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편 한국사
  • 근대
  • 49권 민족운동의 분화와 대중운동
  • Ⅰ. 국내 민족주의와 사회주의 운동
  • 1. 1920년대 국내 민족주의 세력의 동향
  • 1) 1920년대 전반의 ‘문화운동’
  • (4) 물산장려운동

가. 물산장려운동의 배경

 1923년 한때 크게 일어났던 物産獎勵運動의 배경에는 당시 조선인 토착자본이 처해있던 급박한 상황과 당시 문화운동의 핵심적 논리의 하나였던 경제적 실력양성론이 놓여 있었다. 먼저 당시 조선인 토착자본이 놓여 있었던 상황을 살펴보자. 일본 자본주의는 호황기였던 제1차 세계대전이 종료된 이후 공황기에 빠져들었다. 이에 일본 자본주의는 ‘과잉생산에 따른 공황’을 돌파하기 위해 식민지 조선을 활용하고자 하였다. 즉 그동안 식량과 원료의 공급기지로 주로 활용해오던 식민지 조선을 한편으로는 이제 과잉생산된 상품의 수출시장으로서, 다른 한편으로는 과잉축적된 자본의 수출시장으로서 그 용도를 확장시키고자 했던 것이다. 여기서 일본정부는 1910년 ‘한일병합’ 때 서구열강에 1920년까지 유보하기로 약속하였던 조선에 대한 관세를 완전히 철폐하는 방안을 검토하기 시작하였다. 당시 일본의 자본가들은 일본과 조선과의 관세가 일본과 조선의 경제권을 독립적으로 존재하게 만드는 요인이라면서 ‘일선융화’를 해치는 관세제도를 폐지하라고 요구하고 있었다.035) 有吉忠一,<思ひ出のまま>(≪朝鮮統治の回顧と批判≫, 朝鮮新聞社, 1936), 71쪽. 그러나 당시 총독부의 재정수입에서 관세는 지세수입 다음으로 큰 비중을 차지하고 있었기 때문에 이를 전면 철폐할 수는 없었다. 따라서 일본정부와 총독부는 1923년 4월 관세 수입의 약 반을 남기는 선에서 기존의 관세를 조정하였다. 이 때 관세가 그대로 유지된 것은 주류와 직물류였다. 1920년 8월 이후 관세철폐문제가 제기될 때마다≪동아일보≫등 조선의 각 언론매체는 이 관세의 철폐가 일본산 상품이 조선에 물밀듯 밀려와 한국시장을 독점하여 자본과 기술에서 열세에 놓여 있는 조선의 공업을 형적도 없게 만들 것이며, 총독부 수입을 감소시켜 조선인들의 조세부담을 증가시키게 될 것이라면서 강력히 반대하였다.036)≪동아일보≫, 1920년 7월 10∼12일, 사설<關稅撤廢와 朝鮮産業>.

 한편 일본자본의 조선진출도 본격화되고 있었다. 1920년의<회사령>철폐는 일본 자본의 조선 진출에서의 장애물을 제거하기 위한 것이었다. 이후 일본자본의 조선진출이 활발해졌다. 제조공업의 신설 회사의 경우 1917년 5개사, 1918년 7개사에서 1919년에는 17개사, 1920년에는 16개사로 늘어났다. 상업회사의 경우에도 1917년 5개사, 1918년 8개사에서 1919년 23개사, 1920년 56개사로 신설회사가 늘어났다. 반면에 조선인 토착자본의 수는 그리 크게 늘어나지 않았다. 제조공업의 경우, 1919년 1개사, 1920년 5개사, 1921년 1개사가 신설되었고, 상업부문에서는 1919년 17개사, 1920년 18개사, 1920년 8개사가 늘어났을 뿐이었다.037)≪朝鮮銀行會社要錄≫(1921). 1921년 2월 현재 각종 회사의 상황을 살펴보면 조선인설립회사는 63개사에 공칭자본 23,404,700원, 불입자본 11,403,615원인 반면, 일본인설립회사는 280개사에 공칭자본 157,225,400원, 불입자본 83,375,962원이었다. 즉 한국인 설립회사는 숫자상으로 일본인 설립회사의 22.5%에 지나지 않았으며, 불입자본금에서는 13.7%에 지나지 않았던 것이다.038)≪동아일보≫, 1921년 2월 26일,<各種 會社의 近況>. 그리고 조선인 회사는 대부분 영세한 것으로서, 1930년의 통계에 의하면 전체 2,093개 공장 가운데 노동자 5∼49명을 고용한 공장은 2,031개로 전체의 97%를 차지하였다. 반면에 50∼99명 고용은 42개, 100∼199명 고용은 12개, 200명 고용은 8개에 지나지 않았다.039) 정진상,<일제하 한국인 토착자본의 성격>(≪한국근대농촌사회와 일본제국주의≫, 문학과 지성사, 1986), 209쪽.

 이처럼 영세한 처지에 놓여 있던 조선의 토착자본은 밀려오는 일본자본과 일본상품 앞에 속수무책일 수밖에 없었다. 여기서 토착자본은 우선 총독부권력에 구원의 손길을 내밀었다. 하지만 당시 총독부측은 식민지 조선을 일본자본주의의 식량과 원료의 공급지·상품의 소비시장·자본진출지로서 재편하기 위한 정책을 세우고 있었고, 이를 위해 1921년 9월 산업조사위원회를 구성하였다. 총독부측에서 조선의 산업정책을 세우기 위해 산업조사위원회를 구성한다는 소식이 있자, 조선인들도 이에 대응하여 ‘조선산업대회’(위원장 박영효)를 창립하여 총독부측에 조선인 본위의 산업정책을 세워줄 것을 요구하기로 하였다.040)≪동아일보≫, 1921년 8월 1일,<조선인산업대회 창립경과>· 9월 14일,<산업대회결의안>. 당시≪동아일보≫도 수차에 걸친 사설을 통해 조선인산업은 정치·사회적으로 보호·장려를 받지 않으면 진보·발전하기 어렵다고 주장하였다.041)≪동아일보≫, 1921년 6월 10일, 사설<産業調査會의 설치-文化政治의 表徵乎>. 조선인들의 이같은 요구와 기대에도 불구하고 그해 9월 열린 총독부의 산업조사위원회는 조선에서의 산업정책의 기본방침은 일본제국의 산업정책에 순응하는 것이 되어야 한다는 것을 분명히 하였다. 이렇게 되자 조선인 실업가들은 크게 실망하였고, 그들을 대변하던≪동아일보≫는 산업조사위원회의 결의안에 대해 맹렬히 비난을 퍼부었다. 즉 산업조사위원회의 결의안은 결국 한국의 경제를 일본에 완전히 예속시키는 일본인 본위의 것이 되었다는 것이었다.042)≪동아일보≫, 1921년 9월 23일, 사설<産業調査會의 決議案-朝鮮人 本位의 반대로 日本人 本位의 政策>. 이로써 조선인 토착자본의 기대는 완전히 무너졌고,≪동아일보≫는 이제 일본인과 조선인 사이에는 ‘경제적 전쟁’이 시작되었다고 선언하면서 조선인 자본가들의 분발을 촉구하였다. 이 신문은 한국인들은 ‘경제적 戰場’에 섰으며, 이 전쟁에서 승리하기 위해서는 근면·단결·선진제국의 경험 흡수 등이 무엇보다 필요하다고 주장하였다.043)≪동아일보≫, 1921년 9월 24일, 사설<産業發達에 대하야 朝鮮人에게 警告하노라-産調會 決議案에 대하야>. 그러나 이러한 대책들은 매우 원칙적인 것으로 조선인 토착자본은 사실상 속수무책의 상황에 처해 있었다. 여기서 토착자본측은 1922년부터 ‘토산품 애용’이라는 슬로건을 들고 나오면서 자구책을 마련하게 된 것이다.

 다음 1920년대 초 문화운동의 핵심적 논리는 실력양성론이었고, 실력양성론의 핵심은 ‘경제적 측면에서의 실력양성론’이었다. 경제적 실력양성론자들은 정치적 권리의 요구에 앞서 경제적 실력을 양성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즉 “정치는 결국 실력의 관계이며, 권리는 결국 실력의 표현”이라면서, “현대의 정치적 중심은 … 유산계급 즉 자본가에 있다. 이와 같은 시대에 처하여 경제적 능력이 없이 정치적 권리를 요구한들 그 하등의 소용이 있으며 설혹 정치상 권리를 획득한들 경제적 능력이 없으면 또한 하등의 소용이 있으리오”라고 하여,044)≪동아일보≫, 1921년 8월 16일, 사설<경제적 능력과 정치상 권리-경제는 정치의 기초>. 경제적인 실력의 양성이 정치적 권리의 주장에 선행되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이들은 “우리 민족의 생존과 번영을 도모하려면 정치적 방면의 활로도 있고, 기타 각 방면으로도 활로가 있겠지만 가장 긴요한 것은 경제적 방면의 활로”라고 주장하였다.045)≪동아일보≫, 1922년 12월 26일, 사설<내살림은 내것으로>. 경제적 실력양성론자들은 이처럼 경제문제가 정치적 문제, 즉 ‘독립’의 관건이 된다고 보고 있었다. 여기서 경제적 실력양성을 위한 ‘물산장려운동론’이 대두하였던 것이다.

 물산장려운동이 처음 시작된 곳은 1920년 8월의 평양이었다. 曺晩植 등 70명의 평양 유지들은 ‘조선물산장려회’를 발기하고 ‘자작자급’, 즉 조선물산의 장려를 위한 운동을 펼칠 것을 제창하였다. 그들은 조선이 이렇게 빈약하게 된 近因은 자작자급을 하지 않은 데 있다고 주장하고 부득이한 물품 이외에는 철저히 자작자급을 실행하고, 일보 나아가 상공업에 착수하여 직접으로 실업계의 진흥을 꾀하고 간접으로 사회의 발전과 진보를 기한다는 취지를 내걸었다. 하지만 조선물산장려회는 2년 가까이 창립을 보지 못하고 있다가 1922년 6월 22일에야 창립을 보았다.

 그런 가운데 앞서 본 경제적 실력양성론은 계속 제기되었고, 1922년 초≪동아일보≫는 ‘자작자급운동’을 펼 것을 제창하였다. 이 신문은 “조선민중이 힘을 갱신하여 理想을 달성하는 제일의 방법은 富力의 증진”에 있다고 주장하고, 경제적 자립을 위해 ① 조선인은 조선인 상점에서 물건을 사고 조선인 상인을 통하여 팔고, ② 조선인은 조선인이 만든 물품을 사용하며 조선인의 편익을 도모하고, ③ 이같이 하여 경제적 자립을 기하되 근면·검소·저축·협동을 하고, 경제적 지식을 획득하며, 과학적 경영방법을 채택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046)≪동아일보≫, 1922년 1월 4일, 사설<經濟的 覺醒을 促하노라-今年에 決行할 綱領>. 이는 자작자급운동의 방침을 보다 구체적으로 제시한 것이었다. 또 1922년 4월에 열린 조선청년회연합회 제3회 정기총회는 조선인은 산업발달에 대한 기본권을 소유한다는 것을 선언하고, 실행사항으로서 ① 조선인은 근면 노력하여 산업상 기술과 지식을 修得하여 산업적 권리의 확충을 기할 것, ② 조선인은 생산과 소비를 일치단결하기 위하여 소비조합·생산조합·소작인조합의 조직 발달을 기할 것, ③ 조선인은 조선인의 제조품을 사용하며 조선인 상인을 통하여 매매할 것 등을 의결하였다.047)≪동아일보≫, 1922년 4월 8일,<靑年聯合 總會>.

 하지만 물산장려운동은 1922년 여름까지도 아직 전국적으로 확산되지 못하였다. 물산장려운동이 전국으로 확산되는 계기를 만든 것은 그해 10월 총독부와 일본 대장성이 1923년 4월부터 일본과 조선 사이의 관세를 대부분 철폐하는 안을 협의하여 곧 일본의회에 상정할 것이라는 보도였다. 이러한 보도는 조선인 토착자본가들의 위기의식을 크게 고조시켰다. 이에 따라 각 신문과 잡지에는 본격적으로 자작자급운동을 호소하는 글이 실리기 시작했다. 예를 들어≪東明≫에는 薛泰熙가 “자작자급 이것만이 오직 우리의 진로”라고 강조하면서, “가가호호가 물레와 베틀을 다시 사용하라. 무엇보다도 먼저 社會奉公的 生産財團을 일으키라”고 주장하는 글이 실렸다.048) 薛泰熙,<自作自給의 人이 되어라>(≪東明≫14, 1922). 또≪개벽≫에도 조선인의 살 길은 토지보존, 농업부흥, 외국상품 거부, 토산장려, 근검절약뿐이라고 주장하는 朴達成의 글이 실렸다.049) 朴達成,<有耶無耶 朝鮮人의 生道>(≪개벽≫29, 1922). 조선청년회연합회는 12월 1일 조선물산장려의 표어를 현상모집하여, 12월 25일 ‘내살림 내것으로’, ‘조선 사람 조선 것’ 등의 표어를 당선작으로 발표하여 물산장려운동의 분위기를 돋구었으며, 물산장려를 위한 지방순회강연단을 조직하여 북한 지방을 순회하였다.050)≪동아일보≫, 1922년 12월 1·13·14·25일.

 이러한 분위기 속에서 서울에서 처음 물산장려운동을 실행에 옮긴 것은 그해 12월 연희전문학교 학생 廉台鎭 등 50여 명이 결성한 自作會였다. 자작회는 조선물산을 장려하여 자작자급의 정신을 기르고 산업의 진흥을 도모하여 경제적 위기를 구한다는 목적으로 구성되었다. 그들이 운동방책으로 내놓은 것은 조선인은 일치하여 조선품만 쓰고 수입품은 쓰지 말 것, 조선인의 所用品은 급히 조선인의 손으로 제조하도록 할 것, 조선인은 일치하여 토지를 전당하거나 매도하지 말고 매입하기를 힘쓸 것 등이었다. 그리고 그들은 운동의 구체적 목표의 하나로서 “조선인이 먹고 입고 쓸 조선품을 생산 공급할만한 영국의 길드식 대산업조합을 만들어 전조선적 생산소비기관으로 만들 것”을 제시하였다.051)≪동아일보≫, 1922년 12월 17일,<自作會 發起>. 자작회의 발기에 대해 당시≪동아일보≫는 이를 전폭적으로 지지하면서 일본인의 자본주의에 대항하기 위해서는 조선인이 소비에 동맹함으로써 생산의 발달을 기해야 할 것이라고 주장하였다.052)≪동아일보≫, 1922년 12월 8일, 논설<自作會-경제적 자립의 정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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