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편 한국사
  • 근대
  • 48권 임시정부의 수립과 독립전쟁
  • Ⅴ. 의열투쟁의 전개
  • 4. 1930년대와 일제말의 의열투쟁
  • 1) 한인애국단의 의열투쟁
  • (2) 상해거사의 추진과 윤봉길 의거

(2) 상해거사의 추진과 윤봉길 의거

 일본 해군의 도발로 ‘1·28사변’(상해사변)이 발발한 직후, 김구는 홍구부두에 정박중인 군함 出雲號에 일본군사령부가 설치되었다는 정보를 전해 듣고 그것의 폭파를 추진했다. 배 밑창에 시한폭탄을 부착시켜 폭파시키기로 하고, 중국인 잠수부 2명을 고용해서 폭발시간을 약정하고 2월 12일 낮에 잠수시켰다. 그러나 잠수부들이 겁을 먹어 지체한 탓에 폭탄은 부착되기 전의 상태로 수중 폭발해버렸고, 결국 일본군사령부 폭파 기도는 실패하였다.735)愼鏞廈, 앞의 글, 782∼783쪽. 이에 김구는 일본군의 黃埔江灣 비행기 격납고와 탄약고를 폭파해버릴 요량으로 상해 병공창 주임인 金弘壹에게 시한폭탄 제조를 부탁해 두고 단원 6명을 군수노동자로 침투시켜 기회를 엿보았다. 그러나 3월 3일에 일본군이 임시휴전 성명을 내고 휴전협정 교섭이 시작되면서 기회가 사라져, 이 거사계획도 미수에 그치고 말았다.736)김구, 앞의 책, 300쪽.
金昌洙, 앞의 글, 453쪽.
愼鏞廈, 위의 글, 783쪽.

 중국 육군 제19로군을 격퇴시키고 상해를 점령한 일본군은 기고만장하여 天長節(일왕 생일) 행사를 겸한 승전경축식을 4월 29일에 홍구공원에서 거행한다고 발표했다. 김구는 이 행사를 폭탄거사의 좋은 기회로 삼고, 김홍일로부터 건네받은 고성능 폭탄 두 개를 청년지사 尹奉吉에게 주어 거사에 나서도록 했다. 기지를 발휘하여 엄중한 경비망을 뚫고 식장에 입장한 윤봉길은 행사 끝 무렵에 중앙 연단을 향해 수통형 폭탄을 힘껏 던졌다. 큰 폭발음과 함께 폭탄은 단상의 일본 군·관·민 요인 7명을 일거에 쓰러뜨렸다. 상해거류민단장 카와바타(河端貞次)는 즉사했고, 상해주둔군 총사령관 시라카와(白川義則) 대장은 중상을 입어 입원했지만 사망했으며, 제3함대사령관 노무라(野村吉三郞) 중장, 제9사단장 우에다(植田謙吉) 중장, 주중공사 시게미츠(重光葵), 상해총영사 무라이(村井), 거류민단 서기장 토모노(友野) 등 5명이 실명하거나 수족이 절단되는 중상을 입었다. 상해의 일본 군·정 수뇌부에 섬멸에 가까운 대타격을 입힌 것인데, 이것이 한 요인이 되어 일제는 내륙으로의 확전을 단념하고 5월 5일에 중국과 긴급 정전협정을 맺었다.737)愼鏞廈,<윤봉길의 상해홍구공원 의거>(한국근현대사학회 편,≪대한민국임시정부정부수립80주년기념논문집≫하, 국가보훈처, 1999), 180∼191쪽.

 윤봉길 의거의 상황과 결과는 서방 각국으로도 즉시 타전되어 세계를 놀라게 하고 감동시켰다. 중국인들도 모두가 찬탄하는 가운데 蔣介石 총통은 “백만 중국군대가 못한 일을 고려청년 한 사람이 해냈으니 장하다”며 거듭 찬사를 보냈다. 또한 이봉창의 의거와 함께 그의 의거로 중국인들의 반한감정-일제의 교묘한 여론조작과 유도 때문에 발생한 萬寶山事件으로 인해 조성되었던-은 깨끗이 불식되고, 오히려 중국측이 한국독립운동에 지원을 아끼지 않는 국면 대반전이 이루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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