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편 한국사
  • 근대
  • 48권 임시정부의 수립과 독립전쟁
  • Ⅴ. 의열투쟁의 전개
  • 2. 의열투쟁 본격화의 배경과 계기

2. 의열투쟁 본격화의 배경과 계기

 3·1운동은 민족성원 대다수의 식민통치 거부의사를 강력히 표명하고 민족독립에 대한 열망과 의지를 만방에 선양했다는 점에서 분명 그 의의가 컸다. 그러나 일제의 잔혹한 탄압으로 민족독립의 목표는 끝내 달성되지 못하였다. 이에 다수의 독립운동자와 일반 대중은 비폭력 시위항쟁이 갖는 한계를 절감했고, 폭력수단을 총동원한 지속적인 투쟁에 의해서만 일제를 구축하여 독립을 얻을 수 있음을 깨닫게 되었다. 특히 만주·노령 쪽의 망명 독립운동자들이 그런 신념을 확고히 다져서, 조직적인 무장투쟁을 독립 성취의 유일한 방도로 상정하였다. 이에 따라 무장독립운동 단체와 독립군 부대들 조직구성에 박차를 가했으며, 군사활동이 불가능한 지역을 염두에 둔 강력한 폭력투쟁의 방법도 따로 강구되었다.

 이런 인식과 사고는 성립 직후의 上海 임시정부 내에도 유입되어, 그에 부응하는 실천적 움직임이 일찌감치 태동했다. 1919년 4월 20일 경에 趙素昻과 鄭元澤이 李東寧·李始榮의 지원으로 상해 공동조계에 폭탄제조 학습소를 비밀리에 설치하여 일단의 청년들을 훈련시키기 시작한 것이663)鄭元澤 著, 洪淳鈺 譯,≪志山外遊日誌≫(探求堂, 1983), 195∼196쪽. 그 단적인 예이었다. 그것은 앞서 3월에 조소앙이 작성하여 해외 독립운동가 39인의 연명으로 吉林에서 발표된<대한독립선언서>에서 촉구되었던바 “육탄혈전으로 독립을 완성”하기 위한 첫걸음이기도 했다. 이어서 6월에는 “炸彈으로 구국의 책임을 부담”할 목적의 救國冒險團이 약 40명 인원으로 조직되어, 단원에 대한 폭탄제조법의 교수를 바로 시작하였다.664)독립운동사편찬위원회,≪독립운동사자료집≫9(1975), 631쪽.
國會圖書館 編,≪韓國民族運動史料(中國篇)≫(1976), 162쪽.

 그 해 9월에 漢城政府 및 노령 國民議會와의 통합을 거쳐 재편된 대한민국임시정부는 전보다 훨씬 더 전투적인 방향으로 독립운동 노선의 가닥을 잡아갔다. 전쟁에 의해 일제를 격멸함을 독립 성취의 최상위 전략으로 설정하고, 대일결전의 기회를 맞을 때까지는 각 부문의 민족역량을 증강시켜 가는 ‘준비’ 단계로 삼으며, 이 단계에서는 폭력과 비폭력, 무장과 비무장 수단을 두루 동원하는 복합전술로써 일제에 대항해 가기로 노선 표준을 정한 것이다.665)金榮範,<義烈團의 創立과 초기 路線에 대하여>(≪韓國學報≫69, 一志社, 1992), 180∼181쪽.

 그러한 항전의 일환으로 일제 요인을 섬멸하고 반민족분자를 응징해 갈 것이라는 결의도 임시정부는 천명하였다. ‘7可殺’ 범주를 설정하여 그 판별기준과 내용을 공표한 일이 그것이다. 임시정부에 의해 지정된 ‘7가살’의 각 하위범주와 구체적인 대상은 다음과 같았다.

① 敵魁:조선총독·정무총감 등 일제 고관. 한국독립을 강경하게 반대하는 유력 일인. 한국독립운동과 그 지도자를 誹毁하는 정치가·학자·신문기자·종교가 등 不逞日人. 우리 동포를 학대해 온 일인 헌병·경관 등.

② 賣國賊:한국독립을 반대하고 적의 통치하에 있기를 주장하는 凶賊들.

③ 倀鬼:고등정탐. 혹은 일반형사로서 독립운동의 비밀을 적에게 밀고하거나 지사를 체포하며 동포를 구타하는 醜類들.

④ 친일부호:자기 재산의 안전을 도모키 위해 적과 통하여 군대와 경찰의 보호를 받거나 적국으로 도망친 자. 특히 독립운동에 헌금키를 누차 권유함에도 듣지 않거나, 헌금을 권유하는 지사를 밀고한 자.

⑤ 적의 관리된 자:관리된 자로서 독립운동단체의 퇴직권유를 세 번 이상 받고도 改悟할 줄 모르는 자. 독립운동을 비훼하거나 국민의 애국심과 용기를 떨어뜨리는 자. 동포를 압박하는 자.

⑥ 불량배:浮言浪說로써 독립운동을 해치거나 민심을 현혹시킨 자. 독립운동자를 冒稱하고 애국의연금을 횡령한 자. 변심 또는 㥘愉로 임무를 저버린 자. 기밀을 누설하거나 신의를 배반한 자.

⑦ 모반자:독립운동 종사 중 변절한 자. 私黨을 만들어 정부를 비훼 반항하는 자.

 (≪獨立新聞≫제43호, 1920년 2월 5일).

 동년 5월 경에 공포된<시정방침>에서도 청년 敢死隊와 炸彈隊를 조직하여 “적괴 및 창귀 격살”과 “영조물 파괴”를 단행할 것을 언명했다시피, 임시정부는 전담 행동대에 의한 암살·파괴의 작탄투쟁을 독립전쟁 준비단계에서의 유력한 대적방책의 하나로 삼고자 했다. 아울러 그 방책을 실천에 옮길 의지와 의사도 여러 경로로 표명했다.

 ‘비무장에서 무장으로’라는 독립운동의 새로운 조류는 만주와 극동러시아에서 독립군조직들이 새로 결성되고 정비되어 가는 데서도 역력히 감지될 수 있었다. 그러나 독립군 부대들의 병력과 장비는 일본군에 비하면 열세를 면치 못함이 사실이었다. 이에 그러한 약점을 벌충하면서 독립군의 사기를 앙양시킨다는 의미에서도 별동조직의 기습공격과 같은 방식으로 적에게 타격을 가하는 항전활동의 필요성이 대두했다.

 한편 국내에서는 임시정부의 聯通制 및 交通局 조직과 연관을 맺고서 주로 군자금 수합의 목적으로 1919년 하반기부터 속출한 비밀결사들이 조직체제를 정비하여 무장 또는 준무장 조직으로 전환하거나 새 무장조직이 결성되기도 하였다. 또한 1920년 경부터 강력한 무장행동이 빈발하기 시작했다. 이들 무장조직의 활동은 군이나 도 이내의 국지적인 범위에서 독자적으로 전개되기도 했지만, 많은 경우는 만주지역의 무장단체나 상해 임시정부 및 그 외곽단체들과의 연계 방식으로 전개되었다. 그리고 어느 경우이건, 5명 전후 인원의 便衣遊擊組나 결사대가 잠행하며 벌이는 일제기관 파괴, 경관과 밀정 사살, 악질 관공리와 친일부호 및 주구 처단, 군자금 수취와 확보 등이 주된 활동내용을 이루었다.

 이런 여러 추세가 서로 맞물리는 상황 속에 1920년대 초부터 의열투쟁이 주요 독립운동방략의 하나로 급부상하였다. 결사적 태세로 강도 높은 의열투쟁을 계속 벌여가면 그것이 낳을 충격-공포 효과에 의해 일제가 결국은 식민지 경영을 포기하게 될 것이라는 논리가 우선 내세워졌다. 또한 이러한 논리는 군사조직에 의한 무력투쟁과 전술적으로 배합되어 전과상승의 큰 효과를 올릴 수가 있으며, 민중직접혁명 방략과 관련해서는 대중봉기를 촉발하게 될 선도적 투쟁양식으로 인식되었다. 소수 인원과 적은 비용으로 기동성과 집중성을 최대한 살리며 수행되는 암살과 파괴활동은 군사행동 못지않게 위력적인 성과를 낳는 투쟁방법이 될 것이며, 그런 활동을 통한 비타협적 투지의 지속적인 발현이 일반 민중을 부단히 각성·고동시켜 줄 것으로 기대되었다.

 ‘무장투쟁’의 범주에 속하면서도 의열투쟁에는 독립군의 군사활동(‘무력투쟁’)과 대비되는 전술적 특징이 있었다. 전자는 비교적 큰 규모의 병력과 장비, 일정한 숙영지 겸 근거지, 조직편제와 지휘체계, 적어도 이 세 가지를 요했다. 이에 반해 의열투쟁은 순전히 개인적인 결의와 준비로써만 이루어지거나, 아니면 소집단 규모의 비밀결사나 큰 조직체에 속한 하위 별동조직의 독자적 판단과 선택에 의해 목표물과 행동이 결정되는 성질의 것이었다. 노출될 우려가 큰 근거지의 상비나 조직체계의 완비를 반드시 요하는 것은 아니라는 점도 전자와 상이했다. 그리고 의열투쟁의 바로 이런 측면들이 그것을 독립군의 조직과 군사작전의 전개가 매우 어렵거나 아예 불가능한 시·공간과 상황에서 최우선으로 채택될 수 있는 최선·최량의 대체투쟁방책으로 여겨지게끔 하였다.

 3·1운동 직후부터 의열투쟁의 열기가 급속도로 고조되고 단시일에 본격화 국면을 맞게 된 데는 이런 여러 계기와 요인들이 복합적으로 작용했던 것이다.

<金榮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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