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편 한국사
  • 근대
  • 48권 임시정부의 수립과 독립전쟁
  • Ⅲ. 독립군의 편성과 독립전쟁
  • 2. 봉오동승첩과 청산리대첩
  • 2) 청산리대첩
  • (3) 독립군의 전투준비

(3) 독립군의 전투준비

 청산리대첩 당시 독립군의 전력을 구체적으로 확인하는 작업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독립군의 병력 규모·무기보유 상황 등을 명확히 확인하는 데는 자료상 한계가 있기 때문이다. 이러한 사실을 염두에 두고 청산리대첩 당시 전투에 직접 참가한 독립군의 대체적인 전력을 살펴보자.

 대한군정서의 경우 약 600명의 정예병력과 100명 가량의 보충대 병력이 교전 개시 직전인 10월 12∼13일 청산리 부근에 도착하여 주둔하고 있었다.465)姜德相 編,≪現代史資料≫28, 361·396쪽. 다량의 무기를 보유한 대한군정서 병력은 여행대장 羅仲昭와 중대장 李範奭이 인솔한 사관연성소 졸업생 300여 명을 위주로 한 旅行隊, 그리고 김좌진이 직접 인솔하는 본대로 나뉘어져 있었으나, 대회전 직전에 편제를 개편, 전력의 극대화를 꾀하였다. 즉 김좌진을 사령관으로 한 사령부와 그 밑에 참모부 및 연성대를 두고, 사령부 아래에는 다시 洪忠憙를 대대장서리로 하는 1개 대대로 개편하고, 그 대대는 4개 중대와 1개 기관총 소대로 편성하였던 것이다.466)≪獨立新聞≫, 1921년 2월 25일,<大韓軍政署報告>. 보통 1개 소대가 50명이며 1개 중대는 2개 소대로 이루어졌으므로 대대 병력은 400명 가량이었다고 볼 수 있다.

 홍범도가 직접 지휘하는 대한독립군은 그 동안에 최진동의 군무도독부 및 안무의 대한국민군과 연합한 결과로 大韓北路督軍部를 편성하여 1920년 6월 봉오동승첩을 거두었다. 이어 같은 해 7월 북간도 여러 독립군단의 군사통일 진전으로 東道軍政署가 성립되자, 대한북로독군부는 그 별동부대인 東道督軍府로 편성되었다. 그리하여 홍범도는 이 동도독군부의 사령관으로서 연길현 依蘭溝 九丹溝 오지에 본영을 두고 4개 대대 1,600명의 큰 군단을 편성하여 요충지에 주둔시키면서 군사훈련을 통해 전력을 강화하였다. 한편 이 무렵에는 대한국민회와 상해 임시정부의 지원을 받아 明月溝에 무관학교까지 설립하여 본격적인 간부훈련도 개시하였다.

 홍범도의 대한독립군과 연합한 독립군부대 가운데 안무의 대한국민군은 북간도 한인사회의 자치와 독립군 양성에 가장 큰 기반을 가진 대한국민회의 직속 군대였다. 이 군단은 그 동안 국내진입작전과 봉오동전투에도 참전하였던 부대로, 군자금이 비교적 풍부하고 정기적으로 훈련도 받아온 정예군이었다. 봉오동승첩 이후 8월 경의 대한국민군 병력은 450명이었다. 대한국민군은 위에서 보았듯이 8월 말 대한국민회의 지시에 따라 대한독립군의 뒤를 이어 의란구의 본영을 떠나 9월 하순 이도구 부근에 도착하였다.

 대한의군부는 봉오동전투 이래 許根을 단장, 姜昌大를 부단장으로 하는 부대로 개편, 대한독립군과 연합하여 항일전을 수행해 왔다.467)姜德相 編,≪現代史資料≫27, 369쪽. 그리하여 이도구 방면으로 진군한 후에는 홍범도 휘하에서 청산리대첩에 참전하였다. 이 무렵의 병력은 150명 정도로 추정된다.

 훈춘한민회군은 이도구로 이동한 뒤 홍범도 휘하에서 200여 명 정도가 대첩에 참가하였던 것으로 보인다. 대한광복단은 1920년 8월 현재 단원이 200여 명에 불과하였으나 대첩 직전에는 450명에 이르렀다. 하지만 실제로 대첩에 참전한 병력은 200명 정도로 추정된다. 의병을 중심으로 조직되었던 대한의민단은 200∼300명의 총병력 가운데 100여 명 정도가 직접 참전하였다. 이도구 방면에 진군한 대한의민단은 일명 冒險隊로 알려졌고 홍범도 부대와 합류한 뒤 대첩에 참가하였다. 대한신민단은 장정에 오를 때 그 일부가 최진동이 인솔한 군무도독부군을 따라 羅子溝 방면으로 북상하였지만, 나머지 200여 명은 홍범도 부대를 따라 이도구 방면으로 이동한 뒤 연합부대의 일원이 되어 대첩에 직접 참전하였다.

 이상과 같은 독립군의 병력을 종합적으로 파악해 보면 청산리대첩 당시 독립군의 병력 규모를 대개 가늠할 수 있을 것이다. 이 내용을 정리하면 대한군정서 600명, 대한독립군 300명, 대한국민군 250명, 대한의군부 150명, 훈춘한민회 200명, 대한광복단 200명, 대한의민단 100명, 신민단 200명 등 모두 2,000명 정도의 독립군이 청산리대첩에 참전한 것으로 파악된다.468)愼鏞廈, 앞의 책, 451쪽.
尹炳奭, 앞의 책, 179쪽.

 한편 김좌진과 홍범도, 안무 등 독립군의 주요 간부들은 청산리일대로 들어온 일본군과의 대규모 회전을 앞두고 효과적인 군사작전을 숙의하기 위해 수차 회합을 가졌다. 이도구 북하마탕에서 대첩을 앞두고 10월 13일 대한독립군과 통합된 대한국민군·신민단·대한의민단·훈춘한민회 등의 대표자가 모여 전략회의를 개최하였다. 이 회의에서 홍범도가 연합부대의 지휘를 담당하기로 결의하고, 군자금 모집도 추진하였다. 이에 따라 대한국민회는<광복사업의 성패의 秋>라는 포고문을 발하고 한인 매호당 10원, 그리고 전 재산의 10분의 1에 해당하는 금전을 군자금으로 모집하기 시작하였다.

 이에 앞서 이도구 일대에 주둔해 있던 홍범도 연합부대는 삼도구 청산리 일대에 진주한 김좌진의 대한군정서와도 연합작전을 협의하였다. 일본군이 삼도구 忠信場 上村에 도착하기 전날인 10월 10일 廟嶺에서 개최한 독립군 간부회의가 그것이다. 대한군정서와 연합부대의 지휘관들이 참가한 작전회의에서 한때 군정서 부총재 玄天黙 등이 주장한 피전책을 채택해 일본군과의 전면전을 가능한 피한다는 전략을 결의하기도 하였다. 즉 일본군과의 대규모 교전사태는 중국 정부의 반감을 야기하고 나아가 일본군의 병력증파를 초래할 위험성이 크다고 보았던 것이다.469)姜德相 編,≪現代史資料≫27, 381쪽. 그러나 일본군의 파상적 대공세에 직면하게 된 독립군은 교전 회피가 도리어 불리할 수도 있다고 판단되자 적극적인 응전 방향으로 전략을 변경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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