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편 한국사
  • 근대
  • 48권 임시정부의 수립과 독립전쟁
  • Ⅲ. 독립군의 편성과 독립전쟁
  • 2. 봉오동승첩과 청산리대첩
  • 2) 청산리대첩
  • (5) 청산리대첩의 전과와 의의

(5) 청산리대첩의 전과와 의의

 항일무장독립운동사상 공전의 대승을 기록한 청산리대첩에서 독립군이 거둔 구체적 전과를 파악하기는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상호 적대관계에 있던 한국과 일본, 그리고 전투 현지였던 중국측의 자료마다 각기 그 내용이 달리 기술되어 있기 때문에 실제 전과를 명확히 파악하기가 그만큼 어려운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청산리대첩에서 독립군측이 절대적으로 압승한 사실을 기록한 점에서는 대개 일치하고 있다. 이 점을 감안하고 청산리대첩에서 독립군이 올린 전과의 대강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상해 임시정부의 군무부는 김좌진이 인솔한 대한군정서의 전황보고에 근거하여 청산리대첩의 총체적인 전과에 대해 일본군의 전사자가 연대장과 대대장 한명씩을 포함해 1,257명이며, 부상자는 장교 이하 200여 명이라고 밝혔다.487)≪獨立新聞≫, 1921년 2월 25일,<大韓軍政署報告>. 이보다 앞서 임시정부의 기관지인≪독립신문≫도 “김좌진씨 부하 6백명과 홍범도씨 부하 300여 명은 대소전투 10여 회에 왜병을 격살한 자 1,200 여 명”이라 하여 군무부 보고와 비슷한 규모로 기술하였다.488)≪獨立新聞≫, 1921년 1월 21일,<我軍隊의 活動>. 한편 박은식은 일본군 전사자를 2,000여 명으로 기록하고, 청산리대첩에 직접 참전한 이범석은 그의 회고록에서 일본군의 사상자를 3,300명으로 파악함으로써 임시정부에서 발표한 전과를 약간 초과하고 있다.489)朴殷植,≪韓國獨立運動之血史≫(上海:維新社, 1920), 185쪽.
李範奭, 앞의 책, 58쪽.
자료에 따라 약간씩 차이를 보이기는 하지만 이상과 같은 한국측 전과 기록은 대체로 독립군의 압승을 뒷받침하는 면에서는 그 윤곽을 같이 하고 있다.

 이에 비해 일본측 기록은 청산리에서의 참패 사실을 은폐할 뿐만 아니라 피해상황을 자의로 축소함으로써 객관적 자료로서의 신빙성을 결여하고 있다. 청산리대첩 직후 일제 신문에서는 현지 영사의 비밀보고에 의거해 “아군(일본군) 전몰장병 가노우 연대장 1명, 대대장 2명, 중대장 5명, 소대장 9명, 하사 이하 병졸 900여 명”이라고 대대적으로 보도했다고 하지만, 이 사실은 현재 확인되지 않고 있다. 일제는 전투 보고서에서 대한군정서 독립군이 청산리 부근의 4일간에 걸친 전투에서 일본군 700명을 사살하고 총기 200정과 포 2문을 노획했다고 선전하고 있는데, 이것은 사실이 아니라고 부정하였다.490)愼鏞廈, 앞의 책, 500쪽.
李範奭, 위의 책, 59쪽.
愛國同志援護會 編,≪韓國獨立運動史≫2, 1956, 314쪽.
그리고 최초의 백운평전투에서는 병졸 3명 전사, 하사 1명과 병졸 2명이 부상하였을 뿐이고, 대규모의 접전인 어랑촌전투에서조차도 步卒 1명과 기병 2명이 전사하고, 보졸 4명과 기병 7명이 부상한 정도로, 그리고 홍범도 부대의 야간 매복전에 걸려 일본군 추격대가 거의 전멸된 고동하곡의 격전에서는 아예 “아(일본군)의 피해 없음. 적(독립군)의 사상자 30명”이라고 하여 전황을 허위로 보고하는 등 사실을 왜곡하였던 것이다.491)尹炳奭, 앞의 책, 198쪽.

 그러나 간도주재 일본 총영사는 청산리대첩 직후 본국의 외무대신에게 다음과 같은 비밀 급전을 보내 일본군의 참패를 어느 정도 인정하고 있다.

일본군 담당구역내에서의 불령선인 토벌은 이미 각 부대가 모두 일단락을 고하였다. 그 효과는 일찍이 조선군(일본군 제19·20사단)이 2개 연대 병력으로 2개월 동안에 소탕할 수 있다고 믿은 기대에 반해 성적은 案外에 생각과 같지 않아서, 말하자면 다소 실패로 끝났다는 비난을 면키 어렵다(姜德相 編,≪現代史資料≫28, 304쪽;愼鏞廈, 앞의 책, 502쪽 재인용).

 한편 독립군측에서도, 일본군의 피해상황에 비해서는 상대적으로 경미하지만, 상당한 인적 손실을 보았던 것으로 추정된다. 일본군의 정보기록에서도 독립군측의 피해에 대해 백운평전투에서 16명, 어랑촌전투에서 60명 정도가 전사하고, 이어 고동하곡전투에서는 30명 가량이 사상한 정도로 기술하였다.492)위와 같음. 이범석은 대한군정서 독립군의 경우 전사 60여 명, 부상 90여 명, 실종 200여 명으로 파악했지만, 실종자는 그후 대부분 부대로 복귀한 것으로 회고하고 있다.493)李範奭, 앞의 책, 58쪽.

 독립군의 피해상황에 대해 비교적 객관적으로 파악한 자료는 임시정부 파견원 安定根이 상해 임시정부에 제출한 비밀 보고서이다. 여기서 안정근은 10월 22일부터 3일간 여러 전투에서 300여 명에 달하는 독립군 사상자가 발생한 것으로 보고하였다. 결국 독립군의 전체 피해 규모는 여기에다 21일의 백운평전투와 25∼26일의 고동하곡전투 등에서 발생한 사상자를 감안해야 할 것이다. 이렇게 볼 때 청산리대첩에서 독립군이 입은 인적 손실의 규모는 350여 명 안팎으로 추산된다.494)愼鏞廈, 앞의 책, 500∼501쪽.

 이상에서 본 것과 같이 청산리대첩에서 독립군은 무기와 병력면에서 절대적 우세를 자랑하던 이른바 무적황군 일본군을 상대로 완승을 거두며 혁혁한 전과를 올렸다. 그렇다면 독립군이 이처럼 압승할 수 있었던 요인은 과연 무엇이었던가. 이 문제는 독립군과 일본군 양쪽의 상대적 전력 분석작업 외에도 3·1운동 이후 간도 한인사회의 격동하던 독립열기와 독립전쟁간의 유기적 관계의 해명을 통해서 밝혀질 수 있을 것이다.

 우선 독립군이 승리할 수 있었던 직접적 요인으로는, 정신적 측면에서 어떤 악조건 속에서도 희생을 각오한 독립군의 결사항전 투지를 무엇보다 먼저 들 수 있다. 대한군정서 총재 徐一이 1921년 1월 청산리대첩의 전말을 상해 임정에 보고한 글 끝에서 다음과 같이 지적한 대목이 독립군의 이러한 결사항전 의지를 웅변해 준다고 할 것이다.

오호라, 3일간의 전투에 糧道가 俱絶되어 다만 5∼6塊의 감자로써 餓腸을 僅充하고, 一日一夜에 능히 150여 리의 험산밀림을 통행하되 一毫도 奪氣함이 無하며, 전투 후에 또한 수천백리 森林長雪中을 통과하여 凍傷한 자가 不少하되 半點의 怨悔가 無함은 참으로 독립의 장래를 위하여 희망한 바이더라(≪독립신문≫제95호, 1921년 2월 25일).

 조국광복이라는 확고한 투쟁목표를 향한 독립군의 이러한 능동적 항전의지는 형식적 군제의 틀에서만 움직이던 일본군의 피동적 임전자세를 완전히 압도할 수 있었던 것이다.

 다음으로 전술·전략면에서도 독립군은 일본군을 압도하였다. 독립군은 삼림과 계곡 등의 지형과 지세를 적절히 활용하고 유리한 고지를 선점한 뒤 접근해 오는 일본군을 향해 정확한 타격을 가할 수 있었다. 이에 비해 일본군은 화력과 병력의 우세만 믿고 삼림과 계곡에서 벌어질 전투에 대한 대비책도 없이 그대로 진군하는 무모한 작전을 반복적으로 구사함으로써 길목에서 매복한 독립군의 타격목표가 되었다. 백운평전투와 고동하곡전투 등의 예가 독립군이 구사한 전형적인 유격전술에 해당된다. 이와 같이 독립군이 일본군에 비해 전술·전략면에서 우세할 수 있었던 것은 결국 독립군 지휘부의 작전수립·군사운용 능력이 일본군 지휘관을 월등히 압도한 결과라고 볼 수 있을 것이다.

 이와 같은 직접적 요인 외에 거시적으로 볼 때 간도 한인사회의 한층 고조된 민족역량이 대첩을 올리게 한 근원적인 요인이었음을 지적할 수 있을 것이다. 독립군의 모체였던 현지 한인사회에서는 독립전쟁에 즈음해 군수지원과 정보제공 등 물심양면으로 헌신적 지원을 아끼지 않았다. 그 동안 독립군을 양성해 온 간도와 연해주의 한인사회는 국내진입작전이 개시된 1919년 여름부터 독립군의 항전에 모든 뒷바라지를 다해 왔었다. 가난한 농민이 주축이 된 한인사회는 경제적으로 생활기반조차 확고하지 못한 형편에서도 군자금을 내어 무기를 마련케 하였고, 군량·피복 등의 군수물자를 전담하였다. 뿐만 아니라 한인 이주민들은 일본군의 동태를 정확하게 탐지하는 정보활동을 자원하였고 독립군의 각종 통신연락을 담당하였다. 때로는 지형·지세를 적절히 이용해야 하는 독립군이 부대를 이동하거나 배치할 경우, 현지 안내를 자원하기도 하였다. 천수평전투는 현지 주민의 정보로 일제 기병대를 기습공격하여 승리한 경우이고, 완루구전투 역시 현지 한인이 제공한 일본군 동향 정보가 승전의 밑바탕이 되었던 것이다.

 요컨대 1920년 10월의 청산리대첩은 1910년 국치 이후 간도를 중심으로 한 남북만주와 노령 연해주 등지의 국외 한인사회에서 경주한 ‘독립전쟁론’의 결실이었다. 국치 후 국내외 민족운동자들은 일제로부터 민족의 해방을 쟁취하기 위해서는 일제의 통치력이 미치지 않는 국외 각지에 독립운동기지를 건설하고 민족의 군대인 독립군을 양성함으로써 언젠가 적절한 시기가 왔을 때 일제와 전면전을 벌이겠다는 독립전쟁론을 견지하고 있었다. 이와 같은 독립을 향한 굳은 신념과 처절한 노력이 3·1운동을 계기로 봉오동승첩과 청산리대첩 등 독립전쟁으로 일시에 표출된 것이다. 동시에 이와 같은 독립군의 독립전쟁은 3·1운동에서 보여준 한민족의 자주독립 의지를 계승해 일제 침략세력으로부터 한민족이 독립할 수 있다는 민족의 자주독립 역량을 유감없이 발휘한 쾌거이기도 하다.

<朴敏泳>

개요
팝업창 닫기
책목차 글자확대 글자축소 이전페이지 다음페이지 페이지상단이동 오류신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