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편 한국사
  • 근대
  • 49권 민족운동의 분화와 대중운동
  • Ⅰ. 국내 민족주의와 사회주의 운동
  • 1. 1920년대 국내 민족주의 세력의 동향
  • 1) 1920년대 전반의 ‘문화운동’
  • (3) 학교설립운동

가. 학교설립운동의 배경

 1920년대 초 문화운동론자들은 신교육을 보급하기 위한 학교설립운동을 제창하였다. 신교육보급론은 우선 앞서 살핀 실력양성론과 연관되어 일어났다. 당시 실력양성의 구체적 방법으로 제시된 것이 신교육의 보급과 산업의 진흥이었다. 이 가운데 신교육보급이 실력양성의 주요 수단으로 거론된 것은 “교육은 국가와 민족의 부강을 가져오는 근본적인 힘”이라는 인식과 관련되어 있었다. 즉 민족의 사활·흥망의 문제는 교육에 달려있다는 것으로, 그러한 실례로서 흔히 독일·프랑스·일본과 인도·중국의 경우가 대비되어 설명되었다.017) 朴達成,<時急히 解決할 朝鮮의 二大問題>(≪개벽≫1, 1920), 24쪽. 신교육보급론은 또 ‘신문화건설론’과도 관련되어 있었다. 즉 세계개조의 시대적 기운에 부응한 ‘조선사회의 개조’와 이를 위한 신문화건설이 제창되면서 신문화건설, 즉 현대적 문명의 수립을 위한 신교육보급론이 절실하게 받아들여졌던 것이다. 당시 한 논자는 산업발달에도 지식이 필요하고, 사회제도의 개선에도 지식이 필요하고, 자연개척과 이용에도 지식이 필요하기 때문에, “목하 조선인이 신시대를 당하야 신사회를 건설코자 함에 가장 필요한 것은 각 방면의 전문지식이요, 또한 보통학문”이라고 주장하였다.018)≪동아일보≫, 1922년 9월 28일, 사설<평남교육협회에 대하야-文運의 促進>. 그러면 전문지식과 보통학문은 어떻게 얻을 수 있는가. 그것은 오직 ‘교육’을 통해서였다. 즉 ‘교육’은 신문화건설의 관건이었던 것이다.

 1920년대 초 신문화건설론과 함께 시작된 ‘문화운동’을 통해 교육의 중요성이 점차 대중들에게 인식되기 시작하여 이른바 ‘향학열’이 거세게 일어났다. 당시 총독부 당국자에 의하면 “소요(3·1운동) 이전에는 면장과 경찰서장이 극력 취학을 권유해도 정해진 수의 취학아동을 얻는 것이 극히 어려웠는데, 소요 이후 일변하여 학교는 문전성시가 되었다”고 놀라움을 표시하였다.019) 松村松盛,<變り行く朝鮮の姿>(≪朝鮮統治の回顧と批判≫1, 1936), 199∼200쪽. 당시 한 논자는 향학열이 일어나게 된 원인에 대해 “목하 과학지식에 낙오된 우리, 생존경쟁의 劣敗者된 우리로서 장차 막연한 우리의 생활 前路를 개척하여 남과 같이 살자면 반드시 남과 같이 알아야 할 것이며, 남과 같이 배워야 하겠다는 것이 금일 우리 조선인의 향학열을 도발케 한 원동력”이라고 설명하였다.020) 金秉濬,<新學期 入學難과 우리의 覺醒>(≪개벽≫23, 1922), 98∼99쪽.

 이러한 향학열의 급격한 고조는 결국 학교수의 부족으로 입학난을 초래하였다. 1922년 공사립보통학교의 경우 7만 4,891명 모집에 입학지원자가 13만 4,437명이 몰려들었다. 이러한 입학난은 서울의 경우 더욱 심각하여 1,184명 모집에 4,485명이 지원하여 경쟁률은 4대 1에 달하였다.021)≪동아일보≫, 1922년 4월 3일,<數字가 證하는 入學難>. 고등보통학교의 경우에도 사정은 마찬가지였다. 1922년 사립고등보통학교의 경우 1,396명 모집에 4,883명이 지원하였던 것이다.022) 萩原彦三,<朝鮮の敎育に就いて>(≪第3回 地方改良講習會講演集≫, 1923), 270쪽. 이같이 입학난이 극심하게 된 것은 학교수가 근본적으로 부족했기 때문이었다. 1919년 현재 관공립 보통학교는 6개 면에 1개교 정도밖에 되지 않았으며, 다소 늘어난 1923년에도 공립보통학교는 전국에 1,059개교로 2∼3개 면에 1개교에 지나지 않았다. 고등보통학교는 관립 12개교, 사립 8개교에 지나지 않았으며, 수용학생은 모두 10,300명에 불과하였다.023) 萩原彦三, 위의 글, 270∼271쪽. 이외에도 ‘각종학교’라는 이름으로 사립학교들이 있었지만 역시 입학자를 수용하기에는 태부족이었다. 여기에서 각종 학교설립운동 혹은 학교교육을 대신해줄 수 있는 각종 강습소와 야학 설립운동이 크게 일어난 것이었다.

 전문학교와 대학교의 경우에는 문제가 더욱 심각하였다. 1923년 현재 전문학교는 관립 5개교, 사립 3개교가 있을 뿐이었다.024) 관립전문학교로는 법학전문학교·고등상업학교·의학전문학교·고등농림학교가 있었고, 사립전문학교로는 세브란스의학전문학교·연희전문학교·보성전문학교가 있었다. 이들 전문학교는 고등교육기관이라기보다는 전문기술인력 양성소였다. 따라서 고등교육을 원하는 학생들은 일본을 비롯한 여러 나라로 유학을 떠나지 않을 수 없는 실정이었다. 1921년에 일본에 유학중인 학생은 모두 1,200명에 달하였다. 그리고 그 가운데에는 중등학교에 유학한 경우도 상당수 포함되어 있었다. 일본뿐만 아니라 중국과 미국·영국·독일 등지로 유학하는 경우도 크게 늘어났다. 이처럼 유학생이 격증하자 국내에서는 ‘민립대학’을 만들자는 논의가 일어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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