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편 한국사
  • 근대
  • 49권 민족운동의 분화와 대중운동
  • Ⅰ. 국내 민족주의와 사회주의 운동
  • 1. 1920년대 국내 민족주의 세력의 동향
  • 2) 1920년대 중후반 자치운동의 전개와 민족주의 세력의 분화
  • (2) 자치운동의 전개

(2) 자치운동의 전개

 1920년대 국내에서 자치운동에 관한 첫 문제제기는 1922년≪동아일보≫의 사설<정치적 중심세력>이라는 글에 의해 이루어졌다. 이 글은 자치론을 직접 개진하지는 않았지만 에이레와 인도의 예를 들면서 “중심세력이 없으면 정치운동도 할 수 없다”고 하여, 간접적으로 한국에서의 정치적 중심세력의 결성을 제창하였다.088)≪동아일보≫, 1922년 7월 6일, 사설<정치와 중심세력>. 1923년에 들어서도≪동아일보≫는 계속해서 ‘민족적 기치하의 대단결’, ‘민족적 중심세력의 결집’, ‘중심세력이 될만한 단체의 결성’을 주장하였다. 이 때 그들이 내세운 주장은 대체로 ‘인민의 생명·재산의 보호’, ‘폐정의 개혁’ 등 조선민족의 생존권 보장을 위해 ‘정치상의 유력한 발언권’의 확보가 필요하다는 것이었다.089)≪동아일보≫, 1923년 4월 16일, 사설<대동단결의 필요-생활의 비명에 대하야>· 10월 27일, 사설<민족적 해체의 위기-조선인은 다 맹성하라>· 11월 17일,<대동단결의 기운-형제여 맹진하라>. 이는 비록 명확한 표현은 아니었지만 일정한 정치적 권력의 확보를 위해 그것을 담당할 정치적 중심세력의 결성이 필요하다고 주장한 것이었다. 그리고 정치적 발언권의 확보란 자치권의 확보를 의미하는 것이었다. 그런데 주목되는 것은 이러한 주장이 1923년 11월 이후 본격적으로 제기되었다는 점이다. 이 시기는 물산장려운동과 민립대학기성운동이 침체상태에 빠진 시기였다.

 자치론자들의 입장이 보다 명확히 드러난 것은≪동아일보≫1924년 1월 1∼4일자의 사설<민족적 경륜>이었다. 이 글은 정치·경제·교육의 중심단체 결성과 함께 “조선 내에서 허하는 범위 내에서 일대 정치적 결사를 조직하여 이 결사로 하여금 당면한 민족적 권리와 이익을 옹호하고 장래 구원한 정치운동의 기초를 만들게 할 것”을 제창하였다. 이 글은 1922년 이후≪동아일보≫가 주장해온 ‘당면한 민족적 권리와 이익’의 옹호, 혹은 ‘정치상의 발언권의 획득’이라는 이름하에 합법적 정치결사를 조직, 비타협적 독립운동이 아니라 타협적인 자치운동을 펴자고 주장한 것에 틀림없었다. 당시≪동아일보≫는 참정권 획득운동에는 일관하여 반대해왔기 때문에 여기서의 ‘정치상의 발언권의 획득’은 자치권 획득이며, ‘조선내에서 허용되는 범위 내에서의 정치운동’은 자치운동을 가리킴이 분명했다.

 이같은 사설이 나간 직후인 1월 중순 천도교의 최린,≪동아일보≫의 김성수·송진우·최원순, 천도교의 이종린, 변호사 박승빈, 기독교계 이승훈, 대구의 서상일, 평양의 조만식, 그리고 신석우·안재홍 등 16∼17명이 회합하여 정치결사의 조직문제를 협의하였다. 이 모임은 이미 1923년 가을부터 신석우·김성수·송진우·최린 등이 누차 회합하여 ‘유력한 민족단체’의 조직에 대해 협의한 뒤에 성사된 것이었다.090)<民族運動梗槪>,≪齋藤實文書≫10, 233쪽. 이 모임은 이후 ‘연정회’ 준비모임이라 불리게 되는데, 1월 중순의 모임에 참석한 이들이 모두 자치운동에 찬성하여 참석한 것은 아니었다. 신석우나 안재홍은 그보다는 순수한 의미의 민족운동 대단체의 결성에 관심을 갖고 있었다.

 ≪동아일보≫의<민족적경륜>은 일반대중의 격렬한 반발에 부딪쳤다.≪동아일보≫는 이 사설 이후에도 1월에 두 차례 더 민족적 단결을 주장하는 글을 실었으나 반발이 거세게 일자 1월 29일에는 해명문을 내지 않을 수 없는 처지가 되었다.≪동아일보≫는<정치적 결사와 운동에 대하야>라는 이 해명문에서 자신들의 주장은 민립대학운동이나 물산장려운동을 통일적·조직적으로 전개하기 위해 민족적 일대단결을 이루지 않으면 안된다는 것을 주장한 것일 뿐이라고 해명하였다. 그러나 이 글은 ‘합법적 정치운동’이 자치운동이 아니라는 해명은 하지 않았다.≪동아일보≫가 이같이 애매한 태도를 견지하자 4월에 열린 조선노농총동맹과 조선청년총동맹의 임시대회에서는≪동아일보≫불매운동과 ‘타협적 민족운동’ 반대의 결의를 하기에 이르렀다. 특히 4월 20일에 열린 노농총동맹에서 김종범 등은≪동아일보≫문제를 조사한 결과를 보고하였는데, 그들의 주장에 따르면 송진우·김성수와 몇몇 인사들은 1923년 12월 24일 명월관에서 모여 소위 ‘연정회’라는 것을 조직하기로 하고, 그 비용으로 2만원을 거두고, 동시에 마루야마 쓰루기치(丸山鶴去) 경무국장 휘하의 고관을 방문하고 상호협조의 양해를 얻어 그 취지를 선전하기 위하여≪동아일보≫의 지상에<민족적 경륜>을 발표하였다는 것이었다. 또 그들은 연정회 주도자들이 이광수를 중국에 있는 안창호에게 보내 연정회 가입을 간구하였으며, 설태희가 만주동포 위문을 다녀온 것도 이 일과 관련이 있다고 주장하였다.091)≪조선일보≫, 1924년 4월 22일,<노농총동맹 임시대회>. 이에≪동아일보≫는 4월 23일 지면을 통한 해명에 나섰다. 이에 따르면<민족적 경륜>은 세상에서 오해하는 것과 같은 주장을 한 것이 아니며, 만일 그러한 오해를 불러일으켰다면 그것은 문구의 착오에서 비롯된 것이라고 주장하였다. 그리고 연정회건은 연구와 논의 수준에서 그친 것이며, 이광수와 설태희 건은 오해라고 해명하였다.092)≪동아일보≫, 1924년 4월 23일,<兩問題의 眞相>. 이로써 자치론은 다시 잠복기에 들어가게 되는데, 결국 1924년 초의 자치론은≪동아일보≫의 송진우 등과 천도교의 최린이 중심이 되어 여론을 떠보고, 연정회와 같은 조직을 만들려 하다가 강한 반발여론에 부딪쳐 미수에 그쳤다고 볼 수 있다.

 자치론이 다시 수면에 떠오른 것은 1925년의 일이었다. 1925년 들어<치안유지법>의 실시로 사회주의운동이 잠시 주춤하고 민족주의운동이 다시 대두하였다. 이해 9월에는 장래 민족운동의 지도기관을 목표로 한 조선사정연구회가 결성되었고, 11월에는 하와이범태평양회의 대표 파견을 위해 태평양문제연구회가 결성되었다. 그런 가운데 조선총독부는 소에지마 등≪경성일보≫간부들의 건의를 받아들여 자치제 실시문제를 검토하기 시작하였고, 이는 곧 한국인 자치론자들에게 전해졌다. 당시 총독부측과 한국인 자치론자들 간의 교섭을 담당한 것은 일본으로부터 온 중의원 의원 이노우에 준노스케(井上準之助)와≪경성일보≫사장 소에지마였다. 송진우·최린 등 한국인 자치론자들은 이들로부터 총독부측의 움직임을 전해듣고 1925년 말 경부터 누차 회합을 갖고 조선 현하의 상태에서 독립운동은 절대 불가능하니 차라리 자치운동으로 전환해야 한다는 의견을 나누었다고 한다.093)<民族運動梗槪>(≪齊藤實文書≫10), 237쪽. 그리하여 그들은 자치제가 실시될 때에 대비한 준비를 시작하였는데,≪동아일보≫와 수양동우회, 그리고 천도교신파와 조선농민사 등이 자치운동에 대비한 잠재적 기반으로 간주되고 있었다.094) 고려대 아세아문제연구소 편,≪한국공산주의운동사(자료편)≫ 2, 120쪽. 그리고 일본인 자치론자들은 1926년 1월 일본에서 중앙조선협회라는 단체를 만들었다. 공작 야마카타 이사부로(山縣伊三郞)가 회장을 맡고 기요우라 케이코(淸浦奎吾)·시부사와 에이이치(澁澤榮一)·우사미 카쓰오(宇佐美勝夫)·세키야 데이자부로(關屋貞三郞)·아베 미쓰이에(阿部充家) 등이 이사와 고문을 맡았으며, 동경에 본부를 오사카와 경성에 지부를 두었다. 이들은 대부분 전직 총독부 관리나 현직 정치인, 어용언론인 등이었다. 이 단체는 “조선에 관한 제 방책을 조사하고 그 방책을 강구하여 조선의 건전한 발달을 조성함”을 그 목적으로 내걸었는데, 그 이면의 실질적인 목적은 조선의 자치운동을 지원하기 위한 것으로 간주되고 있었다.095)≪조선일보≫, 1926년 2월 6일, 사설<統治群의 유혹-中央朝鮮協會의 성립을 듣고>.

 이같이 일본인들에 의해 자치론이 본격적으로 검토되고, 이에 일부 조선인 민족주의자들이 호응하는 가운데 1926년 3월 강달영·유억겸·안재홍·박동완·이종린·신석우·오상준·권동진 등이 회합을 갖고 민족주의자와 사회주의자 간의 연합전선 결성에 합의하였다. 그런데 이 회합에서 이종린은 최린 등이 추진하고 있는 자치운동에 대해 폭로함으로써 최린 등의 자치운동 계획은 세간에 널리 알려지게 되었다. 사회주의자들과 비타협적 민족주의자들은 자치운동을 막고 협동전선을 추구하기 위해 중국의 국민당과 같은 결사를 조직하려는 움직임을 본격화하였다. 그러나 순종이 갑자기 서거하고, 6·10만세운동을 준비하는 등의 사정으로 새로운 결사의 조직은 잠시 유보되었다. 그런 가운데 자치론자들은 본격적으로 움직이기 시작하여 10월 초순 자치운동을 위해 최린 등이 박희도·김준연·조병옥 등 각계 인사와의 접촉에 나섰다. 자치운동에 반대하고 있던 안재홍과 김준연은 이 사실을 민흥회에 알렸다. 이에 민흥회의 명제세는 최린을 찾아가 그를 힐난하고 만일 자치운동 단체의 조직을 강행하면 이를 극력 방해할 것이라고 경고하였다. 최린 등은 10월 14일 시사간담회라는 이름으로 회합을 명월관에서 가질 계획이었는데, 실제로 민흥회와 전진회 회원들이 회합 장소에 미리 나타나 진을 치는 바람에 회합은 무산되었다.096)<民族運動梗槪>(≪齊藤實文書≫10), 237쪽.

 자치운동 단체 조직은 일단 실패로 돌아갔지만 최린은 10월 말 일본에 건너가는 등 자치운동은 물밑에서 여전히 계속되고 있었다. 그런 가운데 사회주의자들과 자치운동에 반대하는 민족주의 좌파의 협동전선 결성 움직임도 활발해져 11월 15일<정우회 선언>이 나왔고, 이는 사회주의사상단체들의 해산과 1927년 2월 신간회의 결성으로 이어졌다. 한편 일본에 건너간 최린은 동경에서 아베와 만나 자치운동 추진에 관해 협의하였다. 앞서 본 것처럼 이 시기 총독부는 신간회 등장 등에 자극되어 본격적으로 자치제 실시안을 만들어 본국 정부와의 협의에 들어갔다. 그러나 곧 이은 일본 내각의 교체, 사이토의 제네바회의 대표 파견으로 인한 총독 경질 등으로 자치제 실시는 그 추진이 지연될 수밖에 없었다. 이에 최린은 아베의 권유에 따라 이승만·안창호와의 접촉과 약소민족운동 시찰을 위해 1927년 6월 미국과 유럽으로 여행을 떠났다.097)≪동아일보≫, 1927년 6월 11일. 그는 미국과 유럽 각국을 돌아보고 1928년 4월 귀국하였는데, 그는 여행 도중 이승만·안창호와 접촉하였으나 자치운동과 관련해서는 긍정적인 반응을 얻지 못한 것으로 보인다.

 신간회 결성과 최린의 외유로 인해 국내에서는 일시 자치운동의 움직임이 소강상태에 빠졌다. 그러나 신간회 결성에 참여하지 못했던 민족주의 우파의 수양동우회와≪동아일보≫세력은 신간회에 참여하여 이를 활용할 구상을 세우게 된다. 이에 따라 수양동우회 세력은 신간회 평양지회를 만들었고,≪동아일보≫의 송진우는 1928년 1월 신간회 경성지회에 가입하였다. 이들 가운데 특히 송진우는 여전히 자치운동에 대한 집념을 갖고 신간회에 참여한 것으로 확인된다.098) 東邦生,<東亞日報社長宋鎭禹君と語る>(≪朝鮮及滿洲≫1928년 2월호), 35쪽. 이러한 상황에서 사회주의자들은 1927년 말 신간회 내부에서의 헤게모니 전취론 등을 제기하고 나왔다. 이로써 신간회 본부의 주도권을 갖고 있던 민족주의 좌파는 민족주의 우파와 사회주의자들에게 신간회 주도권을 빼앗기지 않을까 하는 위기의식을 느끼게 된다. 여기서 이들은 1928년 5월 회합을 갖고 민족주의 좌파 중심의 ‘신간그룹’을 조직하고, 만일 자치당이 출현하게 되면 이에 항쟁할 것 등을 결의하였다. 그리고 그해 11월 이들은 다시 모임을 갖고 만일 자치당이 등장하면 신간그룹은 신간당을 조직하여 이에 맞설 것 등을 결의하였다.099) 姜德相 編,≪現代史資料≫29·95쪽.

 1928년 봄 귀국한 최린은 밖으로는 이렇다할 움직임을 보이지 않았으나 천도교 신파의 중심세력인 천도교 청년당원들에게 자치론을 고취시키면서 신파의 결속을 도모하고 있었다. 그런 가운데 1929년 8월 사이토가 다시 조선총독으로 부임해 왔다. 그리고 그는 앞서 본 것처럼<조선자치의회안>을 만들어 일본 정부와 본격적인 협의에 들어갔다. 이로써 조선인들의 자치운동도 다시 활발하게 전개되기 시작했다. 1930년 들어 최린은 송진우 등과 자치운동에 대해 협의하였고, 천도교 신파 교도들에게 자신의 자치운동 결심을 피력하였다. 이에 구파의 이종린은 ‘절대 반대’를 표명하는 성명을 발표하였다. 하지만 최린은 천도교청년당·조선농민사 등에 손을 뻗쳤다. 그리고 그는 천도교 구파에게도 합동을 제안하여, 구파를 설득하여 천도교 신구파의 합동을 성사시키는 등 자치운동의 터를 닦아나갔다.100)<치안상황>,≪朝鮮問題資料叢書≫6, 503쪽.

 ≪동아일보≫도 본격적인 움직임에 나서 1930년 여름 각 지국 주최로 지방발전간담회를 갖고 자치제 실시에 대비하여 각 지방사회에서의 유력자 포섭에 들어갔다. 그리고 자치운동과 관련한 움직임은 신간회 내부에까지 파급되었다. 1929년 말부터 신간회 내부에서도 이른바 ‘합법운동의 탈을 쓴 자치운동’의 움직임이 있다 하여 신간회 내부가 소란하게 된 것이다. 1929년 말 신간회는 광주학생운동 진상보고대회를 겸한 민중대회를 계획하였다가 중앙집행위원장 許憲을 비롯하여 다수의 간부들이 구속되었다. 이에 따라 당시 재정부장이던 金炳魯가 중앙집행위원장 대리를 맡게 되었다. 김병로는 이후 그동안 신간회가 취해왔던 관헌과의 대립 방식의 운동을 지양하고, 합법적인 방향으로 신간회를 끌고 가려 하였다. 그런 가운데 신간회 중앙집행위원의 한 사람인 朴文熹는≪대중공론≫이라는 잡지에 자치문제에 관한 원고를 보내 게재를 요구하고 친구에게 자치운동에 참여할 것을 권하는 서한을 보내 물의를 빚게 되었다. 신간회 경성지회는 이러한 사실을 조사·확인하였고, 박문희의 처벌을 본부에 요구하였다. 그러나 신간회 본부측은 “내사하였지만 我會의 지도정신을 위반한 점이 없다”고 통고하고 견책처분을 하는 데 그쳤다. 이러한 신간회 본부측의 ‘우경화’는 경성지회를 비롯하여 다른 지회 회원들의 반발을 불러 일으켰다.

 그런 가운데 1930년 11월에 열린 중앙집행위원회에서 김병로가 중앙집행위원장으로 선출되고, 다른 집행위원도 대부분 온건파가 차지하였다.101) 위와 같음. 김병로는 12월 23일 각 지회에 보낸<운동정세에 대한 지시의 건>에서 “대중의 당면이익을 대표하여 건전한 투쟁을 전개함에 노력할 것”이라고 말하였다. 이러한 본부의 움직임에 대해 가장 크게 반발한 것은 천도교 구파의 이종린이 지회장으로 있던 신간회 경성지회였다. 경성지회와 본부 사이의 갈등은 결국 이종린 등 경성지회 회원 31명에 대한 본부의 停權처분으로 이어졌고, 이에 경성지회측도 각 지회에<통의문>을 발송하여 본부의 합법주의 노선, 당면이익획득운동 노선에 대해 격렬히 비난하였다. 이들은 당면이익획득노선에 대해서는 “아회는 결코 당면 이익을 위해 투쟁하는 단체가 아니다”고 반박하고, 또 ‘투쟁이 가능한 한도의 전략’에 대해서는 “아회는 아회의 목표를 향해 돌진할 뿐이지 가능·불가능을 표준으로 하지 않는다”고 주장하였다.102) 위와 같음. 신간회 본부측의 합법운동, 당면이익획득운동은 문면상으로는 자치운동을 지칭하고 있지는 않았다. 하지만 본부측이 자치론을 공공연히 주장한 박문희를 감싸고 돌았던 것은 합법운동이 단순한 합법운동이 아니라 자치운동의 가능성까지도 염두에 둔 것임을 짐작케 한다. 당시 청년운동의 중심이던 청년총동맹의 경우에도 중앙간부였던 김재한·이항발 등이 허일의 지도하에 합법운동으로의 방향전환을 모색하고 있었는데, 이항발은 바로 신간회 본부의 김병로파의 인물이었다. 1930년 10월≪별건곤≫에 실린 청년총동맹의 중앙위원 KH생의 글은 명백하게 “언론·집회·결사의 자유 획득운동의 전제적 투쟁으로서 공민권 획득운동의 전개”를 제창하였다.

 민족운동 진영의 이같은 움직임들은 앞서 본 같은 시기 조선총독부의 자치제 실시 모색과 밀접한 관련을 갖는 것이었다. 당시 아베는 사이토 총독에게 보낸 편지에서 조급히 자치제를 실시해야 한다고 주장하면서 만일 조선의회를 세우려 한다면 지명인사인 최린·허헌·박영철 등을 포섭해서 끌어들여 ‘어용적인 대정당’을 만들어 ‘주머니 속의 도장’처럼 마음대로 꺼내 쓸 수 있도록 해야 한다고 건의하고 있었다.103) 강동진, 앞의 책, 363∼364쪽. 그러나 앞서 본 것처럼 사이토의 자치의회안은 본국 정부에 의해 거부되고 대신 지방제도 개정의 선에서 이 문제는 낙착을 보고 말았다. 이로써 1930년 말을 고비로 자치운동은 사그라들게 되었고, 권력의 부스러기라도 줍고자 하는 이들은 도회·부회·면협의회 등에 참여하는 길을 찾게 되었다. 하지만 최린 등은 아직도 미련을 버리지 않고 지방제도 개정이 자치의회로 가는 과정이 될 수도 있다고 보고, 신간회 해소라는 새로운 정세를 이용하여 자치운동을 계속해보려 했다. 그러나 1931년 6월 우가키 카즈시케(宇垣一成)총독의 부임, 9월 일본군의 만주침략 등으로 전반적인 분위기가 달라지면서 자치운동은 종언을 고하였다. 그리고 이제 새로운 정세하에서 자치론자들은 최린을 선두로 하여 친일적 성향을 노골화하면서 일제의 추종세력으로 되어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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