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편 한국사
  • 근대
  • 48권 임시정부의 수립과 독립전쟁
  • Ⅲ. 독립군의 편성과 독립전쟁
  • 2. 봉오동승첩과 청산리대첩
  • 1) 봉오동승첩
  • (2) 봉오동승첩

(2) 봉오동승첩

 두만강 변경지대에서 전개한 독립군의 연이은 국내진입작전에 충격을 받은 일제는 북간도의 독립군 근거지를 수색, 탄압하기 위해 대병력을 동원하기에 이르렀다. 이른바 越江追擊大隊의 편성이 그것이다. 즉 함북 경성군 羅南에 사령부를 두고 두만강을 ‘수비’하던 일본군 제19사단은 三屯子에서의 참패를 설욕하고 독립군을 ‘토벌’하기 위해 ‘월강추격대대’를 편성, 불법으로 중국령 북간도를 침범하고자 하였다. 安川 소좌가 인솔하던 월강추격대대의 편성 내역은 다음과 같다.447)<安川追擊隊ノ鳳梧洞附近戰鬪詳報>(독립기념관 소장), 三. 彼我兵力.

보병 제73연대 제10중대(神谷 대위 휘하 70명의 혼성중대)

     기관총 1소대(紫山 준위 이하 27명)

보병 제75연대 제2중대(森 대위 이하 123명)

헌병대(小原 대위 이하 11명)

경찰대(葛城 경시 이하 11명)

 여기에는 또한 삼둔자전투에서 참패를 당한 新美 중대도 합류함으로써 대부대로 편성되어 있었다. 6월 7일 새벽 온성군 下灘洞에서 도강을 완료한 일본군은 독립군의 주요 근거지인 鳳梧洞을 향하면서 작전을 개시하였다.

 봉오동은 지금의 도문시에서 서북쪽으로 15리 떨어져 있으며 동북방으로 뻗은 25리에 달하는 긴 골짜기이다. 봉오동 계곡으로는 실개천이 흐르고 있으며, 골짜기 어구로부터 8리 떨어진 곳에 초모자 형의 높은 산이 있어 중국인은 이곳을 草帽頂子라 불렀다. 1920년 당시 봉오동에는 하촌·중촌·상촌 등 3개 한인마을이 자리잡고 있었다. 하촌에는 최진동 일가를 중심으로 15호, 중촌은 80여 호, 북골과 남골로 된 상촌은 60여 호의 인가로 이루어져 있었다. 이러한 봉오동은 지리적으로나 경제적으로 모두 독립군의 근거지로서 적합한 곳이었다. 봉오동의 남쪽으로는 고려촌·安山村·恢幕洞(도문)·삼둔자 등의 마을들과 연계되어 있었으며, 서북쪽으로 40여 리 북상하면 대한군정서 소재지인 西大坡가 나오고, 서남쪽으로 16리 지점에 대한신민단의 근거지인 石峴이 있고, 북쪽으로 40여리 지점에 대한광복단의 근거지인 大坎子가 있었다. 봉오동은 동·서·북 삼면이 모두 산으로 둘러싸여 난공불락의 천연요새와도 같았다.448)金春善,<1920年代 韓民族反日武裝鬪爭硏究에 관한 再照明>(≪韓民族獨立運動史論叢≫, 朴永錫敎授華甲紀念論叢刊行委員會, 1992), 566∼567쪽.

 홍범도를 총지휘관으로 하는 대한독립군과 신민단, 그리고 군무도독부 연합부대는 일본군의 침공에 대비해 주민들을 미리 산중으로 대피시켜 놓고 만반의 임전태세를 갖추고 있었다. 곧 홍범도는 험준한 사방 고지에 독립군 각 중대를 매복시켜 놓은 다음 일본군을 포위망 속으로 유인해 섬멸시킨다는 작전을 세웠던 것이다.

 미리 세워놓은 작전계획에 따라 李化日이 인솔하는 독립군 소부대는 이날 새벽 미리 봉오동 밖의 고려령 북편 고지로 출동하여 유인작전을 수행하고 있었다. 심야에 이화일 부대의 기습을 받은 일본군은 전열이 흐트러지는 등 제대로 응전치 못하고 고전하였다. 날이 밝아서야 전열을 재정비한 일본군은 부상병을 柔遠鎭으로 후송시키는 한편 부근 촌락을 수색하면서 오전에 봉오동 입구로 들어왔다.

 봉오동 하촌으로 들어온 일본군은 최진동의 집을 비롯한 마을 전체를 유린하여 미처 피난하지 못한 노약자를 살륙하는 만행을 저질렀다. 이들은 다시 중촌을 지나 오후 1시 경 상촌을 향해 진입하기 시작하였다. 일본군 전위부대가 사방 고지로 둘러싸여 있는 상촌 남쪽 300m 지점의 琵琶洞 방면으로 가는 갈림길까지 진입함으로써 독립군의 포위망 속으로 들어왔으나 매복 사실을 눈치채지 못하고 있었다. 곧이어 주력부대도 기관총대를 앞세우고 역시 독립군의 포위망 속으로 깊숙히 들어오게 되었다.

 일본군 본대가 포위망 속으로 완전히 들어왔을 때 사령관 홍범도는 총 공격을 알리는 신호탄을 발사하였다. 삼면 고지에 매복하고 있던 독립군은 동시에 집중사격을 개시하였다. 불의의 기습공격을 받은 일본군은 필사적으로 포위망 탈출을 시도하는 한편 응전을 시도하였다. 그러나 유리한 지형을 차지한 독립군의 맹렬한 공격에 예봉이 꺾인 일본군은 시간이 흐를수록 사상자만 속출할 뿐이었다. 독립군의 완전한 포위망 속에서 3시간을 버틴 일본군은 드디어 퇴각하기 시작하였다. 이때 독립군의 제2중대장 姜尙模는 부하들을 이끌고 패퇴하는 일본군을 추격해 다시 큰 타격을 가하였다.449)≪獨立新聞≫, 1920년 12월 25일,<北墾島에 在한 我獨立軍의 戰鬪情報>. 이것이 유명한 봉오동승첩의 전말이다.

 봉오동에서 독립군이 일방적 압승을 거둔 사실은 한·중·일의 여러 관련 자료나 정황으로 보아 의심의 여지가 없다. 그러나 전과에 대해서는 자료마다 큰 차이를 보여 그 실상을 명확히 확인하기는 쉽지 않다. 상해 임시정부의 군무부는 독립군측의 전과를 일본군 사살 157명, 중상 200여 명, 경상 100여 명에 달하는 것으로, 그리고 독립군측의 피해는 전사 4명, 중상 2명으로 확인하고 있다. 이 전과는 압승 사실을 내외에 과시하는 과정에서 다소 과장된 것으로 보인다.450)위와 같음. 그렇지만 승첩 직후에 보도된≪독립신문≫이나 중국≪上海時報≫의 기사를 통해서 볼 때 일본군 150여 명을 사살한 공전의 대승을 거둔 것은 사실로 확인된다.451)≪獨立新聞≫, 1920년 6월 22일,<獨立軍勝捷>.
趙中孚 외 2인 編,≪近代中韓關係史資料彙編 5≫(國史館, 1967), 433∼434쪽.
이에 반해 일제의 전투보고서에서는 참패 사실을 철저하게 은폐하였을 뿐만 아니라, 독립군 30여 명을 ‘사살’하고 일본군측의 전사자와 부상자가 각각 1명에 불과한 것으로 실상을 철저히 왜곡시켜 기술하고 있다.452)<安川追擊隊ノ鳳梧洞附近戰鬪詳報>, 八. 彼我의 損害.

 봉오동승첩은 독립군과 일제 양측 모두에게 큰 충격과 영향을 주었다. 독립군측은 임시정부 군무부가 이 승첩을 ‘독립전쟁의 제1회전’이라 선언하였을 만큼 이를 계기로 사기가 크게 진작될 수 있었다. 이로써 독립전쟁에서의 승리 가능성을 확신한 독립군은 지속적인 독립전쟁을 수행하기 위해 여러 독립군단간의 군사통일 노력을 더욱 경주하는 한편, 병력보충과 군비확충에 더욱 박차를 가하였다. 이와 같은 사기앙양과 전력증강은 장차 벌어질 일제 침략군과의 대규모 접전에서 승리를 담보하는 것이었다.

 한편 일제는 봉오동참패에 커다란 충격을 받았다. 일제는 그동안 독립군의 국내진입작전에 시달리면서도 정규군대를 투입하면 독립군을 쉽게 ‘진압’할 수 있는 민병 정도로 판단하고 있었다. 하지만 봉오동참패를 계기로 일제는 정예화된 독립군의 강력한 전력을 실감하고, 장차 독립군이 국내진입작전을 대규모로 결행하게 되면 식민지 통치에 심각한 위협 요인이 될 것으로 판단하기에 이르렀다.453)신용하,<봉오동전투와 청산리독립전쟁>(국사편찬위원회 편,≪한민족독립운동사≫4, 1988), 101쪽. 결국 막강한 화력를 보유한 정규군대를 투입하고도 ‘예상밖으로’ 당한 봉오동의 충격적 참패는 독립군의 전력을 재평가하고 독립군 ‘초토화’를 위한 근본적 대책을 강구케 한 계기로 작용하였다. 봉오동승첩에 이어 벌어진 청산리대첩은 봉오동전투를 계기로 독립군과 일제 양측이 받은 영향과 충격의 소산이기도 하다.

개요
팝업창 닫기
책목차 글자확대 글자축소 이전페이지 다음페이지 페이지상단이동 오류신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