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편 한국사
  • 근대
  • 48권 임시정부의 수립과 독립전쟁
  • Ⅴ. 의열투쟁의 전개
  • 4. 1930년대와 일제말의 의열투쟁
  • 2) 재중국 아나키스트들의 의열투쟁

2) 재중국 아나키스트들의 의열투쟁

 중국 관내와 만주에서 활동하던 한인 아나키스트 30여 명은 1931년 9월 경에 상해에서 南華韓人靑年聯盟을 결성했다. 이 조직은 10월 말에 한·중·일 3국 아나키스트 연합체로 抗日救國聯盟이 결성되는 데 주도적으로 참여했다.741)無政府主義運動史編纂委員會 編,≪韓國아나키즘運動史(前編)≫(螢雪出版社, 1978), 340쪽. 항일구국연맹은 일제기관 파괴, 일제 요인 암살, 중국 친일분자 숙청을 주요 활동목표로 설정하고 행동부를 두었는데, ‘黑色恐怖團’으로 불린 행동부는 친일화한 중국 외교부장 汪精衛 암살기도 저격사건과 복건성 廈門의 일본영사관 폭파742)朴烜,<南華韓人靑年聯盟의 결성과 그 활동>(≪水邨朴永錫敎授華甲紀念 韓民族獨立運動史論叢≫, 探究堂, 1992), 968쪽.로써 의열투쟁의 포문을 열었다. 이어서 행동부는 1931년 12월에 天津의 일제기관들에 대한 기습공격을 감행했는데, 李容俊이 일본총영사 관저에, 柳基文이 부두에 정박 중인 11,000톤급 일본 기선에, 柳基石이 일본군 병영 막사에 폭탄을 던졌다.743)無政府主義運動史編纂委員會 編, 앞의 책, 341쪽. 그러나 아쉽게도 투탄 결과는 각각 담장 일부 파괴, 수중 폭발, 불발로 그치고 말았다.

 1933년 3월 17일 남화한인청년연맹의 白貞基와 李康勳은 상해 공동조계의 요리점 六三亭에서 중국정부 요인 매수 목적으로 연회를 베푸는 주중 일본공사 아리요시 아키라(有吉明)와 일본군사령부 간부들을 일거에 폭살할 것을 기도했으나 실패하였다. 육삼정으로 접근하던중에 거사계획을 미리 알고 포위해 온 일본군 헌병대에 피체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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