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편 한국사
  • 근대
  • 48권 임시정부의 수립과 독립전쟁
  • Ⅲ. 독립군의 편성과 독립전쟁
  • 1. 독립군의 편성과 국내진입작전
  • 3) 국내진입작전의 전개
  • (2) 국내진입작전

(2) 국내진입작전

 1919년 3·1운동 발발 이후부터 서북간도의 독립군은 압록강·두만강 국경 부근으로 접근하여 국치 이래 10년간의 염원이던 국내진입작전에 돌입하였다. 이렇게 시작된 국내진입작전은 1919년 8월 무렵부터 본격화되기에 이르렀다.

 독립군의 공격이 임박해지자 일제는 이를 차단하기 위해 국경지대에 군대와 경찰을 증파 배치시켜 철저한 경계태세에 들어갔다. 일제는 부·군 단위로 1개 경찰서를 두는 것이 상례였는데, 함북·함남·평북의 국경 3도의 경우에는 예외였다. 즉 함북에는 11개 군에 경찰서 19개, 파출소 6개, 주재소 130개, 출장소 42개를, 함남에는 16개 군에 경찰서 20개, 파출소 6개, 주재소 180개, 출장소 12개를, 평북에는 19개 군에 경찰서 24개, 파출소 5개, 주재소 195개, 출장소 84개를 설치해 놓고 이른바 국경수비에 만전을 기하고 있었던 것이다.437)김의환,<독립군의 편성과 국내작전>(국사편찬위원회 편,≪한민족독립운동사≫4, 1988), 60쪽.

 독립군의 국내진입작전을 선도한 인물은 명장 홍범도였다. 그가 인솔하던 대한독립군은 일제의 삼엄한 ‘국경수비망’을 뚫고 1919년 8월 국내로 진입, 압록강변의 혜산을 점령하고 갑산 공략을 계획하기도 하였다. 이어 1919년 9월에도 독립군 한 부대가 갑산군 同仁面의 含井 주재소 등 일제 식민지기관을 공격하였다.

 홍범도는 1919년 9월에 李範允·黃炳吉 등의 독립군 지도자들과 연락을 취하며 백두산 부근에 근거지를 두고 다방면에서 대규모 국내진입작전을 전개할 계획을 세워 놓고, 이를 상해 임시정부에 보고하였다. 당시 임시정부를 주도하던 안창호는 이에 대해 시기상조를 이유로 1919년 11월까지 계획을 연기하라는 회신을 보냈다.438)姜德相 編,≪現代史資料≫26, 275쪽.
독립운동사편찬위원회 편,≪독립운동사자료집≫10, 252쪽.
그러나 홍범도는 임정의 이러한 권고를 따르지 않고 다음달인 10월에는 압록강을 건너가 강계와 만포진을 점령하였으며 자성에서는 일본군과 격전 끝에 ‘70여 명을 살상하는’ 큰 전과를 올렸다.439)≪朝鮮民族運動年鑑≫(在上海日本領事館, 1932), 1919년 10월 24일,<江邊八郡臨時交通局報告>. 이는 곧 3·1운동 이후 독립군이 수행한 국내진입작전에서 거둔 최초의 큰 승첩이었다.440)尹炳奭 외, 앞의 책, 110∼111쪽.

 독립군의 국내진입작전은 1920년에 들어와 더욱 활발해졌다. 홍범도를 비롯해 최진동·안무·김좌진 등이 지휘하는 독립군은 수시로 국내진입작전을 펼쳤다. 그 가운데서도 1920년 2월초 상해 임시정부에 들어온 미국 워싱턴발 로이터통신에 의하면 볼셰비키로부터 무기를 공급받은 2,000명의 독립군은 吉林으로 내려와 국내진입작전을 펼쳐 일본군 ‘某軍營’을 야습한 것으로 보도했다. 이 보도에 따르면 이때 독립군은 일본군을 무려 300명이나 사살하고 400명을 괴주시켰으며 會寧을 점령한 듯하다고 기록하였다.441)≪獨立新聞≫, 1920년 2월 17일,<二千의 獨立軍이>. 이 부대의 실체나 전투 사실은 확인되지 않지만, 이 무렵 독립군이 활발히 활동하고 있던 정황을 짐작케 한다. 독립군의 국내진입작전이 활발해진 뒤인 1920년 3월에 작성된 일제측의 정보자료에 의하면, 그해 1월부터 3월까지 3개월간 독립군이 수행한 국내진입작전은 총 24회에 달하고 있다.442)姜德相 編,≪現代史資料≫27, 647∼648쪽. 또 임시정부 군무부는 3월부터 6월초까지 독립군이 전후 32차례의 유격전을 전개했고, 일제 관공서를 파괴한 것이 34개소에 달했다고 발표하였다.443)≪獨立新聞≫, 1920년 12월 25일,<北墾島에 在한 我獨立軍의 戰鬪情報>.

 독립군이 결행한 수많은 작전 가운데서도 특히 1920년 3월에 벌어진 온성전투는 특기할 만하다. 3월 15일 독립군 200여 명이 두만강을 건너 온성군 柔浦面 豊利洞 주재소를 공격하면서부터 시작된 온성전투는 거의 3월 말까지 지속적으로 반복 수행되었다. 특히 18일에 벌어진 온성군의 美山 헌병감시소 기습전은 독립군의 조직적 작전능력을 과시한 전투였다. 이날 새벽 두만강을 건너 온성군 美浦面의 長德洞과 月坡洞·豊橋洞 등지를 분산 공격한 독립군 소부대들은 50명씩 합세하여 미산 헌병감시소 전방 고지 성벽을 점거한 뒤 일제 헌병 및 경찰과 50분 동안 치열한 교전을 벌인 끝에 이들을 섬멸시켰다. 이들 독립군은 부근에 주둔하고 있던 일본군 본대와 온성경찰서 경찰대가 도착하기 전에 무사히 강을 건너 돌아왔다.444)姜德相 編,≪現代史資料≫27, 619∼624쪽.
독립운동사편찬위원회 편,≪독립운동사자료집≫10, 270∼271쪽.
미산 헌병감시소를 공격하던 18일에 또 다른 독립군 200명은 온성읍을 공략하기 위해 새벽 5시 경 온성 대안의 凉水泉子에서 두만강을 건너려 하였으나 일제 군경에게 탐지되어 작전을 중단하였다. 또 같은 날 오전에는 독립군 30명이 일제 경찰대와 교전을 벌이기도 하는 등 온성 일대에서 독립군의 활약이 크게 두드러졌다.

 일제는 온성전투에서 보여준 독립군의 탁월한 전력에 큰 충격을 받았던 것으로 보인다. 일제 군경의 상부 보고서에서 “일시 경찰 헌병의 전멸을 의심케 하였다”라든가, “(독립전쟁의) 위험성의 일단을 폭로한 것” 등으로 기술한 대목은 그와 같은 정황을 짐작케 한다.445)尹炳奭,≪獨立軍史≫(지식산업사, 1990), 131∼132쪽.
독립운동사편찬위원회 편,≪독립운동자료집≫10, 270쪽.

<朴敏泳>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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