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편 한국사
  • 근대
  • 49권 민족운동의 분화와 대중운동
  • Ⅰ. 국내 민족주의와 사회주의 운동
  • 2. 조선공산당의 성립과 활동
  • 1) 사회주의사상의 도입
  • (1) 사회주의사상의 국내 도입과 수용

(1) 사회주의사상의 국내 도입과 수용

 1919년 식민지 조선에서 일본제국주의에 항거하는 전민족적·혁명적 항일봉기였던 3·1운동이 일어난 이후, 국내에서는 민족주의의 사상적 무기력함이 드러나면서 식민지 민중들에게 사회주의사상이 보급되기 시작했다.

 특히 1917년 10월 러시아혁명의 물결은 중국과 일본 그리고 식민지 조선에서도 거센 파도처럼 밀려들어와 식민지 지식인들에게 민족해방운동의 한 이념적 무기로서 자리잡게 되었다.

 조선 공산주의운동의 독특함은 그것이 국내보다 국외, 즉 러시아에서 직접적으로 시작되었다는 것이다. 러시아에 존재했던 두 개의 고려공산당은 코민테른(Comintern)과 직접적인 관련 속에서 활동하였고, 이러한 조건 속에서 국내에서 사회주의 분파들이 형성되었다. 따라서 국내 사회주의 분파의 형성은 그 성립 초기부터 단지 마르크스주의 이론의 선전의 차원이 아니라, 일본제국주의의 독점적 식민지로부터의 해방이라는 정치적 실천활동과 국외 전위당과의 긴밀한 연관 속에서 형성되었다. 그리고 이러한 실천활동에 대한 전략·전술의 차이는 국내에 다양한 스펙트럼의 사회주의 분파를 형성시켰다.

 사회주의사상의 형성·발전과정은 자본주의의 형성과 더불어 성장했던 노동자운동과 마르크스주의의 융합의 과정이었다. 그러나 서구와는 달리 우리 나라는 일본제국주의의 식민지라는 특수한 조건 속에서 성립한 식민지 자본주의 하에서 사회주의사상이 유입되었고 이것은 곧바로 민족해방과 계급해방을 동시에 추구하는 목적을 갖게 되었다.

 1919년 3·1운동은 식민지 민중에게 일본제국주의의 폭압성과 대중적인 정치의식을 각인시키는 거대한 역사적 경험이었다. 조선인 혁명가 金山(본명 장지락)의 일대기를 그린 님 웨일즈(Nim Wales)의≪아리랑≫은 3·1운동 당시 김산의 역사적 경험을 다음과 같이 묘사하고 있다.

이것이 나로서는 처음으로 정치의식에 눈을 뜨게 된 계기였다. 대중운동의 힘이 내 존재를 뿌리로부터 뒤흔들어 놓았다. 나는 하루종일 거리를 뛰어다녔고 아무 시위에나 가담하여 목이 터져라 외쳐댔다. … 나는 힘의 의미와 무저항의 공허함을 깨달았다. … 전국에서 도합 200만 명 이상이 시위에 참가하였다. 재산도, 농사일도, 일신상의 안전도 애국열의 물결 속에서 모조리 잊어버렸다. 이것은 인류역사가 시작된 이래 가장 특이한 운동이었을 것이다(님 웨일즈, 조우화 옮김,≪아리랑≫, 동녘, 1992, 63∼65쪽).

 3·1운동에 영향을 준 사상적 배경으로 우리는 흔히 윌슨(Thomas Woodrow Wilson)의 민족자결주의를 거론한다. 그러나 1917년 10월 러시아혁명과 레닌(Lenin)의<민족자결권테제>는 이에 앞서 식민지 민중들에게 커다란 영향을 주었다.

 3·1운동 직전 동경 유학생들의<2·8독립선언서>에 “이미 군국주의적 야심을 포기하고 정의와 자유를 기초로 한 러시아는 신국가의 건설에 종사하는 중이며 … 정의와 자유를 기초로 한 민주주의 상에 선진국의 모범에 따라 신국가를 건설 … ”이라고 하며 러시아혁명의 결과에 따른 세계사의 새로운 분위기를 나타내고 있다. 또 3·1운동 직후 韓龍雲은<조선독립의 서>에서 “정의·인도, 즉 평화의 신은 독일 인민들의 손을 빌어 세계의 군국주의를 타파함이니, 곧 전쟁 중의 독일혁명이 이것이다. 독일혁명은 사회당의 손에서 일어난 즉, 그 유래가 오래되고 또한 러시아의 자극을 받은 바 있나니…”라고 하여 러시아혁명의 영향을 받은 1918년 독일혁명의 의의를 언급하고 있다.

 朴殷植은 1920년≪獨立運動之血史≫에서 다음과 같이 러시아혁명에 대한 벅찬 감격과 기대를 서술하고 있다.

러시아 공산당은 서두에 적기를 내걸고 전제정치를 타도하여 민중에게 자유와 평등을 가져오고 제민족의 자유와 자결을 선포하였다. 과거에 극단적인 침략주의자가 극단적인 공화주의자로 바뀌었다. 이것은 세계개조의 최초의 신호탄이 되었다.

 식민지하에서 사회주의사상은 1910년대 말 러시아혁명의 영향과 제1차 세계대전 직후 고양된 국제혁명운동의 영향, 민족자결주의론에 대한 자각 등의 국제적 조건과 일제의 가혹한 식민통치에 따른 민족적·계급적 모순의 첨예화, 3·1운동 이후 정치의식의 고양 등을 계기로 국내 신문·잡지 등의 언론매체를 통해 수용되었다.

 이 무렵 일간지와 정기 간행물은 유물사관, 소비에트 혁명정부와 레닌에 관한 기사를 종종 다루고 있었다. 1921년 6월 3일부터 8월 31일까지 무려 73회에 걸쳐<니콜라이 레닌은 어떠한 사람인가>라는 표제하에≪동아일보≫는 그의 일생과 활동 및 볼세비키혁명 등을 연재하였다.

 국내에서 3·1운동을 거치면서 일부 민족주의자와 식민지 지식인들은 자신의 이론적·실천적 무기력함을 고백할 수밖에 없었고 무정부주의·사회주의·마르크스-레닌주의 등 다양한 사회사상을 소개하면서 민족해방운동의 이념적 무기로서 수용하게 되었다.

 그들은 지역적 관계·학맥·친소관계로 맺어져 동지적 관계를 형성하였고 대중적 실천을 경험하면서 점차 성장해갔다. 예컨데 ‘서울파’의 리더인 金思國은 3·1운동 시기인 1919년 4월 23일 ‘국민대회사건’으로 체포되어 2년형을 선고받고 1920년 10월 말에 석방되었다.115) 김사국은 1892년 11월 9일 충남의 빈한한 가정에서 출생하여 10살 때 부친을 잃고 편모슬하에서 동생 金思民과 모친을 따라 금강산 楡岾寺에 들어가 한학을 배우다가 그후 서울에 올라와 보성학교에서 수학하다가 중도에 퇴학하였다. 1910년 한일합병이 되자 불만을 품고 만주와 시베리아로 유랑하며 동지의 결속에 노력하다가 1919년에 3·1운동이 일어나기 전에 국내로 들어와 ‘국민대회’사건으로 체포되었다.

 출옥 후부터 김사국은 서울청년회 안팎의 자신의 동지들과 마르크스주의 학습을 계속해 왔던 것 같다. 그가 1922년 중반 이후 ‘서울파’의 가장 탁월한 지도자로 부상하게 되는 것은 이러한 사실을 반증해주는 것이다. 1921년 초부터 1922년 4월 무렵 김사국의 활동116) 그는 1920년에 출감한 후 노동운동의 필요롤 절실히 느끼고 노동대회에 간부가 되어 활동하였고, 1921년 봄에 청년연합회의 편집부 위원으로 선출되는 동시에 서울청년회를 조직하였다. 1921년 11월에 동경에 건너가≪5·1신보≫를 발기하였다. 김사국은 1921년 11월 29일 동경에서 黑濤會 창립에 참여하였다. 박열·김약수 등이 주도하여 흑도회가 창립되었을 무렵 일본 사상계는 생디칼리즘·아나키즘이 풍미하였던 시기였다. 일본의 저명한 무정부주의자인 大杉榮·岩佐作太郞과 사회주의자인 堺利彦·高津正道 등의 후원하에 흑도회는 창립되었다. 이후 흑도회는 1922년 9월 내부의 사상적 대립으로 공산주의 분파와 아나키스트 분파로 분화되어 해체되었다.은 민족에 대한 뜨거운 애정을 지닌 한 개인이 급속히 사회주의자로 변모하게 되는 과정을 응축적으로 보여주고 있다. 이것은 아마 식민지 조선의 민족적·계급적 해방을 동시에 열망했던 대다수 사회주의자들이 형성되는 과정이었을 것이다.

 또한 1916년 가을 동경에서 金錣洙 등이 신아동맹단을 결성하고 “아세아에 있어서 일본제국주의를 타도하고 새 아세아를 세우는데 전력을 다할 것”을 선언하였다. 이후 신아동맹단은 3·1운동의 대중적 열기에 고무되어 1920년 6월 서울에서 5차대회를 열고 명칭을 사회혁명당으로 바꾸었다. 이들은 “계급타파와 사유제도의 타파, 무산계급 전제정치와 전국인구의 10분지 7되는 무산자들과 함께 혁명운동을 실행할 것” 등을 주장하였다. 1921년 5월 중국 상해에서 고려공산당(상해파) 창립대회에 8명의 대표를 파견하면서 상해파 국내지부로의 위상을 갖게 되었다.117) 이현주,≪국내 임시정부 수립운동과 사회주의세력의 형성(1919∼1923)-서울파, 상해파를 중심으로-≫(인하대 박사학위논문, 1999), 132∼144쪽.
이애숙,≪1922∼1924년 국내의 민족통일전선운동>(≪역사와 현실≫28, 한국역사연구회, 1998), 94쪽.

 1920∼1922년 무렵 국내에서 발간된≪개벽≫·≪공제≫·≪아성≫·≪신생활≫등 잡지에는 크로포트킨(Kropotkin) 등의 무정부주의에 대한 글이 빈번하게 소개되는 등 민족주의·무정부주의·사회주의 등이 혼재되면서 그 내부에 분화과정이 일어나는 시기였다.

 ‘민중문화의 제창, 자유사상의 고취’를 내걸고 1922년 3월 창간된≪신생활≫6호에서 鄭栢은<노농로서아의 문화시설>이란 글을 통해 1917년 10월 혁명 이후 건설된 노농정부는 미술·연극·문학·교육·정치경제학·사회과학 등 각 부분에서 새로운 민중적 문화를 성장시키고 있음을 소개하고 있다. 또 辛日鎔은<마르크스사상의 연구-계급쟁투설->에서 마르크스(Karl Heinrich Marx)의 계급·계급의식·프롤레타리아독재에 대한 사상 등을 소개하였다. 그는 ‘노동운동의 사명과 무산계급의 독재’라는 절에서 다음과 같이 프롤레타리아독재에 대하여 언급하고 있다.

노동조합운동 일반이 국가나 사회에 대하여 국민적 요구를 제출하는 것인 이상에는 노동당은 노동조합운동 전체의 정치적 표현이다. 그 기초된 노동조합운동이 확실하고 강고함에 따라서 노동당은 더욱 유력한 활동을 하고 능히 그 임무를 수행할 수 있다면 더욱 결과가 진지한 의의를 가지게 될 것이다. 노동조합은 단순히 현재 다소의 사업으로써 만족할 것이 아니요. 사회변혁의 과정에서 발생한 자본주의○○○(의 변혁)를 위하여 활동하는 무산계급의 포부의 중력의 초점 및 중심이 될 것은 물론이다. 이 목적의 성취에 가장 유력한 근간은 정권장악이다. 그 원조에 의하여 무산계급은 의식적으로 자본주의의 사회를 ○○○○○(사회주의의)사회로 변혁할 수 있다는 견해다. 이 변혁시대에는 일종의 정치적 과도시대가 부수된다고 말하였다. 그리고 그 상태를 무산계급독재라고 명칭하는 것이다(辛日鎔,<마르크스 思想의 硏究-階級鬪爭說->,≪新生活≫6, 1922년 6월, 40∼41쪽).

 즉, 그는 마르크스의<공산당선언>·<고타강령비판>에서 형성되고 레닌의≪국가와 혁명≫에서 정식화된 자본주의에서 공산주의로의 이행기로서 프롤레타리아트(proletariat) 독재에 대하여 설명하고 있는 것이다.

 또 김산의 다음의 언급에서 당시 사회주의자들이 마르크스의<공산당선언>, 레닌의≪국가와 혁명≫등을 필수적으로 학습하였음과 무정부주의자에서 사회주의자로의 이론적·정치적 변화 모습을 파악할 수 있다.

1921년 북경에 도착하자마자 나는 마르크스주의 문헌을 읽기 시작하였다. 우선<공산당선언>을 공부한 후, 레닌의≪국가와 혁명≫을, 그 다음엔≪사회발전사≫라는 논문집을 읽었다. 나는 과학적 대중투쟁의 중요성과 쿠데타와 테러행위의 무익함을 금방 깨닫게 되었다. 나는 아직도 테러리스트들의 영웅적인 희생에 찬탄을 금할 수 없으며 내 무정부주의자 친구들 사이에 만연한 동지들의 자유로운 정신을 좋아하고 있었다. 그렇지만 그들이 실패할 운명에 놓여 있다는 것을 분명히 느꼈다(님 웨일즈, 조우화 옮김,≪아리랑≫, 동녘, 1992, 121쪽).

 이와 같이 러시아혁명과 1919년 3·1운동을 커다란 분수령으로 국내외에서 많은 식민지 지식인들은 사회주의를 수용, 소개하면서 사상단체·비밀 공산주의그룹들을 조직하여 민족해방과 계급해방을 위해 투쟁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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