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편 한국사
  • 근대
  • 48권 임시정부의 수립과 독립전쟁
  • Ⅴ. 의열투쟁의 전개
  • 3. 3·1운동 직후와 1920년대의 의열투쟁
  • 2) 1921년 이후의 의열투쟁 양상과 추이
  • (4) 개인 단독의거의 흐름과 사례들

(4) 개인 단독의거의 흐름과 사례들

 1920년대에는 의미 있는 개인 단독의거도 여러 차례 있었다. 단체조직의 특공거사나 독립군조직의 유격전적 거사들과는 달리, 혼자 뜻을 세우고 준비하여 단신으로 결행하는 방식이었다. 개인 단독의거는 열렬한 의기와 자기희생의 비장한 각오 없이는 시도조차 어렵다는 점에서, ‘의열’의 본래적 의미가 가장 선명하게 드러나는 행동양식이다. 아울러 그 발생시점들을 놓고 보면, 집단적·조직적 의열투쟁의 흐름이 맞게 된 어떤 공백이나 休止 부분을 대신 채워주는 구실도 하였다.

 1921년 2월 15일 동경 유학생 梁槿煥이 친일파 거두 閔元植을 척살하였다. 민원식은 임시정부가 ‘7가살’ 범주를 규정하여 공표하면서 특별히 거명한 직업적 친일분자로, 총독부의 조종대로 움직이며 반동단체인 國民協會를 만들고 그 회장이 되어 기만적인 참정권운동을 전개하는 등 임시정부의 절대독립·완전독립론에 역행한 자였다. 그 민원식이 조선인 참정권 청원서를 제국의회에 제출하겠다고 도일하여 동경 제국호텔에 유숙하고 있음을 알게 된 양근환이 숙소로 그를 찾아가 크게 힐책하고 단도로 찔러 절명시킨 것이다. 응징거사에 성공한 양근환은 상해로 탈출하려다 나가사키(長崎)에서 피체되어 무기징역을 언도받고 복역하였다.

 1926년 4월 28일, 서울 한복판 金虎門 앞에서 일용노동자 宋學先이 자동차를 타고 가는 일인 2명을 습격하여 비수로 찔러서, 경성부 평의원 다카야마(高山孝行)가 현장에서 즉사하고 國粹會 경성지회장 사토(佐藤虎次郞)가 중상을 입었다. 늘 안중근을 흠모하며 총독 사이토를 처치할 기회를 고대해 온 송학선은 순종이 승하했다는 소식을 접하자 조문길의 총독을 습격하면 척살할 수 있다고 생각하여 돈화문과 금호문 앞에서 사흘째 그를 기다렸다. 거사 당일 낮, 예복 차림의 일인 3명을 태운 승용차가 금호문을 빠져나오는데 주위의 누군가가 “총독이 지나간다”고 말하므로, 송학선은 자동차를 뒤따라가다 순식간에 뛰어올라 중앙석 탑승자와 좌측 동승자의 가슴과 복부를 비수로 찔렀다. 그러나 실은 사이토와 외모며 체격이 비슷한 사토가 총독으로 오인된 것이었고, 때문에 송학선은 원래의 목표 달성에는 실패하였다. 그럼에도 그의 의거는 순종의 서거가 다시금 불러일으킨 민족적 울분과 반일정서를 대변해 주기에 충분했다. 거사 직후 경찰대와 대치하여 혈투를 벌이다 피체된 송학선은 1927년 11월에 사형 집행으로 순국하였다.

 1927년 10월 8일 대구 중심가의 조선은행 지점 옆 한길에서 폭탄이 터져 은행 창문 70여 개가 완파되고 은행원과 일경 수 명이 중상을 입었다. 張鎭弘이 단행한 시내 주요기관 폭파기도의 한 결과였다. 원래 그는 경북도청·지방법원·형무소·경찰서 등 9개소에 동시 투탄할 것을 계획했는데, 동지를 구하지 못하자 폭파 대상을 네 군데로 줄이고 단독거사로 방향을 바꿨다. 스스로 폭탄을 만들어 산중에서 위력시험도 해본 그는 거사 당일 여관방에서 나무상자 네 개에 폭탄을 장치하여 도화선에 점화시켜 놓고 포장한 후, 종업원을 불러 선물상자이니 속히 배달해 달라고 부탁한 뒤 피신했다. 맨 먼저 조선은행 지점으로 배달된 폭탄상자는 화약 냄새를 맡은 일본인 행원이 도화선을 끊어버려 불발했고, 경북지사, 식산은행 지점장, 경북경찰부장에게 배달이 부탁된 다른 세 상자는 비상연락을 받고 출동한 경찰이 빼앗아 도화선을 끊으려는 차에 연쇄폭발이 일어난 것이다. 그 후 장진홍은 다시 안동과 영천에서의 거사를 계획하고 폭탄 다섯 개를 張容熙와 金士實에게 건네주었는데, 두 사람은 거사 날짜를 미루다 기회를 놓쳤다. 수사망을 피하여 일본으로 건너간 장진홍은 마지막으로 동경의 귀족원과 경시청 건물에 투탄할 것을 계획하고 폭약을 구하려던 중에 경북도경 형사대에 피체되었고, 사형 판결이 확정된 후 1930년 대구형무소에서 자결 순국하였다.

 1928년 5월 14일 대만의 臺中市에서 한인 청년 趙明河가 일본 육군대장 구미노미야(久邇宮邦彦王)에게 독검으로 부상을 입힌 사건이 발생했다. 구미노미야는 일왕 히로히토의 丈人이요 군부·정계 요인으로서, 대만의 일본군 부대 검열을 마치고 臺北으로 떠나는 길이었다. 반년 전에 대만으로 건너와 일본인 가게의 점원이 된 조명하는 항일운동에 투신키로 했던 애초의 결심대로 야마가미(山上) 대만총독을 격살하고자 보검을 구입하여 독약을 발라놓고 기회가 오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러던 중에 구미노미야가 대만으로 온다는 소식을 들은 그는 야마가미 대신에 구미노미야를 처단하기로 작정하고 거사를 준비했다. 거사 당일 환송군중 속에서 뛰쳐나온 조명하는 구미노미야에게 일격을 가하려다 수행원의 제지를 받자 재빨리 독검을 구미노미야에게 던졌다. 칼에 맞아 어깨 부상을 입은 구미노미야는 온몸에 독이 퍼져 앓다가 8개월 뒤에 사망하였다. 거사 현장에서 체포된 조명하는 대만고등법원에서 사형을 선고받고 형이 집행되어 24세를 일기로 순국했다.729)趙恒來,<趙明河의 臺灣義擧와 그 意義>(≪韓國學硏究≫2-別冊, 淑明女大, 1991), 48∼57쪽.

<金榮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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