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편 한국사
  • 근대
  • 48권 임시정부의 수립과 독립전쟁
  • Ⅲ. 독립군의 편성과 독립전쟁
  • 2. 봉오동승첩과 청산리대첩
  • 2) 청산리대첩
  • (1) 일본군의 간도 침공

(1) 일본군의 간도 침공

 3·1운동 이후 두만강과 압록강 접경지대에서 독립군의 활동이 활발해지자, 일제는 대책 마련에 혈안이 되었다. 1920년 5월부터 조선총독부 경무국장이 수차 심양을 왕래하며 만주 실력자인 巡閱使 張作霖을 만나 ‘중일합동수색’이란 명목하에 일제 군경을 동원해 독립군 탄압을 시도한 것이 그 대표적 사례이다.454)姜德相 編,≪現代史資料≫28, 67∼68쪽. 이에 따라 서간도를 중심으로 하는 봉천성 내에서 일제의 奉天督軍 고문 우에다(上田)와 사카모토(坂本)의 두 경찰고문을 隊長으로 하는 上田隊와 坂本隊로 불린 ‘중일합동수색대’가 편성되어 전후 4개월에 걸쳐 독립군 및 항일단체에 대한 대탄압을 가하였다. 이는 결국 각지의 친일단체인 保民會를 앞세운 일제 군경의 항일민족주의자 학살작전이 되고 말았다.455)國史編纂委員會 編,≪韓國獨立運動史≫3, 663∼666쪽.

 그러나 중국 관리 가운데는 한국의 독립운동을 동정 내지 지지하는 인물도 상당수 있었다. 특히 북간도의 경우가 그러하였다. 길림성장 徐鼎霖을 비롯해 연길도윤 張世銓, 보병 제1단장 孟富德 등은 중일합동수색을 반대하고 일제측의 동정을 사전에 독립군측에 통지해 주었다. 그러므로 북간도에서는 중일합동수색이 실효를 거둘 수 없었던 것이다.

 한중간의 우호관계 속에서 중일합동수색에 의한 독립군 탄압작전이 실패로 귀착되자, 일제는 직접 일본군을 간도로 침공시켜 독립군과 항일단체를 근원적으로 ‘초멸’하려는 대규모의 계획을 수립하기에 이르렀다. 봉오동참패를 계기로 이러한 계획은 더욱 구체화되었다. 1920년 8월까지 완료한 ‘間島地方不逞鮮人剿討計劃’이 그것이다. 침공 계획과 준비를 완료해 놓은 뒤 일제는 간도침략에 따른 국제적 비난과 불법성을 은폐할 적당한 구실을 마련하게 되었다. 1920년 10월의 琿春事件은 이와 같은 배경과 목적하에서 일제가 의도적으로 조작한 사건이었다.

 일본군은 중국의 마적 長江好를 금전으로 매수하고 그들에게 무기를 제공한 뒤, 이들로 하여금 일제의 영사관 분관이 있던 훈춘을 습격케 하였다.456)姜德相 編,≪現代史資料≫28, 141∼142쪽. 이에 따라 400여 명의 마적단은 1920년 10월 2일 새벽에 야포 3문을 성 밖에다 걸어놓고 훈춘성을 공격하였다. 이때 훈춘의 일본 영사관 분관에는 영사관 경찰과 총독부 파견 경찰대 및 총독부 함북경찰대 등에 소속된 50여 명의 병력이 주둔해 있었다. 중국측의 요청에 의해 이들 병력이 한쪽 성문을 수비하였으나 마적들은 일제측과의 사전 약속대로 무난히 성문을 통과해 약탈과 살륙을 자행하였다. 결국 마적단의 난동으로 중국군 70여 명과 한인 7명이 살해당하는 참화를 입었고, 영사관원들이 탈출한 상태에서 비어 있던 일본 영사관 분관도 분탕되었다. 또한 조선총독부 함북파견 경찰 일가와 일인 부녀자 9명도 아울러 살해되었다고 한다.457)姜德相,≪現代史資料≫28, 146∼148쪽. 이것이 훈춘사건의 전말이다.

 훈춘사건을 구실로 일제는 출동 대기상태에 있던 대규모의 병력을 사건 당일부터 즉시 간도에 투입하였다.458)≪間島出兵史≫上(金正柱 編,≪朝鮮統治史料≫2, 韓國史料硏究所, 1970), 17∼20쪽. 중국 당국과의 사전 교섭이나 통보 절차없이 일방적으로 만주를 침범한 것이다. 10월 2일부터 수일간 북간도 일대에 집중적으로 투입된 일본군의 주력은 한국 주둔군인 소위 주차조선군 소속의 일본군 제19사단이었다. 주력부대 외에도 연해주 블라디보스톡 주둔군(浦潮軍)과 요동지역에 배치되었던 關東軍의 일부도 투입되었다. 구체적으로 만주 침공에 동원된 일본군의 부대별 병력 규모를 보면 주력인 ‘조선군’ 제19사단 9천명을 비롯해 20사단 700명, 블라디보스토크 주둔군 제14사단 4천명, 제11·13사단 각각 1천명, 북만주파견대 1천명, 관동군 1,200명 등으로, 총병력 2만명에 달하는 엄청난 규모였다.459)金靜美,<朝鮮獨立運動史上に於おける1920年10月-靑山里戰鬪の歷史的意味を求ぬて->(≪朝鮮民族運動史硏究≫3, 靑丘文庫, 1986), 136쪽. 이와 같은 대규모 병력이 기관총과 대포 등 중화기와 신형 장비를 갖추고 서북간도를 동서남북 사방에서 포위하는 형세로 한인사회에 대해 대대적인 압박을 가해 온 것이다. 그 가운데서도 특히 독립군의 주요 근거지였던 북간도 일대는 제19사단 주력부대를 비롯한 일본군의 집중적인 탄압을 받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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