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편 한국사
  • 근대
  • 48권 임시정부의 수립과 독립전쟁
  • Ⅴ. 의열투쟁의 전개
  • 3. 3·1운동 직후와 1920년대의 의열투쟁
  • 2) 1921년 이후의 의열투쟁 양상과 추이
  • (1) 의열단의 국내외 투쟁

(1) 의열단의 국내외 투쟁

 국내외를 망라하여 1920년대의 의열투쟁사에서 가장 활동적이고 가장 선도적인 모습을 보여준 조직은 의열단이었다. 활동 기간과 지속도, 거사(추진)의 빈도와 실적, 파장과 영향, 어느 면을 보더라도 단연 으뜸이었다. 의열단이 적어도 1920년대 전반기의 암살파괴운동을 상징하는 이름이 되고, 나아가 일제 강점기 의열투쟁의 대명사요 그 용어의 어원으로까지 여겨지는 데는 그만한 이유가 있는 것이다.

 의열단은 이미 창단시에 일곱 부류의 암살대상(조선총독 이하 고관, 군부 수뇌, 대만총독, 賣國賊, 친일파 거두, 敵探, 반민족적 土豪劣紳)과 다섯 가지의 파괴대상(조선총독부, 동양척식주식회사, 매일신보사, 각 경찰서, 기타 왜적 중요기관)을 선정해 놓고 있었다.697)朴泰遠, 앞의 책, 27∼28쪽. 단의 활동목표가 식민지 지배의 핵심기관(정치기관, 수탈기구, 선전기관, 폭압기구)과 그 수뇌·요인 및 친일 민족반역자 집단의 제거·숙청으로 처음부터 확정되어 있었다. 그리하여 의열단은 초지일관으로 1921년 이후에도 줄기차게 투탄·저격 거사를 기도하고 실행하였다.

 1920년의 두 차례 폭탄거사에 이어 1921년 9월 중순에도 의열단은 대담무쌍한 방법으로 투탄거사를 감행하여 성공시켰다. 이는 신입단원 金益相이 조선총독부 청사 안으로 유유히 걸어들어가 폭탄 두 발을 던져 터뜨리고는 잠적하여 북경의 본부로 무사히 귀환한 사건이다. 1922년 3월 28일에는 상해 黃埔灘 부두에서 일제 침략군부의 거물인 육군대장 타나카 기이치(田中義一)를 암살하기 위한 투탄저격 거사를 벌였다. 그러나 김익상·吳成崙·李鐘岩이 각각 제1선, 제2선, 제3선을 담당한 이 거사는 폭탄이 불발하고 탄환이 빗나가는 바람에 실패로 돌아갔고, 영·미·중국인 사상자가 발생한 데 대한 비난까지 받아야 했다. 그 후 의열단은 상해파 高麗共産黨으로부터 ‘레닌자금’의 일부를 지원받아698)김영범,≪한국 근대민족운동과 의열단≫(창작과비평사, 1997), 88쪽. 상해에 열두 군데의 폭탄제조소를 설치하고 헝가리인 기술자를 초빙하여 성능 좋은 폭탄을 자체 제조하고 상비할 수 있게 되었다.

 1922년 여름, 의열단은 임시정부 재무총장 이시영의 요청으로 국내 부호들로부터 독립운동자금을 거둘 것을 계획하고, 우선 원활한 징수 목적을 위해 서울에서 폭탄거사를 단행키로 했다. 거사 실행자로 선임된 단원 김상옥이 먼저 서울로 잠입한 후 폭탄이 밀송되어 오기를 기다리고 있던 1923년 1월 12일에 종로경찰서가 누군가의 척탄에 의해699)김영범, 위의 책, 76쪽에 투탄자에 관한 엇갈리는 기록과 증언들이 제시되어 있음을 참조. 대파되었다. 사건 수사에 나선 경기도경찰부는 김상옥이 입국해 있음을 탐지하고, 그를 범인으로 지목하여 효제동의 은신처를 습격했다. 김상옥은 겹겹이 포위한 경찰병력과 대치하여 세 시간이나 총격전을 벌이다 최후의 일발로 자결 순국하였다.

 위의 거사계획과는 별도로 의열단은 이르쿠츠크파 고려공산당 조직과의 합작에 의한 대규모의 국내 폭탄거사도 추진하였다. 행동대장 역을 맡은 金始顯은 경기도경찰부 경부 黃鈺의 은밀한 도움으로 1923년 3월 초에 18개의 고성능 폭탄을 서울로 갖고 들어왔다. 신의주와 안동현에 보관시켜 둔 나머지 18개도 곧 반입시킬 계획이었다. 그러나 서울 잠입 후 이틀만에 거사 요원과 조력자 전원이 피검되어, 제2차의 적 기관 및 요인 총공격 계획은 수포로 돌아갔다. 金在震의 밀고 때문이었든700)蔡根植, 앞의 책, 183·184쪽.
金承學, 앞의 책, 261쪽.
황옥을 끌어들인 모험의 대가였든,701)김영범, 앞의 책, 94∼97쪽. 의열단 조직을 일망타진하려 한 시라카미(白上佑吉) 경기도 경찰부장의 치밀한 계략이 있었다는 지적도 재판 과정에서 나왔다. 뼈아픈 실패요 인적 역량의 큰 손실이었다.

 1923년 1월 상해에서 국민대표회의가 개최된 후, 의열단은 申采浩가 작성해 준<조선혁명선언>을 발표하여 암살파괴운동의 논리와 이념적 지표를 당당히 천명했다. 그 영향이었던지, 국민대표회의에 참석중인 각지 운동단체들이 4월 1일 국내·일본·만주에 암살 임무의 6개 결사대를 파견할 것을 결의했고,702)≪東亞日報≫, 1923년 3월 22·24·31일.
金度亨, 앞의 글, 214쪽 재인용.
의열단 가입자도 크게 늘어나 단원 수가 약 150명에 이르렀다. 3년 6개월만에 단원 수가 10배 이상 늘어난 것이다.

 이에 의열단은 일제의 심장부를 겨냥하는 대규모 광역거사를 추진하였다. 일본 關東軍이 장악하고 있는 남만주철도를 폭파하고 그 연변을 교란시키는 양동작전을703)伊藤武雄 外 編,≪現代史資料≫31, 滿鐵 1(東京:みすず書房, 1966), 580쪽. 서곡으로 하여 서울과 동경에서 대대적인 암살파괴활동을 벌인다는 계획이었다. 그리하여 결사대원 16명을 파견하기로 계획된 국내거사를 위해서 상해 의용단 및 북경 천도교도 조직과 제휴했고, 회기 중의 제국의회 습격과 동경거사를 위해서는 朴烈 등의 한인 아나키스트그룹과 공동행동을 하기로 밀약하여 선발대를 보내고 폭탄 50개의 이송 준비까지 마쳐두었다.704)김영범, 앞의 책, 111∼113쪽. 그러나 10월 중 실행 예정이던 광역-동시거사 계획은 9월 1일의 關東大地震으로 좌절되었다. 군중폭동 예방책으로 일제가 조작한 유언비어로 인해 동경의 6천여 한인들이 학살되었는데, 그 와중에 선발대원들도 다수 희생되고 만 것이다. 또한 박열은 일왕 암살 모의 혐의로 체포되고, 상해에서는 폭탄 은닉처가 일경의 급습을 받아 50개 모두 압수되었다.

 이에 의열단은 다시 북만주의 무장단체 赤旗團과의 합작으로 일본 황태자 히로히토(裕仁)의 결혼식 일자를 전후한 1924년 1월 경에 폭탄 300개로 동경거사를 결행하려 했다. 그러나 거사자금이 전혀 조달되지 않아 계획이 무산될 위기에 처했다. 이에 발분한 단원 金祉燮이 제국의회 폭파를 목적으로 상해로부터 일본으로 밀항했는데, 의회가 휴회중임을 안 그는 1월 5일 저녁, 황궁으로 접근하다 경비병에게 저지당하자 가지고 간 폭탄 3개를 궁성 입구의 니주바시(二重橋)에 던졌다. 항해중에 스며든 습기 탓으로 폭탄은 모두 불발했으나, 그의 용감한 단신 폭탄거사 기도에 일제는 또한번 크게 경악했다.

 거듭된 실패의 역경과 자금궁핍의 난관을 헤쳐나가며 의열단은 1924년에도 동경 총공격과 민중봉기 촉발 목적의 국내거사 계획을 계속 추진하였다. 3월 하순에 단원 3명이 일본으로 잠입하여 5월 총선거 및 임시의회 개회를 기한 거사를 준비하였고, 6월에도 統義府와 합작에 의한 일본거사를 추진하였다. 11월 말에는 의열단이 결사대원 30여 명을 한 달 전에 국내로 들여보냈다는 기사가 각 신문에 실려서, 총독부 당국이 민심불안을 이유로 모두 압수하기도 했다.705)朝鮮總督府警務局,≪諺文新聞差押記事輯錄(東亞日報)≫(1932), 219쪽·≪同 (朝鮮日報)≫(1932), 167쪽·≪同 (時代日報)≫(1932), 74쪽. 1924년 말과 1925년 초에도 일·소 국교 재개에 분개한 의열단원들이 일본에서의 거사를 위해 잠행하고 있다는 보도가 잇따라 나오곤했다. 그럼에도 이들 거사계획은 추진단계에서 번번이 좌절되어 어떤 가시적 성과를 거두지 못했다. 자금난과 일제 관헌의 감시망, 첩보망이 더욱 주밀해졌기 때문이었다.

 1925년으로 들어서면서 의열단 지도부는 독립운동의 주·객관적 여건과 내외형세가 그 동안 크게 변했고 현재도 급변하고 있음을 절감했다. 이들은 암살 파괴 거사가 대중 일반을 각오시켜 일제봉기의 격발제가 될 가능성이 거의 없는 것으로 판단하였다. 그보다는 농민·노동자·청년 대중의 조직화와 체계적인 의식화가 비록 시간은 좀 걸릴지라도 실질적인 효과를 낳을 대안으로 부각되었다. 사회주의운동 진영의 일각에서 암살파괴운동에 대해 가하는 비판도 그런 맥락에서 나온 것이었다.

 이런 사정들을 놓고서 고민하던 의열단 지도부는 암살파괴운동 일변도의 활동이 이제는 유효적절한 노선이 되지 못함을 인정하고, 대중투쟁과 군사운동의 결합을 향후의 대안적 노선으로 설정하는 결단을 내렸다. 1925년 8월에 의열단은 본부를 남중국의 廣州로 옮긴 후, 핵심 단원들이 黃埔軍官學校에 입학한 것과 1926년에 단을 혁명정당 겸 반공개적 대중운동조직 체제로 개조하려 함으로써706)김영범, 앞의 책, 184∼186쪽. 노선전환을 꾀하였다.

 이리하여 의열단의 암살파괴운동은 1925년 상반기로 사실상 종결되었고, 아나키스트 간부단원 柳子明만이 홀로 기존 노선을 고수하여 몇몇 후속거사를 주도하였다. 1925년 3월 말 북경에서 李仁洪과 李箕煥이 고급밀정 金達河를 교살한 것도 실은 유자명이 金昌淑과 李會榮의 언질을 받고 단원을 시켜 多勿團과의 합작으로 실행케 한 일이었다.707)朴泰遠, 앞의 책, 174∼177쪽.
朝鮮總督府 慶尙北道警察部,≪高等警察要史≫, 109쪽.
1926년 12월 28일에 결행된 羅錫疇의 폭탄거사에도 그 추진과정에 유자명이 일부 관여했지만, 엄밀히 말하면 의열단의 거사로 보기 어렵다. 이는 국내 운동계의 분위기를 일신시키고자 한 김창숙·이동녕·김구의 지시로 이루어진 것이었기 때문이다. 신채호가 제공한 폭탄 두 개를 받아 휴대하고 인천항으로 단신 입국한 나석주는 곧장 조선식산은행과 동양척식주식회사 경성지점에 폭탄을 던져 건물을 부수고 일본인 7명을 총격 살상한 후 경찰대와의 교전 끝에 자결하였다. 꺼져가는 민족혼의 심지에 다시 불을 당기려 한 살신성인의 장거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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