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편 한국사
  • 근대
  • 48권 임시정부의 수립과 독립전쟁
  • Ⅲ. 독립군의 편성과 독립전쟁
  • 1. 독립군의 편성과 국내진입작전
  • 2) 독립군의 편성
  • (2) 서간도지역

가. 서로군정서

 서간도지역에서도 북간도와 마찬가지로 3·1운동 직후부터 여러 독립군단이 편성되어 독립전쟁을 표방하고 활동하였다. 그 가운데 가장 먼저 들 수 있는 독립군단으로는 西路軍政署가 있다.

 서로군정서는 국치 이후 서간도지역의 대표적인 한인결사였던 扶民團이 3·1운동 직후 확대 개편된 韓族會를 모체로 한 것이다. 국치 이후 柳河縣과 通化縣을 중심으로 한인들의 자치를 신장하는 한편 新興學校를 설립하는 등 무장항일전을 준비해온 부민단은 제1차 세계대전 종결과 3·1운동을 계기로 변화된 시대상황에 순응키 위해 조직을 대대적으로 확대 개편한 결과 1919년 3월 13일 한족회를 결성하기에 이르렀다. 한족회의 중앙총장은 李沰이 맡았으며, 기관지로≪韓族新報≫를 발간하였다. 국내외에서 전개되는 모든 독립운동을 지도 통제할 중앙정부의 건립에 최고목표를 두었던 한족회는 우선 일제와의 독립전쟁을 수행할 주체로서의 군정부 건립에 착수하였다. 그러나 1919년 4월 독립운동의 최고기관으로 상해 임시정부가 수립되었으므로, 한족회는 그 산하에서 군정부의 역할을 담당하기로 하고 서로군정서로 명칭을 변경하였던 것이다.422)≪獨立新聞≫, 1920년 4월 22일,<大韓軍政署略史>. 서로군정서의 최고 책임자인 독판에는 李相龍이 선임되었으며, 그 아래에 부독판 呂準, 정무청장 李沰, 참모부장 金東三, 사령관 池靑天 등이 간부진을 구성하고 있었다.

 서로군정서는 1919년 5월 신흥학교를 신흥무관학교로 바꾸고 독립군 간부 양성에 주력하였다. 신흥무관학교는 통화현 哈泥河에 본교를, 그리고 통화현 快大帽子와 유하현 孤山子 등지에 분교를 두었다. 초대 교장은 李世榮이었으며 연성대장은 지청천이 맡았고, 교관으로는 吳光鮮·申八均·李範奭·尹擎天 등이 있었다. 교반 편성은 하사반과 장교 및 특별훈련반으로 나누어 하사관 3개월, 장교 6개월, 일반 사병 1개월 과정으로 이루어져 있었으며, 1919년 11월까지 3천 5백여 명의 독립군을 양성하였다. 이를 기반으로 정예부대를 편성한 서로군정서는 압록강 대안의 강계·삭주 등지로 국내진입작전을 벌이는 등 본격적인 대일전을 전개할 수 있었다.423)尹炳奭 외, 앞의 책, 242·276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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