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편 한국사
  • 근대
  • 48권 임시정부의 수립과 독립전쟁
  • Ⅳ. 독립군의 재편과 통합운동
  • 3. 재만 독립운동단체의 민족유일당운동
  • 1) 민족통일전선운동의 대두

1) 민족통일전선운동의 대두

 1920년대 중반 이후 한국 독립운동계는 또 다시 항일민족전선을 통일해야 한다는 움직임이 일어났다. 민족운동가들은 1921년 4월 북경의 군사통일회의와 1923년 국민대표회의 등의 실패로 민족전선 통일에 부정적인 사고를 가지고 있었다. 그러나 효율적인 항일을 위해 국내외 모든 민족운동세력을 통일하는 것은 민족운동가들의 숙원 사업이었다. 이 일을 주창한 인물은 임시정부 국무령인 洪震으로 그는 민족의 대동단결을 위한 大黨 결성의 필요성을 역설하였다. 홍진은 1926년 7월 8일 임시정부 국무령 취임식에서 다음과 같은 3대 강령을 제시하였다.

① 비타협적 自主獨立의 新運動을 추진할 것

② 全民族을 망라하여 공고한 黨體를 조직할 것

③ 全世界 피압박 민족과 연맹하여 協同戰線을 조직하는 동시에 연락이 가능한 友邦과 제휴할 것

 이어 일찍부터 민족운동계의 통합을 호소하였던 安昌浩는 1926년 8, 9월 北京에서 사회주의자인 元世勳을 만나 이념과 노선을 초월한 민족의 대동단결을 촉구하였다. 이들은 같은 해 10월 10일부터 3차에 걸친 회합을 갖고 ‘大獨立黨組織北京促成會’를 조직하였다.625)金喜坤,≪中國關內 韓國獨立運動團體硏究≫(지식산업사, 1995), 245쪽. 이렇게 시작된 전 민족 단결을 위한 민족유일당 조직운동은 북경에 이어 상해·무한·남경·광동 등으로 퍼져갔고, 통합운동이 가장 절실한 만주로까지 빠른 속도로 이어졌다.

 1927년 초 吉林에 도착한 안창호는 그 해 2월 在滿韓人 약 500명이 운집한 吉林城 東大門 밖 大東公司에서 민족의 대동단결을 역설하였다.626)蔡根植,≪武裝獨立運動秘史≫(大韓國民公報處, 1985), 141∼142쪽. 이어 안창호는 정의부를 비롯한 만주 각 지의 독립운동 지도자들과 협의한 끝에 이를 본격적으로 실현하기 위한 회의를 개최키로 하였다. 전민족유일당을 구축하려면 먼저 전만주의 유일당을 구축할 필요가 있었던 것이다. 따라서 吉林縣 新安屯의 吉興學校에서 민족유일당 건립을 위한 全滿 독립운동단체 통일회의가 1927년 4월 15일부터 18일까지 4일간 총 52명이 참가한 가운데 개최되었다.627)<朝保秘第919號, 昭和 2年 5月 3日, 在滿鮮人團體統一會議開催ニ關スル件>(아연필100-4-035), 701쪽.

 회의에 참가한 단체 및 대표자들은 다음과 같다.

正義府:金東三·吳東振·高豁信·李光民·金元植·玄正卿·玄益喆·金學善·金履大·李 旭·李 俊·崔承一·崔一洽 外 4명

正義府 軍隊側:文學彬·梁世鳳·金錫夏·李雄 外 8명

南滿靑年總同盟:朴秉熙 外 十數名

韓族勞動黨:金應燮

中東線 方面(寧古塔):馬龍德

기타 안창호·崔東旭·李一世·李尙德·朴治山·尹平·金東勳 外 數名이 참가함(<朝保秘第919號, 昭和 2年 5月 3日, 在滿鮮人團體統一會議開催ニ關スル件>, 아연필 100-4-035, 703∼704쪽).

 전만 독립운동단체의 통일을 목적으로 한 회의였으나 대개가 반석과 길림에 본부를 둔 남만지역을 무대로 활동한 단체들이 참가하였다. 하지만 이들 단체들은 서로가 대립되는 노선을 가졌다. 따라서 회의는 민족주의계의 정의부와 사회주의계통의 남만청총 및 한족노동당이 그들의 이념을 서로 접고 민족통일전선을 이루기 위한 것이 되고 말았다. 이는 안창호가 북경에서 사회주의자인 원세훈과 이념 및 노선의 합일점을 찾아 민족의 대동단결을 구하고자 노력했던 것과 같은 맥락에서 시도되었던 것이다.

 대표들은 회의 의장에 이탁, 서기에 고활신과 최동욱을 선임한 후 전만 독립운동계의 통일을 위한 협의를 시작하였다. 이들은 먼저 민족운동 통일기관의 명칭을 朝鮮革命黨으로 하자는 안건을 상정한 후 강령과 서약문 草案을 다음과 같이 제정하였다.

<강 령>

-. 제국주의 일본을 파괴할 것.

-. 미래의 운동은 사유재산제를 폐지하고, 토지국유화를 기할 것.

-. 각 약소국 피압박 민족과 악수하여 통일운동 전선에 설 것.

 

<서약문>

조선의 절대 독립을 이루고 민족이 평등을 향유하려면 오직 민족적 대동단결을 이루어야 하므로 우리들은 심혈을 기울여 민족적 혁명당을 조직하기 위해 당 조직의 기본인 다음의 조건을 수립하여 절대적으로 행할 것을 서약한다.

-. 本 同盟會에서 제정한 강령에 절대 복종한다.

-. 본 동맹회에서 의결한 일체의 사항을 적극적으로 행한다.

-. 종래 黨的 관계에 있는 자는 그 당을 해체하거나 變體해서라도 본 동맹에서 조직한 당에 집중시키도록 노력한다.

-. 본 동맹 또는 본 동맹에서 조직한 당으로부터 지정한 기간 내에 기존 당의 해체가 불가능할 때에는 당연히 그 당과 일체의 관계를 단절한다.

(<朝保秘 第919號, 昭和 2年 5月 3日, 在滿鮮人團體統一會議開催ニ關スル件>, 아연필 100-4-035, 701∼703쪽).

 이상과 같은 강령과 서약문의 초안에 대해 각 대표들은 이념을 합일시킨 최종안을 만들기 위해 집중 토의를 벌였다. 그러나 회의가 개최되기 이전까지 민족주의나 사회주의 중 한 가지 이념에 집착해 있던 대표들은 결국 합일점을 도출하지 못하고 회의를 종료하였다. 18일 회의가 끝난 후 대표들은 전만주의 통일전선 구축을 위해서는 서로간의 이념과 노선을 합일시킬 더욱 차분한 준비기간이 필요할 것으로 판단하였다.

 그 같은 준비를 하기 위해 時事硏究會라는 기관을 조직하고 이탁·최동욱·박병희·이일세·김응섭 등 5인을 대표위원으로 선출하여 이들의 책임하에 방안을 강구토록 하였다. 시사연구회의 활동범위와 운영에 대한 지침은 다음과 같다.

-. 본 회의 목적은 전민족유일당 수립의 방침 및 운동의 발전책을 연구함.

-. 본 회의 조직범위는 만주로 함.

-. 본 회의 회원자격은 본 회의 목적에 찬성하는 각 운동 단체의 대표 또는 개인으로 함.

-. 중앙기관 및 지부를 설치함.

-. 중앙에 중앙위원 5명 이상, 지부에 지부위원 3명 이상을 둠.

-. 본회의 경비는 참가단체에서 부담함

(<朝保秘 第919號, 昭和 2年 5月3日, 在滿鮮人團體統一會議開催ニ關スル件>, 아연필 100-4-035).

 즉 시사연구회는 만주 내에서 민족유일당 수립에 찬성하는 단체 또는 개인 모두를 수용해 중앙과 지부를 조직하여 그 방침을 연구하는 단체였던 것이다.

 한편 시사연구회가 결성되기 전 1926년 5월 북만의 寧古塔에 설치되어 만주 내의 한인 사회주의자들을 총괄하던 조선공산당 만주총국에서도 1927년 1월에 민족유일당 운동과 관련한 활동지침을 다음과 같이 발표하여 참여를 표명하였다.

① 통일적 민족유일당을 전제로 하고, 이에 개인 본위로서 전 만주의 정예분자를 망라하여 전만 단일기관으로 한다. 국내외를 통하여 민족유일당이 성립되는 날에는 무조건 이에 참가할 것. 그 조직 방법은 당조직 방법에 준거하여 비밀 조직으로 할 것.

② 앞 항의 민족유일당을 신중히 조직하기 위하여 민족기관 조직위원회를 총국지도 아래에 설치할 것

(京城地方法院檢事局,<崔元澤等第一次間島共産黨事件押收文書譯文綴>, 81쪽;金昌順·金俊燁,≪韓國共産主義運動史≫4, 청계연구소, 1986, 343쪽에서 재인용).

 조선공산당 만주총국의 지침에 따라 만주에서의 민족유일당 운동은 사회주의계통도 적극 참여할 수 있는 여건이 마련되었다. 더구나 1927년 6월 29일 조선공산당 중앙에서는 만주총국에 “협동전선적 단일당을 조직하는 출발점은 시사연구회로 하라”는 지령을 내렸다.628)京城地方法院檢事局,<崔元澤等第一次間島共産黨事件押收文書譯文綴>, 77쪽(金昌順·金俊燁, 앞의 책 4, 345∼346쪽에서 재인용). 따라서 시사연구회는 만주 내의 민족주의자들은 물론이고 사회주의계통에게도 민족유일당 결성을 촉구할 수 있게 되었다.

 만주 내의 이러한 분위기 속에서 민족유일당 결성을 연구하고 준비한 시사연구회의 대표위원 5인은 1927년 12월중 盤石縣에서 ‘南滿革命同志聯席會議’를 개최하기로 결정하고 각지의 항일단체에 이 사실을 통고하였다.629)경상북도 경찰부,≪高等警察要史≫, 125쪽. 그러나 이 회의는 정의부의 경우 의용군 사령관인 吳東振이 같은 해 12월 일경에 피체되어 혼란스러웠고, 다른 단체들은 준비가 부실하여 개최되지 못한 것으로 판단된다. 하지만 이와 같은 분위기 속에서도 시사연구회는 민족유일당 성립을 위한 준비 작업을 꾸준히 추진하였다.

 시사연구회의 전 만주 민족유일당 성립을 위한 준비가 한창 이루어지고 있을 무렵인 1928년 1월 홍진과 鄭遠이 상해에서 만주의 통일운동을 촉진시키기 위해 파견되었다. 이들은 남만 각지를 순방하면서 민족유일당 성립의 필요성을 역설하였다.630)위와 같음. 그런가하면 정의부의 중앙집행위원인 김동삼과 金元植 등 2인도 같은 해 4월 신민부를 방문하여 민족의 대동단결을 역설하였다.631)蔡根植, 앞의 책, 147쪽.

 이와 같이 남북 만주에 산재한 한인 민족운동자들간에 민족유일당을 조직하기 위한 분위기가 고조되어 갔다. 따라서 이들은 협의하여 1928년 5월 12일부터 樺甸縣 城興學校에서 회의를 개최하였다.632)<昭和 3年 6月 29日附 朝鮮總督府警務局長發信 外務省亞細亞局長宛, 全民族唯一黨組織會議開催의 件>(국사편찬위원회, 앞의 책 4), 861쪽. 참가 단체 및 대표자는 민족주의계 및 사회주의계통의 단체를 합하여 18개 단체에 39명이었다. 그러나 이 회의에는 참의부 및 신민부측의 인사는 참여하지 못하였다. 참의부의 경우는 대표자를 선출하여 파견하였으나 중국측의 경비가 삼엄하여 중도에 포기하였고, 신민부는 대표로 선출된 申肅이 회의가 종료된 후에야 도착하여 참석치 못하고 말았다.633)<昭和 3年 6月 29日附 朝鮮總督府警務局長發信 外務省亞細亞局長宛, 全民族唯一黨組織會議開催의 件>, 862쪽.

 5월 12일부터 26일까지 15일간 대표들은 화전현과 반석현 내에서 장소를 세 번 옮겨가며 회의를 진행하였다. 대표들은 우선 李貫一(일명:李奎東)·池靑天·李義太·李光民·李道 등 5명을 회의 진행위원으로 선출하였다. 그리고 세계의 정세와 일본제국주의 타도 방안을 위한 연설회를 열고 각지에서 수집된 종합적인 정보를 바탕으로 본격적인 논의를 시작하였다.

 회의에서 민족유일당 결성의 필요성을 공감한 대표들은 그를 실천에 옮길 집행위원 21명을 선출하였다.634)<昭和 3年 6月 29日附 朝鮮總督府警務局長發信 外務省亞細亞局長宛, 全民族唯一黨組織會議開催의 件>, 861쪽. 하지만 이어 토의된 민족유일당 결성 방법론에서 각 대표들간에 이견이 노출되기 시작하였다. 이는 자신들이 이미 속해 있는 단체의 형편에 따라 통일의 방법을 달리했기 때문이다. 제기된 통일 방법론은 團體本位組織論·個人本位組織論·團體中心組織論 등 세 가지였다. 단체본위조직론은 장차 성립될 유일당은 기존의 작은 단체를 기초로 하여 그들을 연합하는 방식으로 조직되어야 한다는 논리이다. 개인본위조직론은 기존 군소 단체는 대부분 지방적 또는 파벌적으로 결합된 단체이므로 이 단체들을 완전히 무시하고 철저하게 개인위주로 유일당을 구성해야 한다는 논리이다. 마지막 단체 중심조직론은 기성 단체 중 가장 권위가 있는 유력한 단체를 중심으로 군소 단체가 종속되어 결합한 다음 점차 그 세력을 확충해 나가야 한다는 것이었다.635)<昭和 4年 4月 22日附 在支朝鮮人의 民族運動과 共産主義 運動과의 關係>(≪한국독립운동사≫4, 국사편찬위원회), 874쪽.
<昭和 3年 12月 3日, 선인 정의부 상황의 건>(≪독립운동사자료집≫10, 독립운동사편찬위원회), 403∼404쪽.

 방법론에 대한 이러한 의견 차이는 좁혀지지 않아, 민족유일당 성립을 위한 15일간의 회의는 결국 큰 성과를 거두지 못한 채 끝나고 말았다. 각 대표들간에는 단체본위조직론과 개인본위조직론 등 두 가지 안건 중 한 가지를 지지하며 분열되었다. 따라서 단체본위조직론을 주장한 단체와 대표들은 全民族唯一黨協議會를 결성하게 되었고, 개인본위조직론을 주장한 측은 全民族唯一黨促成會를 결성하였다. 두 계열로 나뉘어진 단체와 대표들을 보면 다음과 같다.

단 체 명 근거지 대 표 자
北滿靑年總同盟 中東線 黃基贊·李明道
南滿靑年總同盟 磐石縣 李鐵·金萬全
東滿靑年總同盟 間 島 李義太
淞江靑年總同盟 黑龍江省 孫景鎬
麗族公議會 黑龍江省 李光民
哈長靑年會 哈長線 尹丁雨·金文
在滿農民同盟 磐石縣 朴東初·李道日·金應燮

전민족유일당촉성회 가담 단체와 대표자 명단

단 체 명 근 거 지 대 표 자
樂山일꾼組合 伊通縣孤楡樹 李宗洛·朴光
拉法靑年會 額穆縣 韓相善
다물團 興京縣 李靑雨·李東林
正義府 樺甸縣 李靑雨·李貫一·李鍾乾·高豁信·梁世鳳·金文擧·
裵洛山·康濟河·全中波·李雄·李世昌·吳世鎭
新光靑年會 柳河縣 安允植·張成德
南滿靑年聯盟 興京縣 尹平·崔鳳
農友會 懷德縣 金世光
撫本靑年會 撫順縣 金洪海·朴永世
北滿朝鮮人靑總 中東線 金仁
東滿朝鮮人靑總 間島 金武

전민족유일당협의회 가담 단체와 대표자 명단

(<昭和 3年 6月 29日附 朝鮮總督府警務局長發信 外務省亞細亞局長宛, 全民族唯一黨組織會議開催의 件>,≪韓國獨立運動史≫4, 국사편찬위원회, 861∼862쪽).

 비록 참의부와 신민부는 빠졌지만 間島를 포함한 남북만의 독립운동 단체들이 대거 참여한 회의에서 대표들은 합일을 보지 못하고 결국 이와 같이 두 파로 갈라서게 되었다. 사회주의 진영은 1927년 1월 조선공산당 만주총국이 민족유일당운동에 대한 그들의 입장을 밝힌<당만총지령 제4호>에 의거 개인본위 조직인 촉성회측에 가담한 것으로 보인다.636)京城地方法院檢事局,<崔元澤等第一次間島共産黨事件押收文書譯文綴>, 81쪽(金昌順·金俊燁,≪韓國共産主義運動史≫4, 청계연구소, 1986, 343쪽에서 재인용)

 양파로 나뉘게 된 후 촉성회측 단체들은 협의회측을 거부하는 이유에 대해, 협의회측이 주장하는 단체본위로 유일당을 성립시킬 경우 중앙집권적이지 못하여 성공적인 혁명을 이룰 수 없다고 주장하였다. 촉성회측의 주장은 민족유일당이 조국광복을 위한 힘을 발휘하려면 중앙집권화한 하나의 체제로 구축되어야 하는데 단체가 연합하여 黨을 구성하면 그 같은 체제를 구축할 수 없다는 것이었다.637)<昭和 3年 9月 18日 朝鮮總督府 警務局長發信 外務省亞細亞局長宛, 全民族唯一黨組織에 關한 件>(≪한국독립운동사≫4, 국사편찬위원회), 865쪽. 촉성회측의 논리에 대해서는 협의회측을 지지하는 정의부 간부 중에도 동조자가 있었다. 즉 池靑天·裵活山 등 정의부 간부들은 협의회의 논리를 부정하고 촉성회측에 가담하였다.638)위와 같음.

 이들 두 파는 이후 각기 나름대로 유일당운동을 강구하게 되었다. 촉성회는 먼저 일본 제국주의를 박멸하고 정치적·경제적으로 평등한 생활이 이루어질 수 있는 국가를 건설하기 위한 민족유일당을 설립하자는 취지를 발표하였다.639)<昭和 4年 4月 22日附 在支朝鮮人의 民族運動과 共産運動과의 關係>(≪한국독립운동사≫4, 국사편찬위원회), 876쪽. 그리고 1928년 5월 26일 개최된 在中韓人靑年同盟 창립대회를 통해 단체본위에 의존하여 협의기관의 명목하에 民族唯一協同戰線黨을 조직하는 것에 반대하며 民族唯一黨在滿促成同盟과 각 지역 촉성회를 지지할 것을 결의하였다.640)黃敏湖,<滿洲地域 民族唯一黨運動에 관한 硏究-唯一黨促成會議를 中心으로->(≪崇實史學≫5, 1988), 181쪽.

 또 정의부를 중심으로 한 협의회에서는 ① 민족유일당 조직을 준비한다 ② 革命先烈의 유업인 조선혁명 완성을 위하여 적극적으로 분투 노력한다 ③ 全民族 각층에 공통된 정치적 불평을 추출하여 민족유일당으로 총 집중한다 등의<실천강령>을 제정하고 이를 위해 노력하였다.641)<昭和 3年 12月 3日, 선인 정의부 상황의 건>(≪독립운동사자료집≫10, 독립운동사편찬위원회), 406쪽. 그리고 민족유일당의 기관지로 월간≪前衛≫를 발간하기로 결정하였다. 또한 협의회가 이후 일을 추진하면서 지출해야 할 예산을 편성하고, 1928년 6월에는 18조에 달하는 협의회 규약까지 정하여 발표하였다.642)<昭和 3年 9月 18日 朝鮮總督府 警務局長發信 外務省亞細亞局長宛, 全民族唯一黨組織에 關한 件>(≪한국독립운동사≫4, 국사편찬위원회), 866∼870쪽.

 전 만주 지역을 대상으로 민족유일당을 조직하기 위한 운동은 참가단체들의 의견이 합일되지 않아 결국 성공하지 못하였다. 하지만 이 운동의 추진에서 합일점을 찾지 못했다하여 재만 독립운동 단체들이 민족통일전선 구축을 포기한 것은 아니었다. 더욱 꾸준히 그 방안을 모색하였고 이후부터는 1925년부터 이룩하고자 노력하였던 정의·참의·신민부 등 3부를 통합시키려는 운동이 본격적으로 진행되었다.

개요
팝업창 닫기
책목차 글자확대 글자축소 이전페이지 다음페이지 페이지상단이동 오류신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