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30년 상해에서 건립된 韓國獨立黨은 ‘민중적 반항과 무력적 파괴’를 당책의 하나로 내걸고 의열투쟁의 실행에도 역점을 두려 했다. 그런 맥락에서 한국독립당 특무대원 겸 병인의용대원인 康秉學은 1934년 3월 3일 상해전쟁시의 일본군 전몰자 초혼식이 열리고 있는 홍구공원 神社에 폭탄을 던졌다.749)金正明 編,≪朝鮮獨立運動≫Ⅱ, 518∼519쪽. 폭탄의 불발로 인해 목적 달성에는 실패했지만, 불퇴전의 항일투지를 재차 과시한 제2의 홍구공원 의거인 것이었다.
1935년에 창건된 民族革命黨은 “반동분자 및 일·만 요인의 암살과 철도·관공서 파괴 공작”을 수행할 특무부를 두었으며, 수차에 걸쳐 수십 명의 부원들을 화북과 만주로 밀파하였다.750)강만길,≪조선민족혁명당과 통일전선≫(화평사, 1991), 99∼102쪽. 또한 서기장 김원봉과 훈련부장 尹世冑는 상해의 번화가 세 곳에 폭발사건을 일으켜 중국인의 배일시위를 촉발할 목적으로 1936년 8월에 당원 2명에게 폭탄 제조를 지시했는데, 제조 중인 폭탄이 폭발하는 사고가 발생하여 거사는 실행치 못하였다.751)金正明 編,≪朝鮮獨立運動≫Ⅱ, 578쪽.
이 글의 내용은 집필자의 개인적 견해이며,
국사편찬위원회의 공식적 견해와 다를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