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편 한국사
  • 근대
  • 48권 임시정부의 수립과 독립전쟁
  • Ⅴ. 의열투쟁의 전개
  • 5. 일제 강점기 의열투쟁의 특징과 역사적 의의

5. 일제 강점기 의열투쟁의 특징과 역사적 의의

 일제의 한반도 강점기에 수많은 한국인들이 식민지체제를 완강히 거부하며 완전독립의 성취를 위해 줄기차게 싸웠다. 그 과정에서 가장 강도 높았고 일제에 가한 타격이 가장 컸으며 민중의 지지와 호응도 만세시위 못지 않게 가장 많이 받았던 대일항쟁 방식이 의열투쟁이었다. 독립운동에서 의열투쟁의 비중과 의의가 그만큼 컸다는 뜻이다.

 의열투쟁은 일제 타도와 민족독립에 궁극적인 목적을 두고, 일제기관 파괴, 일제 요인 암살, 친일파 및 밀정·부일배 처단을 주된 목표로 삼았다. 그런 활동에 의해 식민지 지배의 정치적·군사적·사회적·산업경제적 기반에 두루 타격을 가하고 붕괴를 촉진하였다. 동시에 안으로는 민족성원들의 항일·반제의 투지와 독립의지를 크게 고취하고 선양하자는 것이 그 의도였다. 독립운동에 동원될 수 있는 인적·물적 자원이 제한되었고 희생을 최소화하면서도 효과는 극대화하자는 것이 의열투쟁의 취지였다.

 그리하여 진작에 임시정부가 ‘7가살’로 정리했고 의열단이 ‘5가살’ 및 ‘5當破’ 범주로 압축시켜 제시한 바 있는 구체적 표적들에 대하여, 단체 차원의 기획과 집단적 실행, 단체기획과 개인 단독실행, 개인 차원의 기획과 개인 단독실행이라는, 크게 세 가지 유형의 공격거사를 실천하였다. 그 행로에는 전업적 독립운동가뿐 아니라 농민·노동자·광부·점원·학생·교사·유학자·종교인·면서기, 심지어 경찰요원까지 다양한 계층·신분 배경의 인물들이 참여했다.

 의열투쟁의 무대는 국내외였는데, 국내에서는 특히 서울과 서북지방 일대, 일본에서는 동경의 왕궁과 경시청 앞 등에서, 중국에서는 상해·북경·천진 등 관내의 큰 도시와 만주의 주요 도시들이 주무대가 되었다. 일제의 정치·군사기관이 밀집해 있거나 경찰력이 대거 포진해 있는 곳에 의열투쟁의 맹폭이 가해진 것이다. 시기별로 보면, 3·1운동 직후에는 국내외 연계에 의해 국내를 중심무대로 하여 전개되다가 국외로도 투쟁공간이 점점 확장되어, 1920년대에는 국내외로 무대를 넓히게 되면서 국외 거점 단체들이 주도를 했고, 1930년대에는 해외지역 중심의 전개양상이 확연해졌다. 그러다가 일제말에는 다시 국내로 그 무대가 이전되었다. 이러한 흐름 속에는 임시정부와 관련이 없이 이루어진 거사도 적지 않았지만, 3·1운동 직후부터 적어도 30년대 초반까지는 임시정부의 주도·지원·개입에 의해 행해진 거사가 많았다. 임시정부는 의열투쟁을 외면한 것이 아니라 적극적으로 이끌어가고 뒷받침해 주었다.

 의열투쟁의 주된 내용을 이룬 대소 거사들은 성공보다는 실패로 끝난 경우가 더 많았음이 사실이다. 계획 또는 추진 단계에서 중도 좌절된 경우나, 실행은 되었지만 목표를 성취하지는 못한 경우가 적지 않았다. 성공한 거사였지만 파괴력은 미미했고 그 효력이 기대에 훨씬 못미친 경우도 적지 않았다. 그러나 이는 외견상의 결과였으며, 비록 실패한 거사들의 경우에도 눈에 보이지 않는 정치적·심리적 효과는 매우 컸다. 자기희생 감수의 태세로 추진되고 감행되었다는 사실만으로도 대중의 반일정서와 항일의지가 그때그때 환기·고취되면서 일정 수위로 유지되는 효과가 발해졌고, 독립운동의 다른 부문들에 대해 자극제도 되었다. 따라서 의열거사나 의열적 행동들은 소기의 목표 달성 여부나 성패를 떠나서 그 자체로 큰 의미를 갖는 것이었다고 보아야 한다.

 그런 의미를 띠었던 의열투쟁의 행위양식을 단지 형태론적으로만 고찰하여 ‘테러리즘’으로 규정짓고 격하시키려 한다면 그것은 매우 부당한 처사이다. 발생론적 견지에서 보건대 그것은 전적으로 민족사적·세계사적 정의의 실현이라는 가치로부터 비롯된 행위양식이었다. 사회경제적 수탈의 극대화와 민족말살을 노리고서 자행된 일제의 한국침략과 식민통치가 20세기의 역사적 불의의 한 극치였다면, 한국민족은 그 불의에 맞서서 정의의 투쟁을 끊임없이 치열하게 전개한 것이다.

 이러한 관점에서 일제 강점기 의열투쟁의 독특한 역사적 의의를 들면 다음과 같이 일곱 가지로 정리할 수 있다.

 첫째, 일제의 침략-강점-식민통치와 기만적 지배정책에 대한 강력한 규탄·경고·응징의 의미를 띠고서 행해졌다.

 둘째, 밖으로는 민족독립 완성의 의지를 부단히 표출하고 안으로는 일제 타도와 독립 달성의 희망을 지속적으로 불어넣어, 독립운동의 견고한 보루요 배후지로 기능했다.

 셋째, 적은 비용으로도 적에게 큰 타격과 손실을 입힘으로써, 결전기가 아닌 장기대치 국면에서는 가장 효과적인 투쟁방법이 되었다. 그래서 일제는 의열투쟁을 가장 두려워했고, 대처하기가 지극히 어렵다는 것을 느껴야만 했다.

 넷째, 독립군 무력투쟁을 견인하고 보조하면서 그것과 어깨를 나란히 하여 독립운동 역량 축적의 밑거름이 되었다. 적어도 1920년대 초와 1930년대 초의 의열투쟁은 일제 식민통치의 기반을 뒤흔들고 그것에 기생하는 세력에게는 심대한 위협요소가 됨으로써, 국내외 독립운동 발전의 호조건을 조성해 주었다.

 다섯째, 독립운동의 난국 타개와 침체국면 탈출의 지렛대요 주된 계기로 작용했다. 한인애국단의 의거들이 임시정부의 독립운동에 대한 재인식과 중국측의 지원을 끌어내는 결정적 전기를 제공했듯이, 의열투쟁은 독립운동이 침체와 위기를 딛고 일어서서 다시 웅비케 하는 활력소요 생명수로 기능한 바 컸다.

 여섯째, 절대독립을 추구하는 한국민족의 열망과 의지를 전 세계에 알리고 인식시킴으로써 눈에 보이지 않는 성과를 많이 남겼다.

 일곱째, 제국주의지배에 맞서서 민족자존의 유구한 전통과 민족동질성을 되살리고 수호하려는 대열의 최선봉에 섬으로써, 민족정기의 보전 및 재확립에 결정적으로 기여한 중요 인자가 되었다. 일제 강점기 의열투쟁의 이러한 정향은 해방 후의 군사독재와 분단체제의 장기화에 저항하여 민주화와 민족통일의 제단에 몸을 바친 열사들의 정신으로 계승되었다.

<金榮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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