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편 한국사
  • 근대
  • 48권 임시정부의 수립과 독립전쟁
  • Ⅳ. 독립군의 재편과 통합운동
  • 1. 통의부의 결성과 활동
  • 1) 통군부의 성립과 남만한족통일회의

1) 통군부의 성립과 남만한족통일회의

 1920년 10월 약 2만 명에 달하는 일본군의 침입으로 인적·물적 피해를 입은 북간도와 압록강 대안의 南滿洲 지역 한인 및 한국 독립군들은 일시 그들의 생활 터전 또는 근거지를 잃고 큰 혼란에 빠졌다. 특히 일찍부터 일제의 탄압이 심했고 청산리대첩에서의 패배를 설욕하기 위한 일본군의 난동이 극심했던 북간도지역은 한인사회가 뿌리 채 흔들릴 정도의 심각한 타격을 받았다.

 하지만 타격을 받기는 하였지만 북간도지역보다는 덜했던 남만지역의 독립군들은 일본군의 추격을 피해 본래의 근거지에서 산간 오지로 옮겨 새로운 독립군기지를 구축하였다. 그리고 북간도 및 다른 지역에서 탄압을 피해 이주하거나 이동해 오는 한인 및 독립군들에게 생활 터전을 마련해 주거나 자신들의 진영에 편입시켜 戰列을 넓혀나갔다.

 독립군들은 망명 초기의 개척정신을 되살려 버려진 습지와 산간을 개간하여 농지로 일구었다. 그리하여 생활 터전을 마련해 한인사회를 조성하는 한편, 그들의 근본 목표인 항일전을 전개하기 위한 굳건한 항전기지를 구축하기 위해 피땀을 흘리며 노력하였다. 그러나 10여 년간 일구어 논 터전을 버리고 새로운 지역을 개척한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었다. 게다가 독립군들이 새로 이주한 지역은 사람의 발길이 전혀 닿지 않은 오지였다. 이에 독립군들은 보다 효율적인 항전기지를 구축해야 할 필요성을 절감하였다.

 남만의 독립군들이 이 같은 상황에 처해 있을 때, 1921년 4월 北京에서는 朴容萬·申肅 등의 주도로 군사통일회의가 개최되었다. 군사통일회의의 개최 목적은 일본 제국주의자들에 대항해 성공적인 무장항쟁을 펼치기 위해서는 모든 한국인들의 무력을 한 곳으로 통일시키자는 것이었다.518)尹炳奭,≪獨立軍史≫(지식산업사, 1991), 228쪽.<선언서>에 나타난 군사통일의 취지는 다음과 같다.

我獨立問題는 軍事가 아니면 해결이 불능이요, 군사운동은 통일이 아니면 성공은 난망일세, 於是乎 군사통일의 절대 필요에 감하여 내외지 각 단체의 연합으로 성립된 本會議는 其 목적이 실로 此에 不外하며 其 정신이 또한 此에 在할 뿐이로다(‘군사통일회의’ 명의로 1921년 5월에 공포된<宣言書>:尹炳奭,≪獨立軍史≫, 지식산업사, 1991, 228쪽에서 재인용).

 이에 따르면 조국의 독립은 통일된 무력을 통한 항전에 의해서만 성공할 수 있다는 것이다. 이 시기 국내외 민족운동가들은 공통적으로 효과적인 항일전을 전개하기 위해 통일된 군사조직이 구축되어야 한다고 인식하였다. 이 같은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미주·만주·노령 및 국내에서 참가한 10개 단체의 대표 17명은 열띤 토론을 펼쳤다. 그러나 이 회의는 결국 대표들이 바라는 소기의 목적을 달성하지 못하고 유회되었고, 모든 무장세력이 통일되기를 간절히 바랐던 남북만주에서 파견된 독립군 대표들은 큰 실망을 안고 돌아갔다.

 군사통일회의를 통해서 만주라는 지역적 한계를 넘어 전 민족적으로 통일된 무장세력을 구축하여 보다 충실한 항전을 펼치려 했던 재만 독립군의 희망은 이같이 무산되었다. 따라서 남만주의 독립군들은 지역적으로 쉽게 연결할 수 있는 그들만의 통일된 항일전선을 구축코자 하였다. 남만의 각 독립군단 대표들은 상호 연락을 통해 통합에 대한 의사를 합일시킨 뒤 1922년 1월 南滿統一會를 결성하였다. 그리고 이를 지원하기 위해 徐範善·金觀聲·李萬馨 등 23인으로 구성된 후원대까지 결성하였다.519)<大正 11年 2月 16日, 不逞鮮人南滿統一後援隊組織ノ件>. 西路軍政署를 비롯한 大韓獨立團·光韓團 등의 대표들은 수차례에 걸친 통일회를 가진 후 통합 독립군단인 大韓統軍府를 결성하기에 이르렀다. 새로 결성된 대한통군부의 부서와 간부 명단은 다음과 같다.

총장:蔡相悳, 비서장:高豁信, 민사부장:李雄海, 군사부장:李天民,

교육부장:金東三, 실업부장:邊昌根, 사령관:金昌煥, 경무감:全德元

(蔡根植,≪武裝獨立運動秘史≫, 大韓民國公報處, 1985, 126쪽;崔衡宇,≪海外朝鮮革命運動小史≫ 제1집, 동방문화사, 1945, 7쪽).

 성립과 동시에 간부진을 선임한 통군부는 항일전을 펼치기 위한 기지 구축작업에 박차를 가하였다. 하지만 아직까지 남만지역에는 통군부에 가입하지 않고 소규모로 존재하고 있는 독립군단이 더 있었다. 그들까지 통합시키지 않고는 비록 남만지역만의 통합이긴 하지만 완전하다고 할 수 없었다. 때문에 통군부의 간부들은 같은 해 6월 3일 중앙위원회를 개최하여 잔류 군단들의 책임자들과 접촉을 가져 더욱 확대된 통합군단을 이룩하자고 결의하였다.

 따라서 같은 해 8월 23일 桓仁縣 馬圈子에서는 南滿韓族統一會議가 개최되었다.520)1910년대 전후부터 1920년대 초까지 한국 독립운동계에서는 백두산 이남부터 안동현까지의 압록강변에 있는 만주의 제지역을 서간도라 불렀으나 1920년대 초반부터는 남만주라 지칭하였다. 하지만 남만주는 서간도 보다는 넓은 범위를 가리켰는데, 북쪽으로의 경계가 하얼빈까지 올라갔다. 이 회의에는 이미 통군부에 가입해 있던 서로군정서와 대한독립단, 그리고 寬甸東路韓僑民團·大韓光復軍營·大韓正義軍營·大韓光復軍總營·平安北道督辦府 등의 대표 71명이 모였다.521)<大正 11年 9月 22日, 南滿韓族統一會決議事項並職員名 布告文 入手에 關한 件>(≪韓國獨立運動史≫4, 국사편찬위원회, 1968), 761∼763쪽. 이들 대표들은 金承萬을 회장으로 선출하여 약 7일간 회의를 한 결과 참가한 모든 군단이 통합에 합의하였다. 그리고 다음과 같은 6개항의 결의 사항을 결정하여 8월 30일 이를 남만의 한인사회에 발표하였다.

첫째, 각 단체 각 기관의 명의를 취소하고 구역 인물 및 제반 처리사항을 무조건으로 공결 복종할 것을 서명 날인하고 서약한다.

둘째, 남만한족의 통일기관명을 統義府로 결정한다.

셋째, 통의부 군대 명칭은 義勇軍으로 한다.

넷째, 제도는 총장제로 결정한다.

다섯째, 헌장은 9장 63조를 통과한다.

여섯째, 각 부서의 직원을 선거한다.

(<남만한족통일회 결의사항 및 직원 각 포고문 입수에 대한 건>,≪독립운동사자료집≫10, 독립운동사편찬위원회, 1973, 493∼494쪽).

 이 결의문에 따르면, 새로운 통합체의 발족과 함께 이에 참여한 단체는 지금까지 사용한 명칭을 취소하고 모든 사항을 이 단체의 결정에 위임해야 된다는 것이다. 아울러 새로운 기관은 총장제를 실시할 統義府이며, 헌장을 제정해 조직을 운영한다는 것 등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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