을 규합하여 正義團으로 확대 발전되었다. 독립군단으로 편성된 정의단은 1919년 8월 軍政會로 다시 명칭을 변경하고 왕청현 春明鄕 西大坡에 본영을 두었다. 이어 군정회는 같은 해 10월 軍政府로, 그리고 12월에는 상해 임시정부의 명령에 복종키로 하고 임시정부 <국무원령>205호에 의하여 大韓軍政署로 다시 명칭을 바꾸어 임시정부 산하의 중요 군단이 되었다. 대한군정서는 서간도에서 李相龍·池靑天 등의 주도로 편성된 서로군정서와 구분하기 위하여 북로군정서로 불렀다.

 대한군정서에서는 金佐鎭과 같은 유능한 지휘관을 군사령관으로 맞이하고 士官練成所까지 설치해 무관 양성에 전력하였다. 일제측에서는 대한군정서가 청산리대첩 직전인 1920년 8월 중순 현재 독립군 약 1,200명에 소총 1,200정, 탄약 24만 발, 권총 150정, 수류탄 780발, 기관총 7정 등 막강한 전력를 보유한 것으로 파악하였다.409)≪獨立軍團名簿≫(국가보훈처, 1997), 20쪽.

 대한군정서는 중광단 시절부터 근거지로 삼아온 왕청현 춘명향 楡樹川(德源里)에다 총본부격인 총재부를 두었으며, 춘명향 서대파(十里坪)에는 군사령부를 두었다. 청산리대첩 직전의 핵심 간부진으로는 서일이 총재, 玄天黙이 부총재를 맡았으며, 그 휘하에 서무부장 任度準, 재무부장 桂和, 참모부장 李章寧 등이 있었다.

 대한군정서의 사관연성소는 1920년 3월 왕청현 십리평에서 정식으로 개교하였다. 개교 당시 생도수는 60여 명에 불과하였으나 그 뒤 입교생이 계속 늘어나 같은 해 9월 289명의 제1회 졸업생을 배출할 수 있었다. 대한군정서의 사령관인 김좌진이 연성소장을 겸직하였고, 그 아래에 사령부 부관 朴寧熙가 학도단장을 맡았으며 교관 李章寧·李範奭·金奎植·金弘國·崔尙云 등이 생도훈련을 담당해 정예군을 양성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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