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편 한국사
  • 근대
  • 49권 민족운동의 분화와 대중운동
  • Ⅰ. 국내 민족주의와 사회주의 운동
  • 1. 1920년대 국내 민족주의 세력의 동향
  • 2) 1920년대 중후반 자치운동의 전개와 민족주의 세력의 분화
  • (3) 자치론과 반자치론

(3) 자치론과 반자치론

 일부 민족주의 진영의 자치운동 추진은 민족주의자들 내부에 격렬한 논쟁을 불러일으켰고, 마침내는 찬반을 둘러싸고 민족주의 진영의 좌우파 분화를 가져오게 되었다. 뒤에 보듯이 반자치론자들은 스스로를 민족주의 좌파로 불렀고, 이에 따라 자치론자들은 이후 민족주의 우파로 불리게 되었다.

 그러면 당시 자치운동을 추진한 민족주의 우파는 어떤 논리를 갖고 있었을까. 자치론은 두 가지 논리로 구성되어 있었다. 그 하나는 “현재로서는 독립이 불가능하므로 독립의 기회에 대비한 준비가 필요하다”는 준비론, 다른 하나는 “독립에 도달하는 한 단계로서 자치권을 획득하는 것이 필요하다”는 단계적 운동론이었다. 준비론자들은 준비가 있어야만 독립의 때가 왔을 때 큰 효과를 거둘 수 있으며, 국제정세의 변화만 기다리고 있을 것이 아니라 준비를 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여기서 ‘준비로서의 정치운동’으로서 자치운동론이 제기되었던 것이다.104) 주 7)의 송진우의 주장 참조. 단계적 운동론은 독립에 도달하는 한 계제로서 자치권 획득을 구상하는 것이었다. 서상일은 자치의회의 개설을 통해 언론·출판·집회·결사의 자유 등 정치적 자유를 얻어, 이를 통해 대중의 정치적 훈련을 쌓고 그 경험으로 독립운동의 단계로 나아가자는 구상을 갖고 있었다. 이러한 단계적 운동론은 총독부와 일본정부 당국이 자치권 부여를 망설이게 하는 가장 큰 요인이 되고 있었다. 그들은 자치권을 부여하는 것이 결국은 다음 단계인 독립운동의 발판을 마련해주는 것이 되지 않을까 우려한 것이다. 당시 총독부의 밀정이던 노정일은 자치론을 “내정독립을 획득하고 다음에 합법적·조직적으로 조국을 회복하려는 사상”이라고 보고 있었다.105)<華峰報告書>1930년 11월 26일,≪齋藤實文書≫16, 225쪽.

 이상에서 살핀 것처럼 자치론은 준비론, 단계적 운동론으로서 제기된 것이었다. 이는 결국 정치적 측면에서의 실력양성론이라고도 볼 수 있다. 그리고 그것은 1910년대 이후의 실력양성론의 연장선 위에서 나온 것이었다. 그러나 자치론은 경제적·문화적 실력양성론과 비교할 때 그 타협성이 훨씬 강화된 것이며, 현실적으로는 민족운동의 목표를 독립이 아닌 자치로 하향 조정한 것을 의미하였다.

 그러면 당시 같은 민족주의 진영 내부에서 자치운동에 반대한 민족주의 좌파의 논리는 무엇이었을까. 당시 반자치운동 진영에서는 자치운동의 움직임에 일제통치군이 간여하고 있다고 보고 있었다. 안재홍은≪조선일보≫의 사설에서 자치운동을 ‘官制的 妥協運動’이라고 규정하고, “조선인의 타협운동은 통치군의 조선인에 대한 회유적 양보로 나타날 것”, 또는 “타협적 운동은 반드시 통치군들과 연락되고 호응함이 아니고서는 용이하게 나타나지 못할 것”이라 하여, 자치운동을 ‘관제적 타협운동’이라고 규정하였다.106)≪조선일보≫, 1926년 12월 16∼19일, 사설<조선금후의 정치적 추세>. 그는 또 1926년 말 최린이 渡日하여 자치운동을 펴고 있는 동안 “조선인의 공리론적 점진주의자와 저들 통치군들과의 호응에 의하여 조선 대중의 돌진적 또는 좌경적 기세를 줄이고자 타협운동이 출현할 것은 분명하고, 이러한 내외의 사태는 그로 하여금 금후 2·3년을 넘지 않는 동안에 반드시 출현할 것을 예단할 수 있다”라고 하여, 자치운동이 일제 지배자들과 조선인 ‘功利論的 漸進主義者’의 야합에 의해 조선 민중의 돌진적 좌경적 기세를 꺾기 위한 목적으로 출현할 것이라고 보았다. 따라서 그는 “이러한 관제적 타협운동이 생긴다 하면 우선 출발점부터 그릇된 것이라 할 것이요, 그 전도는 일층 불신임을 받을 것”이라 하여, 자치운동이 결코 민중의 호응을 얻지 못할 것이라고 주장하였다.107) 위와 같음.

 한편 안재홍은 총독부측이 자치제 실시설을 흘리고 있음을 주목하고, 이는 민족운동의 보조를 교란하는 데 근본 목적이 있다고 보았다. 즉 소에지마가<朝鮮統治의 根本義>에서 한편으로는 자치제 실시를 주장하면서도 다른 한편으로는 “아직 자치고 무엇이고 말할 경우가 아니다”라고 한 것은, 그 역시 진정한 의미를 갖고 한국에서 자치제 실시를 주장하는 것이 아니라 다만 한국인들의 민족운동의 보조를 교란시키기 위해 자치론을 펴고 있는 측면이 더 강하다는 것을 보여준 것이라고 하였다.108)≪조선일보≫, 1925년 12월 4∼5일, 사설<소위 ‘副島伯의 언론’문제-통치군의 보조교란책>.

 그러면서 1927년 초≪조선일보≫는 아직 자치운동이 소문으로만 나돌 뿐 구체적으로 진행되지는 않고 있지만, 언젠가는 자치운동을 위한 타협적인 ‘우익민족단체’가 결성되리라 전망하면서 이를 저지하기 위해 미리 ‘민족좌익전선’을 결성할 필요가 있다고 주장하였다.109)≪조선일보≫, 1927년 2월 9일, 사설<민족좌익전선의 의의 및 사명>. 물론 이때 ‘민족좌익전선’이란 ‘기회주의’와 ‘우경적인 타협운동’에 반대하는 ‘비타협적인 민족주의’에 동조하는 이들의 연합전선을 의미하는 것이었다. 그리고 이때의 ‘비타협적인 민족주의’란 사회주의자들도 자치운동에 반대한다면 모두 이에 포괄하는 의미를 지니고 있었다.110) 위와 같음. 여기서 민족주의 좌파와 사회주의자들 간의 협동전선론이 대두하게 되었다. 1925년 7월 25일자≪조선일보≫사설은 당시의 조선에서는 계급문제보다는 민족문제가 더 중요하다고 주장하였다. 즉 구미와 일본제국주의와 아시아·아프리카 약소민족간의 문제는 계급 문제라기보다는 민족 문제라 할 수 있으며, 제1차 세계대전 이후 전세계적으로 동요가 계속되고 있는 바 이는 계급문제에서 기인하는 것이기도 하지만 보다 중요하게는 민족문제에 기인하는 것이라고 주장하였던 것이다.111)≪조선일보≫, 1925년 6월 28일, 사설<東方 諸國民의 覺醒-侵略國家의 深長한 煩悶->.

 ≪조선일보≫는 더 나아가 민족해방을 목표로 하는 민족운동과 계급해방을 목표로 하는 사회운동은 공동전선을 형성할 수 있다고 주장하고 그 이유를 “제국주의와 항쟁하는 것이 민족운동의 임무도 되고 또한 사회운동의 임무도 되는 것을 알 수 있나니 제국주의는 자본주의의 최신계단으로서 자본주의가 필연적으로 도달할 계단이기 때문이다. 그러면 이 제국주의를 공동의 목표로 하고 사회운동과 민족운동이 서로 악수해야 할 터”라고 주장하였다.112)≪조선일보≫, 1926년 4월 14일, 사설<社會運動과 民族運動의 相關>. 제국주의는 조선의 민족운동과 사회운동의 공동의 적이기 때문에 연합전선을 펼 수 있다는 것이었다. 이 글은 “노동계급의 해방은 약소민족의 해방운동과 서로 악수하고 나아가는 것이 현하의 世界相”이라고 주장하였다.113)≪조선일보≫, 1926년 6월 14일, 사설<계급의식과 민족의식>. 그러면서 사회주의자와 민족주의자는 비록 민족해방 이후 어떠한 체제의 국가를 건설할 것인가에 대해서는 이견이 있지만, 민족해방을 선차적으로 이루어야 한다는 데 대해서는 이견이 없으므로 민족해방의 단계까지는 보조를 같이 할 수 있다고 주장하였다.114) 위와 같음. 결국 당시 자치운동에 반대하는 민족주의 좌파는 사회주의자들에 대해 아직은 계급해방에 중점을 두는 운동보다는 민족해방에 중점을 두는 운동을 전개해야 할 것이라고 주문하면서, 민족협동전선의 결성을 제의하고 있었던 것이다.

 민족주의자와 사회주의자의 민족협동전선 결성 주장은 1925년 초부터 시작되어 1926년 한편에서는 이론적으로 더 세련화되고, 다른 한편에서는 제2차 조선공산당의 강달영과의 협의, 조선민흥회 결성 등의 움직임을 거쳐 1927년 마침내 신간회의 결성으로 열매맺게 되었다.

<朴贊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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