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편 한국사
  • 근대
  • 49권 민족운동의 분화와 대중운동
  • Ⅰ. 국내 민족주의와 사회주의 운동
  • 1. 1920년대 국내 민족주의 세력의 동향
  • 2) 1920년대 중후반 자치운동의 전개와 민족주의 세력의 분화
  • (1) 자치운동론 대두의 배경

(1) 자치운동론 대두의 배경

 자치운동론이란 한마디로 한국의 독립 대신 우선 자치권을 얻어 독립을 위한 실력을 먼저 양성하자는 주장이다. 이같은 주장은 이미 3·1운동 이전 1910년대에도 국내외에서 등장한 바 있었다. 일부 유학생들이 이를 주장하기도 하였지만, 다른 유학생들에 의해 반박을 당하기도 하였다. 또 3·1운동을 준비하는 과정에서 천도교측에서도 한때 자치운동을 고려하기도 하였다. 이같이 국내외 일부 논자들이 자치론을 제기한 것은 한국의 독립 능력에 대한 확고한 자신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한국의 독립 능력에 대한 자신감의 결여는 특히 한말과 1910년대에 일본에 유학한 경험이 있는 신지식층에게는 일반적인 것이었다. 그들은 그만큼 일본의 근대문명에 압도되어 있었으며, 국제사회에서의 약육강식의 법칙을 강조하는 사회진화론에 매몰되어 있었다. 따라서 그들은 자력에 의한 독립쟁취는 물론, 자력에 의한 독립의 유지도 불가능하다고 생각하고 있었다.072) 이에 대해서는 박찬승, 앞의 책, 306∼308쪽.

 자치론이 본격적으로 대두한 것은 3·1운동의 여진이 채 가시지 않은 1919년 여름이었다. 그해 8월 高元勳 등 6명은 자치론을 주장하는<의견서>를 총독부에 제출하였는데, 그 안에서 그들은 ① 조선은 조선인으로 하여금 다스리게 할 것, ② 빠른 시일 안에 조선에 조선의회를 설치할 것, ③ 일본인 총독의 감독하에 조선정부를 설치할 것 등을 요구하였다.073) 近藤劒一編,≪万歲騷擾事件≫2 (1964), 116∼123쪽. 고원훈은 1910년 명치대학 법과를 졸업하고, 1911∼1913년 총독부 경부, 1913년 이후 보성전문학교 교수, 1920년 보성전문학교 교장, 1924년 중추원 참의 등을 지낸 인물이다. 이들은 그해 7월 동경에 건너가≪국민신보≫기자 아베 미쓰이에(阿部充家)를 만나 자치운동에 대해 협의하고, 타나카(田中) 육군대신, 우사미 카쓰오(宇佐美勝夫) 조선총독부 내무부장관 등을 만나 조선의회의 개설 등을 주장하는 의견을 제시하였다.074) 박경식 편,≪在日朝鮮人關係資料集成≫1, 113쪽. 또 1921년에는 일본 우익단체인 黑龍會 계열의 조직인 同光會의 조선총지부가 결성되어 총지부장 李喜侃이 이른바<내정독립청원서>라는 것을 일본의회에 제출하려는 운동을 벌였다가 총독부로부터 시정방침에 위배된다하여 단체가 강제로 해산당한 일이 있었다. 이때 그들이 주장한 내정독립이란 일본천황의 통치하에 외교·군사를 제외한 일체의 내정을 독립시켜달라는 것이었다.075) 近藤劒一編, 앞의 책, 144∼155쪽. 이같은 자치론은 주로 친일적 성향이 농후한 이들에 의해 제기된 것이었다. 하지만 1920년대 전반 ‘문화운동’을 전개하고 있던 이들도 이들의 자치운동에 대해 특별히 찬성이나 반대의 입장을 표명하지 않았다.≪동아일보≫는 동광회 조선지부의 내정독립운동에 대한 총독부의 탄압에 대해 그것은 독립운동도 아닌데 왜 탄압하는가 하는 비판을 던지고 있었다.076)≪동아일보≫, 1922년 10월 30일, 논설<내정독립도 독립인가-당국의 기괴한 해석>.

 1920년대 중반에 자치론이 대두한 또 하나의 배경은 물산장려운동과 민립대학기성운동 등 ‘문화운동’의 좌절이었다. 앞서 본 것처럼 이들 운동은 1923년 여름 이후 급격히 침체상태에 빠졌고, 이러한 운동을 추진해온 민족주의자들은 크게 당황하게 되었다. 물산장려운동을 뒷받침해온 조선인 자본가, 특히 중급 이상의 자본가들은 큰 충격을 받았다. 여기에서 이들이 모색한 길은 두 가지였다. 하나는 총독부측에 대해 다시 조선인 자본의 보호·육성을 호소하는 길이고, 다른 하나는 정치적으로 일제와 타협하여 자치권과 같은 일정한 정치권력을 얻어 조선인 자본을 보호·육성하는 길이었다. 그들이 이렇게 일제의 권력에 의지하거나 아니면 스스로 최소한의 권력이라도 가져야겠다고 생각한 것은 ‘경제적 실력양성’에는 ‘정치권력의 보호’가 필수적이라는 생각을 하게 되었기 때문이다.077)≪동아일보≫, 1924년 12월 26·27일, 사설<정치운동에 대하야>(상·하).

 이 시기 자치운동론이 대두하게 된 또 하나의 배경으로서 총독부측의 자치론에 대한 내면적인 검토라는 사실을 들 수 있다. 3·1운동 직후 일본인들 사이에서도 조선자치의 문제는 논란의 대상이 되었다. 당시 일본인들 사이에서 조선문제에 대한 대응책으로서는 ① 일시동인주의와 내지연장주의에 입각한 참정권부여론, ② 자치제 실시론, ③ 식민지 방기론 등이 거론되고 있었다.078) 松尾尊兌,≪大正デモクラシ-≫(岩波書店, 1974), 278∼310쪽. 첫번째 참정권부여론은 조선인들에게도 장차 일본인들과 똑같이 지방자치, 혹은 일본의회의 참정권을 부여한다는 것으로서 일본정부와 총독부측의 공식입장이면서 동시에 호소이 하지메(細井肇)·나카노 세이고(中野正剛) 등 관변 언론인들의 어용이론이기도 했다. 국민협회의 閔元植이 일본의회를 상대로 벌인 참정권 청원운동은 이와 연결되어 있는 것이었다. 두번째 자치제 실시론은 무단정책과 동화정책을 폐기하고 조선에 자치의회를 설치하자는 주장이다. 이는 당시 大正데모크라시의 민본주의자인 요시노 사쿠조(吉野作造) 등 黎明會 회원들과 동경제대 교수 수에히로 시게오(末廣重雄) 등이 주장한 것이다. 그리고 식민지 방기론은 조선을 식민지로부터 독립시키라는 주장으로, 극히 소수지만 당시≪東洋經濟新聞≫간부 이시바시 탄잔(石橋湛山) 등이 이를 주장하고 있었다.079) 松尾尊兌, 위의 책, 303∼310쪽.

 3·1운동 이후 일본정부는 참정권부여론을 공식 입장으로 표명하고 있었다. 그런데 1925년 11월 돌연 총독부의 어용지인≪경성일보≫에 사장 소에지마 미치마사(副島道正)가<총독정치의 根本義>라는 글을 써서 자치론을 주장하고 나섰다. 이 글이 나오자 일본인 단체인 갑자구락부, 한국인 친일단체인 각파유지연맹·보천교·국민협회 등에서는 이를 맹렬히 비판하고 나왔다. 이에 총독부 당국은 그것은 소에지마 개인의 의견일 뿐이라고 해명하였다. 그러나≪경성일보≫는 다시 사설<副島伯의 조선통치론>을 실어 한편으로는 소에지마의 자치론이 총독부와는 관계가 없다고 해명하고, 다른 한편으로는 다시 자치론이 조선을 영원히 통치하기 위한 가장 타당한 통치방식이라고 주장하였다.080) 두 편의 논설은 副島道正編,≪朝鮮統治に就いて≫에 전문이 실려있다. 이에≪朝鮮及滿洲≫의 발행인 사쿠오 토요(釋尾東邦)는 자기 잡지에 자치론을 격렬히 비판하는 논설을 실었고, 이에 마치다 운민(町田耘民)이 다시 자치론을 찬성하는 글을 실음으로써 한때 일본인들 사이에서 자치론을 둘러싼 공방이 벌어졌다.081) 釋尾東邦,<自治論者に與へて朝鮮統治の根本方針を論ず>(≪朝鮮及滿洲≫1월호, 1926).
町田耘民,<朝鮮統治論と言論界の奇觀>(李種植 편,≪朝鮮統治策に關する學說≫).

 당시 총독부는 소에지마의 자치론이 총독부와 아무 관련이 없다고 해명했다. 하지만≪경성일보≫측의 자치론 개진이 총독부측과의 사전협의 내지는 양해없이 이루어졌으리라고는 볼 수 없었다. 이를 뒷받침하는 것은 당시 총독부의 고위관료 가운데에도 이미 자치론자가 있었다는 사실이다. 당시 내무국장 오오쓰카 쓰네사부로(大塚常二郞)는 총독에게 私案으로서<朝鮮議會要綱>을 만들어 제출하였는데, 이는 참정권론에 반대를 표시하면서 조선의회 설치를 주장한 것이었다.082)≪齋藤實文書≫2(고려서림 영인본)에 수록됨. 또 하나 주목되는 것은 이 사설에 관해≪경성일보≫측과≪동아일보≫측 사이에 사전 협의가 있었다는 사실이다. 즉 총독 사이토 마코토(齋藤實)가 소에지마에게 보낸 편지 가운데에 “전번≪경성일보≫에 논설을 싣기 전에≪동아일보≫의 간부에게 의논했던 것인데, 반대론(일본인들의 반대론)이 일어난 것을 보고 그들은 냉소하고 있다”는 구절이 있는 것이다.083) 강동진,≪日本의 韓國侵略政策史≫(한길사, 1980), 350쪽. 즉 당시 총독의 정치참모였던 소에지마와 아베(阿部充家) 등은 총독으로부터 어느 정도 자치론에 대한 긍정적 반응을 얻은 후,≪동아일보≫측과 천도교측의 최린에게 이를 귀띔하고 이어서 여론의 반응을 떠보기 위해≪경성일보≫에 문제의 사설을 실은 것이다. 뒤에 보게 될 1925년 말 이후의≪동아일보≫와 최린의 자치운동은 이같은 총독부의 자치론 검토와 밀접한 관련을 갖고 있는 것이었다.

 사이토 총독은 일본정부의 분위기를 더 살피다가 1927년 2월 조선인들의 자치운동이 여론에 밀리고, 대신 신간회 결성의 움직임이 본격화하자, 때를 놓치지 않기 위해 총독부 관료에게 자치론 문제를 본격 연구하도록 지시하였다. 즉 사이토는 자치론자들의 의견을 받아들여 조선지배에 자치제를 도입해야 한다고 결론을 내린 것이었다. 총독은 총독부 관료들이 만든 자치제 초안을 들고 본국과 협의에 나서서 수상에게 구두로 의견을 전했으나, 4월 일본 내각의 교체, 그리고 총독 자신의 제네바회의 대표 파견, 그리고 그에 이은 12월의 총독 경질로 인해 자치제 검토는 유보되고 말았다.084) 강동진, 위의 책, 365∼368쪽.

 사이토 총독의 경질로 주춤했던 자치론은 1929년 8월 그가 다시 총독으로 부임해오면서 활성화되었다. 아베의 활동이 재개되면서 최린 등과의 접촉이 본격화되었고, 총독부도 연래의 숙제인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협의를 거듭하였다. 총독부측은 그 동안의 연구를 토대로<조선에 있어서의 參政에 관한 제도의 방안>이라는 문서를 작성하여 본국 정부에 제출하였다. 총독부가 제시한 안은 조선인 칙선의원이 귀족원에 참여할 수 있게 하며, 조선에 지방의회를 설치한다는 것이었다.085)<朝鮮に於ける參政權制度の方案>·<朝鮮に於ける參政に關する制度の方案>(≪齋藤實文書≫2), 541∼661쪽. 당시 이를 실질적으로 담당하여 추진한 사람은 코다바(兒玉) 정무총감으로서 그는 조선의회에서 교육·위생·토목·산업 등의 예산을 다루도록 한다는 구상이었다고 한다. 그는 朝鮮在住者의 이해에 관계가 깊은 문제를 조선재주자의 의원선거권이 없는 본국의 조선의회에서 다루도록 하는 것보다는 조선재주자가 선출한 의원으로 구성되는 조선의회에서 총독의 설명을 듣고 직접 심의하도록 하는 것이 합리적이라고 생각하였다는 것이다. 이러한 안은 이쿠다(生田) 내무국장 이하 여러 명의 소위원회에서 만든 것이었으며, 사이토 총독은 이 안을 들고 동경에 가서 본국 정부와 협의에 나섰다고 한다.086) 萩原彦三,≪私の朝鮮記錄≫(榮光社印刷所, 1960), 59∼60쪽. 여기서 조선의회는 형식상으로는 일정한 의결권을 갖는 것으로 되어 있었으나, 총독에 의해 의결의 취소 및 재의의 명령을 받을 수 있는 등 사실상의 자문기관의 성격을 띤 매우 한정적인 권한을 갖고 있었다.

 일본정부는 이러한 안에 대해서도 조선인들에게 자치의회나 참정권을 주는 것은 모두 위험요소를 안고 있다고 생각하였고, 또 기본적으로 ‘내지연장주의’를 포기할 수 없다고 생각했다. 결국 1930년 12월 일본 정부와 총독부는 이 문제를 단순한 지방제도 개정으로 매듭지었다. 즉 기존의 자문기관의 성격만을 지닌 도평의회·부협의회·면협의회 등을 형식적인 의결기관으로서의 道會·府會·面會로 바꾸는 지방제도 개혁을 통해 조선인의 참정권·자치권이 크게 신장된 것처럼 선전하고자 했던 것이다.087) 강동진, 앞의 책, 368∼371쪽.

 이상에서 살핀 것처럼 1925년 이후의 자치운동론의 대두와 자치운동의 전개는 총독부측의 자치의회 검토와 밀접한 연결을 갖고 진행된 것이었다. 총독부측은 장기적으로는 자치제 실시를 통해 독립운동의 기세를 꺾고, 단기적으로는 한국인들의 자치운동을 지원하여 민족운동을 분열시킨다는 이중의 목적으로 갖고 ‘자치제 실시 검토’라는 카드를 활용하고 있었다고 볼 수 있다.

 이밖에도 당시 자치운동의 국제적 배경으로 1922년 에이레가 영국으로부터 자치권을 인정받는 에이레자유국을 성립시켰던 것, 인도에서 1919년 이후 간디가 스와라지(자치)운동을 본격화한 것 등을 들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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