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에서 다년간 노동자로 생활하다 큰 뜻을 품고 상해로 건너온 李奉昌이 김구를 찾아와 조국독립을 위한 희생적 거사에 몸바칠 뜻을 간곡히 표하므로 그에게 일왕 폭살의 임무가 맡겨졌다. 투척용과 자결용 수류탄 한 개씩을 받아 일본으로 되돌아간 이봉창은 1932년 1월 8일, 육군관병식을 마치고 동경경시청 정문 앞을 통과중인 일왕 히로히토의 귀궁 행렬을 향해 회심의 폭탄 한 발을 던졌다. 척탄은 히로히토를 겨냥한 것이었지만 그의 마차로 오인된 궁내대신의 마차 앞에 떨어져 폭발하여, 일왕 폭살의 목적은 달성되지 못했다.733)李炫熙,≪李奉昌義士의 抗日鬪爭≫(國學資料院, 1997). 그럼에도 제국의 심장부인 동경에서, 그것도 ‘천황’의 면전에서 처음 성공시킨 폭탄의거였기에 그 정치적 반향은 컸다. 중국 신문들도 일제히 대서특필했는데,≪國民日報≫·≪汕報≫등 몇몇 신문이 이 거사를 찬양하고 일왕 폭살의 실패를 애석해 하는 논조의 기사를734)崔書勉,<이봉창의거 연구 서설>(한국근현대사학회 편, 앞의 책), 164∼170쪽. 실었다. 이로 인해 이 신문들은 일본의 압력으로 정간되었고, 일본군은 그것을 상해침공의 한 빌미로 삼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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