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편 한국사
  • 근대
  • 48권 임시정부의 수립과 독립전쟁
  • Ⅲ. 독립군의 편성과 독립전쟁
  • 1. 독립군의 편성과 국내진입작전
  • 3) 국내진입작전의 전개
  • (1) 독립군의 전력강화

(1) 독립군의 전력강화

 3·1운동을 계기로 만주와 연해주 각지에서 독립군이 본격적인 항일전에 돌입하게 되자 상해 임시정부는 1919년 말 “독립전쟁의 최후수단인 전쟁을 대대적으로 개시하여 규율적으로 진행하고 최후 승리를 지시하기 위하여” 독립전쟁의 ‘준비’를 선언하기에 이르렀다. 이에 임시정부는 독립군단의 편성과 정비, 군인모집과 군사훈련, 군비확충 등을 가장 중요한 시정목표로 설정하고 이를 실행하기 위해 다각적인 노력을 기울이게 된다.431)國史編纂委員會 編, 앞의 책, 282쪽.

 수립 초기 임시정부의 독립전쟁에 대한 경도와 시정노선의 방향설정 경향성은 이 무렵 임정의 실질적 지도자였던 안창호가 1920년 정초에 행한 다음과 같은 연설을 통해서도 그 일단을 충분히 감지할 수 있다.

우리 당면의 대문제는 우리 독립운동을 평화적으로 계속하려는 方計를 고쳐 전쟁하려 함이요 … 진실로 우리는 시기로 보든지 의리로 보든지 아니 싸우지 못할 때라고 단정하시오. … 군사적 훈련을 아니 받는 자는 국민개병주의에 반대하는 자요 국민개병주의에 반대하는 자는 독립전쟁에 반대하는 자요 독립전쟁에 반대하는 자는 독립에 반대하는 자요(≪獨立新聞≫제35호, 1920년 1월 8일,<우리 국민이 斷定코 실행할 六大事>).

 독립군은 일제와의 독립전쟁 결행에 즈음해 3·1운동으로 고양된 독립의지에 충만해 있었다. 홍범도 등의 명의로 발표된<喩告文>중에서 “당당한 독립군으로 몸을 砲煙彈雨 중에 던져 반만년 역사를 광영되게 하며 국토를 회복하여 자손만대에 행복을 줌이 우리 독립군의 목적이요 또한 민족을 위하는 본의다”라고 밝힌 대목은 당시 독립군의 이와 같은 기상과 포부를 잘 드러낸 것이다.432)≪獨立新聞≫, 1920년 1월 13일,<喩告文>. 임시정부 군무부에서도 1920년 1월 “충용한 대한의 남녀여, 혈전의 時, 광복의 秋가 來하였도다. 너도 나아가고 나도 나아갈지라. 정의를 위하여 자유를 위하여 민족을 위하여 銃과 血로써 조국을 살릴 때가 이 때가 아닌가”라고 하는<포고>제1호를 발하여 독립전쟁의 개시를 선언하며 독립군의 사기를 독려하였다.433)≪獨立新聞≫, 1920년 2월 10일,<軍務部布告>. 또 아래에 소개하는<독립군가>는 이처럼 늠름한 독립군의 기상과 충만한 사기를 응축한 결정체였다.

나아가세 독립군아 어서 나가세   기다리던 독립전쟁 돌아왔다네

이때를 기다리고 10년 동안에    갈았던 날랜 칼을 시험할 날이

나아가세 대한민국 독립군사야   자유 독립 광복할 날 오늘이로다

정의의 태극깃발 날리는 곳에    적의 軍勢 낙엽같이 쓰러지리라

 

보느냐 반만년 피로 지킨 땅    오랑캐 말발굽에 밟히는 모양

듣느냐 이천만 檀祖의 血孫     원수의 칼 아래서 우짖는 소리

양만춘 을지문덕 피를 받았고    이순신 임경업의 후손 아니냐

나라 위해 목숨을 터럭과 같이   싸우던 네 조상의 후손 아니냐

 

탄환이 빗발같이 퍼붓더라도    창과 칼이 네 앞을 가로막아도

대한의 용장한 독립군사야     나아가고 나아가고 다시 나가라

최후의 네 핏방울 떨어지는 날   최후의 네 살점이 떨어지는 날

네 그리던 조상나라 다시 살리라  네 그리던 자유꽃이 다시 피리라

 (≪獨立新聞≫제47호, 1920년 2월 17일).

 독립군이 전쟁에서 승리하기 위해서는 충만한 투지 외에 현실적 조건으로 군비조달과 무기구입 및 군사훈련 등과 같은 전력증강이 절급한 과제였다. 그 가운데서도 총기와 탄약 등의 화력증강이 무엇보다 우선되었다. 만주 독립군이 사용하던 무기는 대부분 제1차 세계대전중 시베리아에 출병한 체코군대로부터 구입해 온 것이었으며, 여기에 소요된 자금은 만주와 연해주, 그리고 국내 동포가 헌납한 군자금이었다.

 독립군의 무기는 실로 다양하였다. 일반 군총으로는 러시아제 5연발총과 단발총이 주종을 이루었고, 그밖에도 미국제나 독일제, 심지어는 일제 총까지 섞여 있었다. 권총류로는 루가식을 비롯해 7연발식·남부식 등이 사용되었다. 그리고 중무기로는 기관총과 속사포를 보유하고 있었다. 뿐만 아니라 폭탄이라 부르던 수류탄을 구입하는 경우도 많았다. 서로군정서의 경우, 청산리대첩 직전에 약 400명의 무기 운반대원을 중·러 국경의 三岔口 방면으로 파견해 1인당 각각 총기 4정씩을 휴대하여 모두 1,600정의 총기를 반입함으로써 화력증강을 꾀하였다.434)독립운동사편찬위원회 편,≪독립운동사자료집≫10, 193∼194쪽. 전체적으로 독립군이 확보한 무기의 종류와 양이 구체적으로 얼마나 되었는지는 명확하지 않지만, 1920년 8월 경 작성한 일제의 한 정보기록에서는 군총 3,300정, 탄약 19만 5,300발, 권총 730정, 수류탄 1,550개, 기관총 9정 등의 화력을 독립군이 확보한 것으로 파악하였다.435)尹炳奭,≪獨立軍史≫(지식산업사, 1990), 136쪽.

 독립군은 화력증강과 함께 군사훈련에도 주력하였다. 독립군 훈련을 실시하던 대표적인 기관이 북간도의 사관연성소와 서간도의 신흥무관학교였다. 사관연성소 생도의 경우, 매일 5시간 이상 집중적인 집총훈련을 받았으며, 22.5 Kg(6관)의 모래가 든 무거운 배낭을 메고 완전무장한 채 산야를 구보 혹은 행군하며 전술을 익히는 고된 군사교련을 받았다. 아울러 매일 2회 독립사상 함양과 민족의식 고취를 위한 정신교육도 병행하였다. 서간도의 신흥무관학교에서도 보병·기병·포병·공병 등의 기본과목과 총검술·격검·전술·편제학 등의 교과목을 가르쳤으며, 넓은 연병장에서 각개 교련과 기초 훈련을 실시하는 등 강인한 군사훈련을 실시하고 있었다.436)독립운동사편찬위원회 편,≪독립운동사자료집≫10, 23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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