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편 한국사
  • 근대
  • 48권 임시정부의 수립과 독립전쟁
  • Ⅲ. 독립군의 편성과 독립전쟁
  • 3. 경신참변과 자유시사변
  • 1) 독립군의 북정

1) 독립군의 북정

 청산리대첩에 참여한 대한군정서 등 여러 독립군 부대는 대첩이 끝난 직후 지체없이 북쪽 중·소 국경 부근의 密山을 향해 대장정에 올랐다. 먼저 대한군정서 독립군은 어랑촌전투를 승리로 이끈 뒤 일본군의 추격을 피해가며 북정길에 오르기 위해 즉시 부대를 이동시켰다. 사령관 김좌진의 인솔하에 대한군정서군은 야포와 기관총 등 중화기를 비롯해 총기와 탄약을 2량의 우마차에 만재하고 청산리 일대를 벗어나 10월 26∼27일 경에는 화룡현과 안도현의 경계인 黃口嶺村 부근에 도착해 홍범도가 이끄는 독립군 연합부대를 기다렸다. 대한군정서군은 그후 11월 7일 경 황구령을 출발한 뒤 五道楊岔로부터 삼림계곡을 따라 천보산 서쪽 부근을 돌아 15일 경 왕청현 春陽鄕 神仙洞에 도착하였으며, 이어 여러 독립군부대가 집결하던 密山으로 향하였다. 그리고 이를 전후한 시기에 홍범도와 연합하였던 여러 부대 가운데 대한국민군·대한의군부·대한광복단 등의 독립군단도 대한군정서의 행군로와 비슷한 길을 따라 밀산을 향해 북정을 단행하였다.495)姜德相 編,≪現代史資料≫28, 406∼408쪽.
≪獨立新聞≫, 1921년 1월 21일.

 한편 홍범도가 인솔한 대한독립군과 훈춘한민회 및 대한의민단 등의 독립군 연합부대 600여 명은 고동하곡전투를 승리로 이끌며 청산리대첩을 마무리한 다음 곧바로 안도현 산림지대로 행군하였다. 그리하여 홍범도를 주축으로 한 이들 연합부대는 서간도 유하현 哈泥河의 본영을 떠나 안도현 奶頭山 부근 三人班에서 새로운 병영을 건설하고 있던 池靑天 휘하 400여 명의 서로군정서와 합류함으로써 단일부대를 편성할 수 있었다. 총사령관에 홍범도, 부사령관에 지청천이 각각 취임한 통합군단 역시 곧바로 밀산을 향한 고난의 행군에 들어갔다.

 청산리대첩에 참여한 여러 독립군단과는 달리, 중국측과 근거지 이동에 관한 타협이 이루어진 직후의 장정 초기부터 羅子溝와 밀산 방면을 향해 그대로 북상을 단행한 독립군도 있었다. 최진동 휘하의 군무도독부를 비롯해 대한의군부·신민단·훈춘한민회의 일부 독립군이 그러하였다. 왕청현 나자구에 집결한 이들 독립군 1,000여 명은 이범윤을 명의상 총재로 추대하고 최진동을 사령관으로 하는 大韓總軍府를 조직한 뒤 연해주 방면으로부터 기병대의 내원을 받으면서 일본군과 교전할 작전을 세우고 있었다. 그후 대한총군부도 다른 독립군이 밀산 방면으로 북상함에 따라 그곳으로 향하였다.

 하지만 모든 간도 독립군이 밀산으로 북상한 것은 아니다. 북정한 독립군 가운데 처음부터 본대에서 이탈해 다른 곳으로 향한 병력도 있었으며, 중도에 낙오자도 많았다. 그러나 대체로 볼 때, 북간도의 여러 독립군 부대는 청산리대첩 후 중·소 국경 부근의 밀산을 향해 북상길에 오르게 되었다.

 독립군의 집결지였던 밀산은 1910년 전후부터 민족운동자들이 국외 독립운동기지의 하나로 경영하기 시작한 곳이었다. 청산리대첩의 주역 가운데 한 사람인 홍범도도 1910년대 중반 이곳 蜂密山 일대에 주둔하며 독립군을 양성하고 있었다. 정태가 밀산을 ‘조선 독립군의 발상지’라고 규정한 것도 이러한 맥락에서이다.496)朴敏泳,≪大韓帝國期 義兵硏究≫(한울, 1998), 221∼223쪽.

 그러나 밀산은 많은 독립군을 장기간 수용하기에는 현지 한인사회의 재정적 기반이 취약한 곳이었다. 이에 밀산에 주둔한 독립군 지도자들은 러시아 연해주로 넘어가 소모된 전력을 보충 증강한 뒤 새로운 항일전의 방향을 모색하려 하였다. 연해주는 서북간도와 마찬가지로 1910년 전후부터 국외 항일운동의 중추기지로 터전을 닦아오던 곳이었고, 20만에 이르는 대규모 한인사회가 형성되어 있었기 때문에 독립군의 새로운 활동근거지 개척의 適地로 자연히 부상하게 된 것이다. 더욱이 당시는 볼셰비키혁명이 시작된 직후로, 볼셰비키 혁명정부가 피압박 약소민족의 해방투쟁에 대한 후원을 공약하던 때였다. 볼셰비키의 이러한 약소민족 해방투쟁 원조 약속은 만주 독립군에게 새로운 희망을 주고 연해주 이동을 재촉하는 중요한 계기로 작용하였던 것이다. 그리하여 여러 독립군단의 지도자들은 회의를 열어 연해주로 이동할 것을 결정한 뒤, 하나의 통합된 독립군단으로 당당히 진군키 위해 大韓獨立軍團을 편성하였다.

 대한독립군단은 한 개 여단 밑에 3개 대대로 구성되었다. 그리고 1개 대대는 3개 중대, 1개 중대는 3개 소대로 각각 구성되었고, 1개 소대의 구성원은 27명으로, 총병력이 3,500여 명에 달하였다. 대한독립군단의 총재는 대한군정서의 지도자였던 徐一이 맡았으며, 부총재에는 청산리대첩의 명장인 홍범도와 김좌진·曺成煥 등이 선임되었다. 그리고 총사령에는 金奎植, 참모총장에는 李章寧, 여단장에는 서로군정서 사령관이던 池靑天이 각각 선임되었으며, 金昌煥·趙東植·尹擎天·吳光鮮 등이 중대장을 맡았다.497)蔡根植,≪武裝獨立運動秘史≫(공보처, 1947), 99쪽.

 대한독립군단 편성에 합류한 중요 부대로는 서일을 총재로 한 대한군정서를 비롯해 홍범도가 지휘하는 대한독립군, 그리고 대한국민군·훈춘한민회·대한신민단·군무도독부·대한의군부·血誠團·野團·大韓正義軍政司 등이었다. 그리하여 단일편제의 독립군 연합체인 대한독립군단은 1921년 1월초 러시아의 연해주 이만으로 넘어가 자유시로 향하는 새로운 장정을 시작하였다.498)尹炳奭,≪獨立軍史≫(지식산업사, 1990), 208∼211쪽.

 만주 독립군이 청산리대첩 직후부터 장정길에 올라 자유시로 이동하기까지의 행군은 실로 고난에 찬 여정이었다. 굶주림과 혹독한 추위 등 이들 독립군이 겪은 고통과 고단한 형세는 1921년 9월 대한독립군 북만주 통신부 ‘리중실’이 임시정부 대통령 이승만에게 보낸 보고서인<알려드리는 글>에 다음과 같이 생생히 나타나 있다.

삼가 따로 쓴 두장과 함께 사뢰나이다. 남북만주 여러 군단이 성립됨이 이미 삼년이라 요량함이 없음은 아니오나 자랑할 만한 열매를 얻지 못함은 깊이 유감되는 바인가 하나이다. 지남으론 선령의 뜻을 잇고자, 지금으론 이십조의 동포를 건지고자, 다음으론 억만대 자손에게 복록을 주고자 하는 우리 독립군의 두 어께가 이미 무거웠으며 따라 한 두 해에 이룰 바가 아닌가 하나이다. 조선에게는 열어주신 낙원을 잃은 죄, 제 몸에게는 배달겨레의 본뜻과 본승을 나타내지 못한 죄, 자손에게는 씻지 못할 부끄럼을 끼친 죄, 슬프다. 이것이 어께총 받들어총 하는 독립군의 죄 뿐이냐. 묻노니, 형제여, 형제의 죄도 있거든 함께 받고자 하나이다. 밤과 낮을 이어 전전긍긍하는 바는 동포의 도와주시는 뜻, 깊이 바라시는 뜻을 저버릴까, 최후의 일인까지 견디지 못할까 함이오니 … 저희는 이뿐으로 최후의 마음을 결정하였나이다. 때는 일기가 혹독히 추운 겨울이라 몸에는 솜을 붙이지 못하고 발에는 홋감발에 미투리뿐인 그 모양이 어떠하오리까. 할 일 없어 중동선 북으로 향하여 첫째는 군인의 얼고 줄임을 면코자 하며, 둘째는 여러 군대를 모으고자 하니 먼 데는 수천리요, 가까운 데는 칠팔백리 되는 험한 산골 빽빽한 산림을 지나는지라, 이 일이 어찌 쉽소오리까. 더구나 중동선 북에는 우리 동포의 집이 드물어서 몇백명 군인의 의복과 양식도 공급할 수 없으므로 이 또한 사세에 의지하며 다시 아령 이만으로 가게 되었나이다. 아령 이만으로 간 뒤에 여러 군단이 합하여 전날 명의를 모두 작소하고 대한독립군이라 이름하여 한 기관 아래에 지휘를 받게 되었더라. 이만은 일·아 사이에 이른바 완충의 땅이므로 적의 교섭이 심하여 다시 아령 흑하편으로 가게 됨에 전부가 다 그곳으로 가면 첫째 내, 외지에 교통이 편치 못하고 또는 모두 볼셰비키됨이 우리 독립운동에 편치 못한 일이 많으며, 겸하여 후방의 수습으로 말미암아 중요 임원 모모는 중령에 있게 되었나이다. 후방의 수습이라는 것은 여러가지 곤란함이 많아 열에 아홉이 뜻과 같지 못한지라, 간도에 있어서는 작으나 크나 무기를 사며 사관을 가르치는 경비는 모두 간도 사시는 동포의 의연으로 썼거니와 한번 간도를 떠난 뒤에는 한푼의 경비가 극히 어렵고 어디어디서 약간의 구제비를 보내주셔서 가이없이 감격하나, 이것이 불피어나는 화로에 눈송이 집어넣기라. … 슬프다, 물없는 웅덩이의 고기요, 불붙는 기둥위의 제비라. 이를 뉘 능히 구하며, 뉘 능히 살게 하리요. 많으나 적으나 우리 동포가 아니면 그 뉘라서 돌아보오리까. 감히 비옵나니 밑없는 구덩이에 빠지 무리를 건져주시옵소서. 아령 자유시에 있는 이천의 군대는 입고 먹는 것을 모두 아인이 공급하오니 비록 나라가 다르면 인종이 각빛이나 이와 같이 보호하여줌이 또한 감사한 일이오며 아직까지는 별일없이 지내나이다(≪雩南李承晩文書≫7, 561∼568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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