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편 한국사
  • 근대
  • 48권 임시정부의 수립과 독립전쟁
  • Ⅳ. 독립군의 재편과 통합운동
  • 2. 3부의 성립과 활동
  • 1) 참의부의 성립과 활동

1) 참의부의 성립과 활동

 1922년 8월 남만지역의 여러 독립군 세력을 결집하여 조직된 大韓統義府의 성립은 독립군기지 건설 초기부터 망명 민족운동가들의 숙원이 한 단계 이루어진 것이었다. 그러나 통의부는 앞에서 살핀 바대로 조직원 상호간 불화가 일어나 그들 중 일부가 의군부를 조직해 분리되어 나갔고, 또 다른 일부는 참의부를 조직하여 이탈하였다.

 그런데 이같이 성립한 參議府의 성립시기는 명확히 밝혀지지 않고 있다. 하지만 여러 자료를 대비해 살펴보면 대략 다음과 같이 추정할 수 있다. 참의부 성립의 주역인 蔡燦 일행이 상해에 도착한 것은 1923년 12월 2일이었다. 그리고 채찬이≪독립신문≫기자와의 대담에서 “近間에는 全氏一派도 다시 중앙기관인 통의부에 歸入하였습니다. 이후로는 완전히 합동되야 住民은 安樂의 福을 享하고 통의부의 사업은 蒸蒸然히 進할 것입니다 …”539)≪독립신문≫, 1923년 12월 26일.라고 말해 남만주의 유일한 통합 단체를 통의부로 인정하고 있는 점으로 보아 적어도 1923년 말까지 참의부는 성립되지 않은 것으로 생각된다. 그런데 통의부 의용군 제1·2·3 중대 및 유격대, 독립소대 대표들이 임시정부 기치 하에 통합을 이루자는<선언서>는 1924년 5월에 발표되었다. 따라서 이런 점으로 미루어 참의부 조직 시기는 1924년 1월에서 5월 사이로 추정된다.540)國會圖書館,≪韓國民族運動史料(中國篇)≫, 323∼324쪽.

 이와 같이 성립된 참의부의 성립 초기 조직체계는 다음과 같다.

參議長 겸 제1중대장 蔡燦

      제2중대장 崔碩淳

      제3중대장 崔志豊

      제4중대장 金昌彬

      제5중대장 金蒼天

      독립소대장 許雲起

      훈련대장 朴應伯

      중앙의회의장 白時觀

      민사부장 金篠厦(일명:張基礎)

민사부에서는 集安·通化·桓仁·柳河·撫松·長白·安圖·寬甸縣 및 奉天省을 관할지역으로 하여 이들 지역을 13개 地方行政區로 나누어 행정구 대표를 뽑고 이들을 軍民自治에 종사토록 함(金承學,≪韓國獨立史≫, 399쪽).

 창립 초기 참의부는 이들 간부진 밑에 약 500명 이상의 병력으로 남만의 압록강변 중국지역을 관할지역으로 해 지역 내 한인들에게 자치행정을 실시하면서 무장투쟁을 전개하였다.541)尹炳奭,≪獨立軍史≫(지식산업사, 1991), 128쪽. 그런데 이같은 간부진의 구성은 창립 이래 수차에 걸쳐 바뀌게 되는데, 통의부 등과 마찰에 의해 간부가 피살된 경우도 있지만, 주된 이유는 참의부가 본부 및 소속 부대의 근거지를 국내진입이 쉬운 압록강변에 위치해 놓고 수시로 일제를 상대로 유격전을 펼쳐 많은 간부들이 전사했기 때문에 생긴 결과였다.

 그런가 하면 1925년 4월에는 단체의 명칭을 중앙의회의 의결을 거쳐 督辦府(또는 鎭東都督府)라 고치고 진로를 새롭게 한 바 있다.542)<高警第3267號 大正 14年 9月 16日, 鮮匪團督辦府ノ改稱ト決議事項ニ關スル件>(고려대학교 아세아문제연구소 소장 필름(이후부터 ‘아연필’로 표기함) 문서번호 100-4-031), 1,108·1,116쪽. 그 이유는 1925년 3월 참의부는 초산의 대안인 집안현 古馬嶺에서 일본군의 기습 공격으로 간부들이 대거 전사하게 된 고마령전투가 있었다. 게다가 그로 인해 내부에 내홍이 일어나 제1중대장 洪碩浩가 암살 당하였다. 따라서 참의부는 이 같은 조직 내의 손실을 만회하기 위해 조직의 명칭을 고치고 노선 또한 새롭게 하고자 했던 것이다. 진동도독부는 참의부 시기와는 달리 항일무장 투쟁 위주가 아닌 이주한인을 위한 자치와 군사활동을 똑같이 중시하는 노선을 지향하였다.543)위와 같음.

 하지만 같은 해 5월 임정에서 파견된 특사의 지시에 의해 명칭은 6월 26일자로 다시 참의부로 환원되었다.544)위와 같음. 참의부의 명칭은 예전으로 돌아왔지만 노선만은 진동도독부 때와 마찬가지로 軍事와 民事를 동등한 비중으로 시행하였다. 무장투쟁 위주의 노선을 가졌던 초창기에는 참의부의 중앙조직 자체가 앞에서 본 바 같이 군사적 조직을 갖춘 군사위주의 것이었다. 그러나 1926년 6월 26일자로 발표된 의회의 결의사항에 의하면 참의장 1인 밑에 군사위원 4인, 민사위원 4인을 두는 조직체를 갖추고, 무장투쟁과 자치활동을 균등하게 행하도록 하였다. 이어 8월 8일에는 공포 제2호로 참의장 및 각 부의 위원과 행정위원회의 시행방침을 발포하여 새로운 노선의 활동방향을 공고히 하였다.545)<高警第3267號 大正 14年 9月 16日, 鮮匪團督辦府ノ改稱ト決議事項ニ關スル件>, 1118∼1122쪽.

 한편 압록강 접안인 집안현 花甸子에 본부를 구축하고 뛰어난 무장투쟁력을 보인 참의부 독립군의 각 중대 근거지는 다음과 같다

제1중대 및 소속부대 集安縣 楡樹林子, 台上, 頭道溝, 二道溝, 楊子溝

제2중대 및 소속부대 集安縣 磊子溝, 大鏡溝, 志荒溝, 古馬嶺

제3중대 및 소속부대 桓仁縣 城內, 頭道溝, 二道溝, 上漏河, 下漏河

제4중대 및 소속부대 集安縣 花甸子, 菅台溝

제5중대 및 소속부대 通化縣 通南, 大泉眼

(<鮮匪參議府之根據地>, 通化縣 당안관자료).

 이들 근거지들 가운데 제 5중대 및 그 소속부대의 근거지인 통화현만이 압록강변에서 약간 떨어진 지역일 뿐 나머지는 모두 압록강 근접지역이다. 이와 같이 일제를 상대로 무장투쟁을 전개하기 위해 최전방에 근거지를 구축한 참의부는 이들 근거지들간에 신속한 연락망을 구축하여 근거지를 보호하고 일제와의 무장투쟁을 전개하였다.

 그리고 더욱 내실 있는 군사력 구축을 위해 독립군 중 뛰어난 인재를 선출하여 중국의 군관학교에 보내 무예와 전술을 연마토록 하였다. 예컨대 연도는 정확하지 않으나 1928년 경에 작성되었을 것으로 보이는 중국측의 자료에 참의부 제2중대 正士 張興旺과 副士 咸益淳이 廣東軍官學校에 입학하기 위해 上海로 출발하였다고 기록하고 있다.546)<軍官學校入學>(集安縣 당안관 자료). 시설이 좋은 중국의 군관학교에서 군사교육을 받은 이들 유능한 독립군들은 군관학교를 졸업한 후 참의부 독립군들에게 신식 군사교육을 실시하여 군사력을 한층 높여 갔다.547)<昭和 3年 7月 調, 在滿鮮人思想團體分布의 槪要 第2>(≪韓國獨立運動史≫4, 국사편찬위원회, 1968), 759쪽. 또 이렇게 진출한 참의부군 중에는 중국의 蔣介石軍에 합류하여 항일투쟁을 벌이기도 하였는데 군사위원장이었던 蔡君仙이 그러한 경우였다.548)<昭和 3年 5月 31日, 不逞鮮人支那南方軍參加에 關한 件>(≪韓國獨立運動史≫5, 국사편찬위원회, 1968), 749쪽.

 참의부의 민사조직은 관할 지역 내에 지방행정망을 구축하여 이루어 졌다. 관할지역은 집안현을 비롯 寬甸·桓仁·通化·撫松·長白·安圖·柳河의 각 縣을 포괄하는 압록강변 지역으로 관할지역 내의 한인은 15,000호 이상이었다.549)유준기,<참의부>(≪한민족독립운동사≫4, 국사편찬위원회, 1988), 224쪽. 참의부는 이들 관할지역 내의 한인을 매 千戶 단위로 百家長을 두고 그 밑에 十家長을 임명하였다. 그리고 한인이 많이 모여 살고 있는 지역에는 行政區를 설정하고 50명 전후의 경호대원을 육성하여 지방 치안을 유지하고 한인의 생명과 재산을 보호토록 하였다.550)유병호,<1920년 중기 남만주에서의 ‘自治’와 ‘共和制’-정의부와 참의부의 항일근거지를 중심으로->(≪역사비평≫여름호, 역사비평사, 1992), 252∼253쪽.

 참의부가 실시한 자치행정은 다음과 같다. 관할지역 한인자제의 교육을 위해 각 지방 행정구역에 3개 이상의 소학교를 설치하고, 중국 당국과 교섭하여 중국 중학교에 韓人科를 두어 중등교육을 받을 수 있도록 하였다.551)<昭和 3年 7月, 在滿鮮人思想團體分布의 槪要 第2>(國史編纂委員會,≪韓國獨立運動史≫4), 759쪽. 또 관할지역인 집안현 楡樹林子에는 東興病院을, 본부가 있는 화전자에는 東華病院과 화전자병원을, 통화현 大泉眼에는 通東病院을 설치하고 軍醫를 파견하여 한인의 건강을 보살폈다.552)<鮮匪病院>(通化縣 당안관 자료).

 한편 民事組織인 백가장 밑에는 保險隊라는 특수조직이 편성되었다.553)<抄件>(集安縣 당안관 자료). 보험대의 임무는 각 중대 및 소속부대간의 통신은 물론이고 참의부 독립군들이 유격대를 편성하여 국내에 진입할 경우 안내 역할까지 맡았고, 경우에 따라서는 유격대와 함께 무장활동을 전개하기도 하였다. 아울러 이 하부 조직은 참의부 독립군의 원할한 활동을 위해 관할지역 내 한인들에게 부과되는 의무금을 징수하는 임무도 함께 수행하였다. 즉 보험대는 군사 및 민사의 임무를 함께 수행한 참의부의 최하부 행동대였다.

 이어 참의부의 무장활동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참의부는 그들의 무장병력을 한·중 국경인 압록강변의 중국지역에 집중 배치시켰다.554)<鮮匪參議府之根據地>(通化縣 당안관 자료).
慶尙北道警察部,≪高等警察要史≫, 122∼123쪽.
특히 평안북도 초산·위원·만포·자성의 대안인 집안현은 참의부의 주요 군사 근거지이자 활동무대였다. 따라서 참의부의 5개 중대 중 3개 중대(제 1,2,4 중대)가 집안현에 배치되었고, 나머지 2개 중대는 집안현과 접해있는 환인현(제3중대)과 통화현(제5중대)에 배치되었다. 이들 각 중대의 배치병력은 중대 당 150명으로 이들 또한 한 지역에 뭉쳐있는 것이 아니라 각 소대별로 주변의 여러 지역에 나뉘어져 있었다.555)<鮮匪參議府狀況>(通化縣 당안관 자료).

 분산되어 있는 근거지들 사이에는 중간중간 한인의 집에 통신원을 파견하여, 그 곳을 거점으로 장기간 머무르게 하고 주변의 정세를 파악한 후 신속히 연락토록 하였다.556)<鮮匪團參議府第二中隊特派通信員動靜>(集安縣 당안관 자료). 그리고 이같이 구축된 조직망을 십분 활용하여 무장활동을 수행하였다. 즉 중대 또는 소속부대에서 작전계획을 세워 유격대를 구성하면 작전의 내용 및 목적지가 근거지에서 가장 가까이 있는 통신원에게 하달되었다. 최초의 명령을 받은 통신원은 유격대가 목적지까지 통과할 이동로에 있는 다른 통신원들에게 신속히 연락하여 이동할 지역의 중·일 군사시설 및 동정을 살피도록 하였다. 이같이 하여 안전지대가 설정되면 통신원들은 유격대원들을 안내하였다.557)<抄件>(集安縣 당안관 자료).

 참의부 대원들이 이 같은 활동을 벌이자 일제는 만주에 있는 한국 독립군들을 더욱 적극적으로 탄압하지 않고는 안될 것으로 판단하였다. 그리하여 1925년 6월 11일<三矢協定>을 중국측과 체결하였다. 이 협정은 조선총독부 경무국장 미쓰야 미야마쓰(三矢宮松)와 봉천성 경무국장 于珍 사이에 체결된 것으로 중국의 무력을 이용해 재만 독립군을 탄압케 한다는 것이었다.558)<不逞鮮人の取締方に關する朝鮮總督府奉天省間の協定>(≪日本外交年表並主要文書≫下, 日本 東京:原書房, 1965), 75∼76쪽.
<삼시협정의 폐지>(≪독립운동사자료집≫10, 독립운동사편찬위원회, 1973), 460∼462쪽.

 참의부 및 정의부 활동지역인 남만의 20현(안동·흥경·통화·봉성·관전·환인·임강·집안·장백·안도·무순·본계·해룡·휘남·무송·유하·금·복·축암·장하)을 시행구역으로 정하여 마치 상급기관이 하급기관에 명령을 하달하듯 중국측이 독립군을 단속하고 탄압하여 일제에게 그 성과를 보고한다는 이 협정의 주요 내용을 보면 다음과 같다.

2조:중국관헌은 각 縣에 通令하여 在留鮮人이 무기를 휴대하고 조선에 침입하는 것을 엄금한다. 범한 자는 이를 체포하여 朝鮮官憲(일제의 軍警)에게 인도한다.

3조:不逞鮮人 단체를 해산하고 소유한 총기를 수색하여 이를 몰수하고 무장을 해제한다.

4조:朝鮮官憲이 지명하는 不逞團 수령을 체포하여 조선관헌에게 인도한다.

 <삼시협정>의 핵심은 중국군경이 한인 독립운동자들을 체포하여 일제 측에 넘긴다는 것이었다. 이어 같은 해 7월 8일 중국과 일제는 위의 조항을 시행하는 세부지침 12개 조항을 체결하였다.559)<불령선인 단속 시행 세칙>(≪독립운동사자료집≫10, 독립운동사편찬위원회), 464∼466쪽. 그 문구로만 판단한다면 재만한인의 생명은 양국의 軍警 및 관리의 손에 달려 있다는 세칙들이었다.

 <삼시협정>이 발포되고 나자 중국 東三省의 각 지역, 즉 吉林省을 비롯해 遼寧省·안동현·장백현·임강현·하얼빈 등의 중국 군경 수뇌자들은<韓人取締規則>을 제정하여 재만 한인의 독립운동을 본격적으로 탄압하기 시작하였다.560)≪동아일보≫, 1925년 9월 25일·1927년 12월 28일·1928년 3월 31일.
<大正 15年 11月, 長白縣知事의 移住鮮人取締方針>(≪한국독립운동사≫5, 국사편찬위원회), 664∼665쪽.
<昭和 2年 5月 5日, 日支協定에 基한 鮮人取締를 徹底히 하기 위하여 退去命令을 發한다>, 같은 책, 665∼666쪽.
<大正 15年 1月, 遼寧省 不逞鮮人取締, 管理韓僑章程總則>, 같은 책, 671∼672쪽.
특히 임강현의 경우는<삼시협정>을 충실히 이행한다 하여 관내의 이주한인 320여 호 중 약 150호(450명)에게 퇴거 명령을 내려 한인의 생계를 위협하였다.

 일제는 독립군 및 배일한인을 이 같이 중국의 武力으로 탄압하게 한 다음 駐通化日本領事館分館을 在外帝國領事分館主任受持區域으로 정하여 통화현 주변의 각 현에 경찰을 파견하였다.561)<興京派遣所에 當館警察官配置의 件>(≪한국독립운동사≫4, 국사편찬위원회), 815∼817쪽. 이들 파견된 일제의 경찰들은 중국 군경대와 합동하여 한국 독립군을 탄압함은 물론 체포된 독립군을 한국 내로 압송하는 임무를 수행하였다.

 중국의 군경까지 끌어들여 이러한 탄압을 가했지만 참의부의 독립군들은 신명을 다한 항일활동을 그치지 않았다. 즉 참의부 대원들은 만주 내에서 이 같은 중·일의 삼엄한 탄압을 피해가며 국내로까지 침투해 무장투쟁을 펼쳤던 것이다. 한국과 중국의 국경을 철저히 수비한 일제의 국경 수비대까지 상부의 보고서에 “同團(參議部)은 他의 여하한 部隊보다도 활동목표를 鮮內로 하여 침입하고 있으므로 국경방면에서 발생하는 사건의 3분의 2 이상은 同團의 所爲이다”라고 밝혔다.562)<昭和 3年 7月 調, 在滿鮮人思想團體分布의 槪要 第2>(≪한국독립운동사≫4, 국사편찬위원회), 759∼760쪽.

 국내진입작전을 시행할 경우 통신원의 안내로 압록강변에 도착한 유격대원들은 입고 있던 군복 내지는 중국복장을 벗어버리고 준비해온 한복으로 고쳐 입었다. 그리고 일제의 감시망을 피해 도강하여 국내 통신원의 집에 도착하였고 상황을 판단한 후 작전지역으로 이동해 임무를 수행하였다.563)集安縣 당안관 자료.
≪東亞日報≫, 1928년 9월 11일.

 이와 같이 참의부 대원이 전개한 국내진입전 중 기록상에 나타난 몇 건만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 1924. 5. 19.:제2중대 1소대 소속의 張昌憲이하 대원 8명은 평북 위원군 馬嘶灘의 압록강변에서 소위 국경을 순시한다고 경비선을 타고 통과하던 조선총독 사이토 마코토(齋藤實) 일행을 공격함.

-. 1924. 5. 29.:제1소대 2분대장(중대 미상) 金昌化부대 7명은 평북 후창군 牛項嶺에서 일경찰대와 접전 후 1명 사살, 1명 중상을 입힌 후 이동하여 同郡 城千面 內洞의 營林廠을 습격하여 소각함.

-. 1924. 6. 24.:평북 자성군 임시주둔대 8명은 同郡內 민가에 잠복중인 일경찰대와 교전하여 일경 2명을 사살하였으나 일등병 金連學과 이등병 李吉詳이 전사함.

-. 1924. 7. 24.:제1중대원 李義俊은 평북 강계군 漁雷面에서 일제의 밀정 張得成을 총살함.

-. 1924. 8. 9.: 참의부 독립군 1대 평북 구성군 造岳洞 금광사무소와 창성군 德洞 금광사무소를 습격함.

-. 1924. 9. 27.:제1중대 소속의 소대장 李應瑞(일명:李白坡) 부대 8명은 평북 강계군 古臺洞에서 밀정 桂永八·桂龍熙·尹禎卨 등 3명을 사살하고 이동하여 다음날 公北面 香江洞에서는 밀정 池成龍을 사살함. 또 동년 10월 6일에는 위원군 渭松面 石浦洞에서 밀정 李贊鳳을 사살함.

-. 1925. 3. 29.:제1중대 독립군 20명이 평북 자성에서 일경과 교전함.

-. 1925. 10. 18.:參事 孫用俊이 지휘하는 1대 7명이 평북 강계군 外貴面 興判洞에서 일경 6명과 교전 후 퇴진함.

-. 1926. 7. 10.:제2중대 소속의 李壽興이 단독으로 국내진입작전을 감행하여 동대문의 東小門파출소를 습격하고, 柳澤秀·柳南秀를 동지로 포섭하여 9월 9일 안성군 부호 朴承六의 집과, 10월 20일 경기도 이천군 栢沙面의 玄芳주재소 및 백사면사무소를 습격함.

-. 1926. 11. 12.:참의부 許雲起 부대 6명이 평북 자성군 長士面 湖下洞에서 同地 주재소의 순사 5명과 교전함.

(≪獨立新聞≫·≪東亞日報≫·국사편찬위원회,≪韓國獨立運動史≫4·蔡根植,≪武裝獨立運動秘史≫·朝鮮總督府警務局,≪高等警察關係年表≫·集安縣 당안관 자료 등).

 위의 전투 중 중요한 것을 들자면, 1924년 5월 19일 압록강변에서 사이토 마코토(齋藤實) 조선총독이 승선한 선박을 선제 공격한 전투이다. 사전에 사이토가 압록강변의 일본군 국경수비대를 순시한다는 정보를 입수한 참의장 채찬은 제2중대 1소대 대원들을 특공대로 조직하여 평북 위원군 마시탄에 매복시켰다. 이 특공대는 총지휘관이 장창헌이었고, 제1소대장 참사 韓權雄, 伍長 李春和, 일등병사 金昌均·玄成熙·李明根·金呂河·田昌植외 8명으로 조직되었다. 아침 9시 경 사이토가 탄 경비선이 압록강을 따라 참의부 특공대원들이 매복해있는 지점에 나타났다. 순간 총지휘관 장창헌의 사격 명령이 떨어졌고, 특공대원들은 일제히 총격을 가하였다. 참의부 대원들의 순간적인 공격으로 당황한 일제의 국경순시선은 단 한번의 반격도 해보지 못한 채 전속력으로 도주하고 말았다. 비록 이 기습전에서 특공대원들은 사이토를 총살한다는 원래의 목표는 달성하지 못했지만 이 전투는 한국 독립군의 활동을 내외에 널리 알리는 계기가 되었다. 그리고 이 전투를 계기로 참의부 독립군의 용맹성은 더욱 고조되어 일제의 간담을 서늘하게 하는 전투가 이어졌던 것이다.

 한편 위에 기록된 참의부의 전투일지는 전체를 모두 기록한 것은 아니다. 다만 참의부가 주로 활동한 국내의 지역과 그 시기를 알아보기 위해 몇 가지를 선별한 것이다. 따라서 위의 일지를 살펴보면 참의부의 국내활동 지역은 압록강과 접한 평안북도의 위원·자성·구성·강계·창성·후창 등이다. 그리고 활발히 활동을 전개했던 시기는 1924년 중반부터 25년 말까지이다. 1926년 이후 참의부의 국내활동 사항은 점차 감소하다가 27년 이후로는 별로 나타나지 않는다.

 이와 같은 현상이 나타나게 된 이유는 1920년대 후반기로 가면서 참의부는 내부적으로는 신민부·정의부 등과 함께 독립군 통합운동을 모색하면서 어수선함을 보였다. 또 1928년 10월에는 재무위원장을 지낸 바 있는 한의제가 고동호·독고욱 등과 함께 鮮民府라는 친일단체를 조직하여 참의부를 배반하고 일제에 협조함으로써 조직내부의 분열이 심각한 지경에 이르렀다.564)<昭和 4年 9月 21日, 한족동향회 내경에 대하여>(≪독립운동사자료집≫10), 414∼419쪽. 외부적으로는 1925년 6월<삼시협정>체결 이후 갈수록 더해 가는 중·일의 탄압에 대항한 만주에서의 투쟁이 큰 몫을 하였기 때문이었다. 이 같은 이유로 참의부는 1920년대 후반에는 조국독립을 위한 주된 방략으로 삼았던 국내진입 유격전 대신 만주 내에서의 대일항쟁 내지 친일단체 척결에 진력하게 되었던 것이다.

 그런데 참의부군의 만주에서 투쟁은 중국측 자료에 의거 소소한 것까지 살피자면 존립 전 기간에 걸쳐 변함없이 많다. 예컨대 국내진입전에 주력하던 시기에도 작전을 준비하는 과정에서 수없이 중·일 군경대와 충돌하였다. 관할 부민을 관리하고 보호하기 위한 행정조치를 취하는 과정에서도 충돌이 일어날 지경이었다. 그리고 참의부의 분산되어 있는 근거지들을 일제나 중국의 군경대가 침입함으로써 발생하기도 하였다.

 그 같은 경우로 가장 대표적인 것이 1925년 3월 16일 전개된 고마령전투이다. 이 전투는 집안현 산중에서 참의부 간부를 비롯한 대원들이 중대군사회의를 개최하고 있을 때 밀정 李竹坡의 인솔로 일제의 초산 경찰대가 습격하여 일어난 것이었다.565)愛國同志援護會,≪韓國獨立運動史≫, 267쪽.
金承學,≪韓國獨立史≫(獨立同志會, 1956), 400∼401쪽.
회의 도중 대규모의 일제 경찰대의 습격을 받은 참의부 간부들은 죽음을 무릅쓰고 대항하여 양측은 장시간에 걸친 공방전을 전개하였다. 그러나 전투태세에 임하지 못하고 급습을 받은 참의부측은 육탄전까지 감행하였으나 결국 큰 피해를 입고 패하고 말았다. 참의장 崔碩淳을 비롯 田昌禧·崔恒信·全德明·安貞吉·金用武·金鶴松·潘昌炳·崔吉星·白明浩·張鏡煥 등 29명이 전사하고 제1중대 소대장인 田世用 등 많은 참의부 대원들이 부상당하였다. 이와 같이 1920년대 중반 재만 독립군단 중 가장 활발한 무장투쟁을 전개한 참의부는 그 근거지 자체가 일제의 표적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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