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편 한국사
  • 근대
  • 49권 민족운동의 분화와 대중운동
  • Ⅰ. 국내 민족주의와 사회주의 운동
  • 1. 1920년대 국내 민족주의 세력의 동향
  • 1) 1920년대 전반의 ‘문화운동’
  • (1) 신문화건설, 실력양성론의 대두

(1) 신문화건설, 실력양성론의 대두

 3·1운동의 열기가 파도처럼 한차례 지나가고, 총독부 당국은 소위 ‘문화정치’를 표방하면서 최소한의 출판의 자유를 허용하였다. 이에 따라 간행되기 시작한 여러 잡지와 신문의 초기 지면은 이른바 ‘개조론’과 ‘신문화건설론’으로 장식되었다.

 개조론이란 제1차 세계대전을 계기로 전 세계는 정의와 인도, 자유와 평등, 민중본위와 노동본위의 세계로 개조되고 있으니, 이 개조의 시대를 맞이하여 조선민족도 개조해야만 살아남을 수 있다는 것이 그 골자였다. 개조론자들은 조선의 문화는 너무나 시대에 뒤떨어져 있으며, 따라서 조선민족이 세계개조의 시대적 기운에 부응하여 살아남기 위해서는 ‘조선사회의 개조’가 필요하다고 보았던 것이다.001) 張道斌,<希望과 批評>(≪서울≫3, 1920. 4), 3∼4쪽. 그리고 이같은 개조를 위해 신문화의 건설이 필요하다는 주장이 제기되었다.

 하지만 신문화건설론 내부에는 이같은 정의와 인도, 민중본위와 노동본위의 세계를 지향하는 개조론의 입장만 있는 것은 아니었다. 다수의 조선 지식인들은 제1차 세계대전의 종전 이후 일시나마 정의·인도의 세계가 올 것을 기대했으나 그 기대는 곧 물거품이 되고 말았다. 여기서 낙관론적인 입장에서의 개조론은 후퇴하고, 대신 실력양성을 주장하는 신문화건설론이나 반자본주의를 지향하는 사회주의운동론이 나오게 되었다.

 1920년대 초 실력양성론의 입장에서 신문화건설론을 가장 먼저 제창한 것은≪동아일보≫였다. 1920년 4월 창간된≪동아일보≫는 창간사에서 ‘문화운동’으로서의 민족운동을 제창하고, 그 사회적 방법으로서 ① 조선사람은 한 덩어리가 될 것, ② 널리 세계에 눈을 떠서 문명을 수입하고 완고함을 버릴 것, ③ 경제의 발달을 도모하고, 교육을 확장하며, 악습을 개량할 것 등을 제기하였다.002)≪동아일보≫, 1920년 4월 7일,<세계개조의 벽두를 당하야 조선의 민족운동을 논하노라>(4). 잡지≪개벽≫도 1920년 6월호에 실린 이돈화의 글<朝鮮新文化建設에 대한 圖案>에서 우승열패의 법칙이 지배하는 세상에서 劣者가 된 조선인이 기사회생의 유일한 방법은 실력을 기르는 것이라고 주장하고, 실력양성을 위한 신문화건설을 제창하였다. 이 글은 신문화건설의 방법으로서 지식열의 제고, 신교육의 보급, 농촌개량, 도시의 발달, 전문가의 육성, 사상의 통일 등을 제시하였다.003) 이돈화,<朝鮮新文化建設에 대한 圖案>(≪개벽≫4, 1920. 9). 물론 일부에서는 정의·인도·노동본위의 세상을 지향하는 신문화건설론도 있었지만, 그보다는 ‘현대적 문명’의 수립이라고 막연하게 표현된 ‘근대사회로의 개조’를 지향하는 신문화건설론이 주류를 이루었다. 그리고 그러한 현대적 문명, 신문화의 건설 방법으로서 위에서 본 바와 같은 ① 신사상·신지식의 수용과 보급(신교육의 보급), ② 구습의 개혁, 즉 풍속개량, ③ 산업의 진흥 등이 주로 제기되었다. 결국 신문화건설론의 핵심은 실력양성론이었다. 실력양성론은 이미 한말 자강운동기(계몽운동기)부터 제기되어 1910년대에도 신지식층에 의해 주로 주장되어온 국권회복운동론이었다. 이같은 실력양성론이 1919년 3·1운동을 전후한 시기 일시적으로 잠복하였다가 다시 등장한 것이었다.

 실력양성론을 가장 강력하게 주장한 것은≪동아일보≫였다.≪동아일보≫는 1920년 8월 미국 하원의원단이 방한한 이후 본격적으로 실력양성론을 제기하였다. 미국 하원의원단은 내한하여 “학술과 공업에 노력하여 모든 것을 향상하라”는 말을 남기고 떠났는데, 이후 이 신문은 이 말을 받아 “세계가 변화한다 하더라도 실력이 없으면 개인이나 민족이나 그 존재를 유지하기 어렵다”면서 실력양성론을 본격적으로 펼치기 시작하였다. 이어서 1921년 미국에서 열린 워싱턴회의(일명 태평양회의)에서도 한국문제가 전혀 거론되지 않자 “조선독립은 당분간 절망적이므로 우리들 조선인은 힘써 교육·산업과 문화적 시설에 열중하여 실력양성에 주력하지 않으면 안된다”고 주장하게 되었다.004)<太平洋會議ニ對スル金東成所感>(≪朝鮮治安狀況≫, 1922), 333쪽. 결국 1922년경에 이르러 실력양성론은 더욱 세력을 얻어 나갔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당시 모든 사람들이 실력양성론을 추종한 것은 아니었다. 워싱턴회의의 결과는 한편으로는 당시 점차 확산되어 가고 있던 사회주의자들의 세력도 강화시켜 주었고, 이는 결국 1921년 말에서 1922년 초 사이의 이른바 ‘사기공산당사건’, ‘김윤식사회장 사건’ 등을 빌미로 한 1922년 4월의 조선청년회연합회의 분열로 이어졌다. 1920년 이래의 문화운동 진영은 이제 그 이념에 따른 분화과정에 들어간 것이다. 이는 기존의 문화운동을 주도해온 민족주의계열에는 큰 충격이었다. 따라서 민족주의자들은 “일면은 내부의 단결을 튼튼히 하여 실력을 양성함에 전력해야 하고, 일면에서는 세계대세의 추향을 경솔히 실패의 편으로 해석하지 말고 더욱 전도의 광명을 기대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005) 이돈화,<人類相對主義와 朝鮮人>(≪開闢≫25, 1922), 6쪽. 즉 민족운동 진영의 단결을 강조하는 한편, 일부 운동가들의 사회주의로의 경사에 대해 경계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런가 하면 3·1운동에 참가하여 구속되었다가 출소한 민족주의자들 가운데에서도 실력양성론에 본래부터 관심이 없었거나 혹은 그 한계를 인식한 이들은 실력양성론을 추종하지 않고, 대신 일제에 대한 비타협적 정치투쟁을 고집하는 이들도 있었다. 이러한 이들에 대해 실력양성론자들은 그냥 기회를 기다리거나 혹은 기회가 올 때마다 시위운동을 통하여 독립을 주장하는 것보다는 기회를 만들고 기회를 이용할 수 있도록 실력을 기르는 것이 더욱 중요하다는 주장을 폈다. 즉 직접적인 독립운동보다는 ‘기회에 대비한 준비’로서의 실력양성운동이 필요하다는 것이었다. 이는 ‘기회에 대비한 실력양성론’이라 할만한 것이었다.006)≪동아일보≫, 1924년 9월 10일, 사설<自覺과 準備-오는 時代에 대하야->. 그러면 그들은 그 기회가 어떻게 온다고 생각하였을까. 그 기회는 물론 국제정세의 변화, 특히 미일간의 전쟁으로 올 수밖에 없다는 것이 한말 이래 신지식층의 일관된 생각이었다. 물론 워싱턴회의 는 이들에게 실망을 안겨주었지만, 조선의 민족주의자들은 미국에 대한 기대를 완전히 버릴 수는 없었다. 1925년경 宋鎭禹는 “앞으로 4·5년 내에 태평양을 중심으로 한 풍운이 야기될 것”이라고 전망하기도 했다. 그런데 주목되는 것은 이같이 미일간의 전쟁을 기대하면서도 그들은 “吾人은 외세의 파동보다 他力의 원조보다 중심세력의 확립과 자체세력의 해결을 절규”한다고 말하고 있었던 점이다. 즉 국제정세의 변화에 기대를 하면서도 이에 전적으로 의지하지 않고 나름대로 자체세력의 준비를 해야 한다고 생각한 것이다.007)≪동아일보≫, 1925년 8월 26일∼9월 6일, 사설<世界大勢와 朝鮮의 將來>.
古下先生傳記編纂委員會 편,≪古下宋鎭禹先生傳≫(동아일보사, 1965), 190∼212쪽.

 이와 유사한 논리는 李光洙의<민족개조론>에서도 전개되고 있었다. 그는 조선의 독립은 국제회의에서 조선인에게 선물하듯이 줄 수 있는 것이 아니고, 조선인의 실력양성에 의하여 조선인이 독립할만한 자격을 가지게 된 연후에 국제적으로 승인받는 절차를 통하여 얻어지게 될 것이라고 주장하였다. 따라서 외교운동만을 통하여 독립을 얻으려는 것은 무모한 일로서 우선은 독립할 수 있는, 다시 말해서 문명한 생활을 경영할만한 실력을 기르는 것이 더욱 중요하다고 주장하였다.008) 李光洙,<民族改造論>(≪開闢≫23, 1922. 5), 46∼47쪽. “외세의존보다는 自力을 기르면서 독립의 기회를 준비한다”는 것이 1922년경 실력양성론자들이 내세운 슬로건이었다.

 이광수의 논리는 실력양성론자들 가운데에서도 가장 철저하게 ‘先실력양성 後독립’을 주장하는 것이었는데, 이즈음 다른 실력양성론자들의 주장도 그 기본구조는 마찬가지였다. 그런데 ‘선실력양성 후독립론’은 결국 독립운동의 유보와 실력양성을 위한 문화운동의 우선이라는 의미를 지니고 있었다. 따라서 이는 일제에 대한 저항과 투쟁의 논리는 아니었다. 그것은 결국 일제가 허용한 범위내에서 합법적인 실력양성운동을 펴자는 논리가 되었던 것이다. 또 과연 식민지하에서 실력양성운동이 가능할 것인가 하는 현실적인 문제가 있었다. 대한민국임시정부의≪독립신문≫의 논설이나 申采浩의 논설 등은 바로 이러한 점들을 지적하면서 문화운동을 격렬히 비판하였다. 신채호는 “강도의 비위에 거스르지 아니할만한 언론이나 주창하여 이것을 문화발전의 과정으로 본다 하면 그 문화발전이 도리어 조선의 불행”이라고 지적하고, 문화운동자를 “강도정치하에서 기생하려는 주의를 가진 자”라고 비판하였다.009) 申采浩,<朝鮮革命宣言>(≪개정판 丹齋申采浩全集≫下), 38∼40쪽.≪독립신문≫에 실린 글은 “금일 한국의 內地에서 어디 가서 한국인 如意의 殖産을 장려할 수 있으며 지금 한국 천지에 어디 가서 한국인 자유적 문화운동을 할 수 있을 것인가. 만일 있다 하면 그것은 부스러기뿐이요, 농락적 이해타산적으로 許하는 것일 뿐일 것이다”라고 비판하였다.010) K. H.,<獨立運動>(≪獨立新聞≫, 1922년 10월 30일). 이들은 일제 지배하의 국내에서 실력양성, 문화향상을 내세우는 문화운동은 근본적으로 불가능하다고 주장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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